발카스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실만큼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검은 산맥의 동굴에는 금은보화가 쌓여 있다는 전설이 있었고, 파벨시의 오래된 건물 중 상당수가 그의 소유였다는 기록도 있었다.
하지만 전설 속 재산을 세입자의 통장에 넣는 방법은 놀랄 만큼 까다로웠다.
“이건 제 눈에도 황금인데요.”
김태오는 탁자 위의 작은 금괴를 바라봤다.
발카스 대리인 바렌은 금괴를 나무 상자 안으로 밀어 넣었다.
“왕실 유물 관리대장에 등록된 물품입니다. 매각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왜 보여 주셨습니까?”
“돈이 없어서 못 주는 게 아니라는 설명을 하려고요.”
“그 말을 듣고 제가 더 화가 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바렌은 상자를 닫았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는 보여 줄 만한 금괴가 없었습니다.”
태오는 마른 웃음을 지었다. 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는 드래곤에게 현금이 부족하다는 말은, 밀가루 창고 주인이 빵을 만들 밀가루가 없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그러나 실제로도 밀가루가 남의 것이라면 마음대로 구울 수는 없었다.
그날 조정실에 제출된 자산 현황은 크게 세 종류였다. 매각 제한이 있는 유물, 임차인이 있는 부동산, 그리고 동쪽 창고의 일반 상품이었다. 바렌은 앞의 두 종류를 당장 변제 재원으로 삼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동쪽 창고는요?” 태오가 물었다.
“창고 물품 중에는 소유권 증명이 가능한 것들이 있습니다. 공개 매입 절차를 밟으면 처분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됩니까?”
“감정 중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감정 종료 예정일을 먼저 적어 주세요.”
바렌은 더는 한숨도 쉬지 않았다. 이미 태오가 어떤 말을 할지 예상한 얼굴이었다.
***
토른은 태오와 함께 동쪽 창고를 찾았다. 원래는 주택의 계단만 고쳐 주고 끝낼 생각이었던 드워프였다. 그러나 집 지하에서 고대 구조를 발견한 뒤로 그의 일상도 달라졌다.
창고 문에는 붉은 밀랍으로 봉인이 붙어 있었다. 발카스 소유의 일반 자산 목록을 작성하기 전까지 물품을 임의로 옮기지 않겠다는 자산관리실의 표식이었다.
“드래곤이 금을 숨기려고 봉인한 거 아니에요?” 태오가 물었다.
“이건 재고 조사용이야.” 토른이 말했다.
“빨간 건 다 무섭게 보이네요.”
“빨간 염료가 가장 싸거든.”
태오는 잠시 토른을 바라봤다.
“드워프는 낭만을 참 잘 부수네요.”
“낭만으로 벽을 세우면 바로 무너져.”
관리인의 입회 아래 문이 열렸다. 안에는 오래된 농기구와 금속 부품, 사용하지 않은 난로, 표준 크기의 철판이 수백 장 쌓여 있었다. 그중 일부는 파벨시 대장간에서 주문했다가 인수를 연기한 물건이었다.
“저건 이미 돈 받은 물건 아닙니까?” 태오가 물었다.
관리인이 서류를 뒤졌다.
“계약금만 받았고 잔금을 기다리는 품목입니다.”
“그렇다면 계약금만큼은 구매자의 권리를 고려해야겠네요.”
“맞습니다.”
토른이 히죽 웃었다.
“이 녀석, 물건보다 서류를 먼저 보네.”
“제가 여기서 배운 생존 기술입니다.”
그때 창고 밖에서 아이가 우는 소리가 났다. 소피가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 그녀는 마차 운송비가 없어서 창고 관리자에게 일을 구하러 왔다고 했다. 동쪽 창고 재고 조사에 단기 일손이 필요하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태오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잠시 말문이 막혔다.
“보증금을 받으면 이런 일 안 하셔도 되는데.”
“받을 때까지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소피는 웃었다.
“그리고 일할 수 있을 때 일하는 게 부끄러운 것도 아니잖아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권자라는 지위와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하나도 모순되지 않았다.
그는 관리자에게 정식 일당과 지급 기한을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소피가 저마다의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조건을 확인해 주는 것뿐이었다.
***
오후에 마르셀로부터 보존 신청 임시 접수번호가 왔다. 자료를 보관하는 기관들이 원본과 사본의 위치를 확인하는 동안, 해당 파일의 폐기나 이관에는 별도 확인이 필요하다는 안내였다. 이것만으로 태오가 자료를 직접 읽을 권리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발카스의 보전 신청과 비슷한 겁니까?” 리네아가 물었다.
이벨은 고개를 저었다.
“서로 다릅니다. 지금 하는 일은 조사 자료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일이고, 발카스가 7년 전에 요청한 건 어떤 처분을 보류해 달라는 일이었죠. 둘 다 서류를 보호한다는 단어를 쓰지만 권리 효과가 같지는 않습니다.”
“같은 말인데 뜻이 달라서 사람 미치게 만드는군요.” 태오가 말했다.
“법률이 그런 부분은 있습니다.”
“실생활에도 많아요. 검토 중이라는 말은 돈이 곧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이벨은 반박하지 않았다.
리네아가 보관소에서 발견된 계약번호 중복표를 꺼냈다. 공개가 허용된 번호 부분만 적은 것이었다. 한 번호가 원금 수령기록과 주소 통지명단 양쪽에 나타났다. 그러나 항목의 작성일은 넉 달이나 차이가 났다.
“중복 작성이 무조건 중복 지급이라는 뜻은 아니네요.” 태오가 말했다.
“네. 이 주소 통지명단은 거주지가 바뀐 사람에게 연락하기 위한 걸 수 있어요.”
“그러면 누가 어디로 이사했는지 잘못 적었다면요?”
이벨이 펜을 들었다.
“그렇다면 누가 통지를 받았는지와 누가 돈을 청구할 수 있는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태오는 수첩을 펼쳤다. 돈의 행방을 찾으려 시작한 일이 이제 사람의 행방을 찾는 일이 되어 있었다.
***
그날 창고에서는 뜻밖의 작은 다툼이 벌어졌다. 대장장이 조합에서 나온 장인이 철판 여러 묶음을 자기 조합이 주문한 물건이라며 판매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다.
“선금은 우리가 냈소. 아직 물건을 받지 못한 것뿐이오.”
창고 관리인은 물품 목록을 확인했다. 같은 규격의 철판이 두 곳에 있었고, 어느 묶음이 선금을 받은 주문품인지 표시가 흐릿했다.
“이대로 경매에 올렸다면 큰일 날 뻔했군.” 토른이 말했다.
태오는 장인의 계약서를 읽었다. 선금 액수와 납품일은 있었지만 제품 일련번호는 빠져 있었다. 대신 납품 당시 만들기로 한 각인 모양이 도면에 그려져 있었다.
“토른 씨, 저 모양 알아보세요?”
“그래. 마름모 끝에 작은 점 두 개. 대장간 표준 각인이야.”
토른은 창고 한쪽의 철판을 들어 올려 밑면을 살폈다. 첫 묶음에는 표시가 없었고, 두 번째 묶음에는 낡은 마름모 각인이 남아 있었다.
“이쪽이 조합 주문품일 가능성이 높네. 다만 출고 장부와도 확인해야겠어.”
관리인은 즉시 물품을 별도로 떼어 놓았다.
태오는 마음이 복잡했다. 자신의 돈을 받기 위해 드래곤의 재산을 팔아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돈을 잘못 가져오는 건 원치 않았다.
“빨리 팔 수 있는 것만 골라 팔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렇게 하면 네가 겪은 일을 또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거야.”
토른이 대답했다.
“드워프한테는 철판과 사람이 같은 겁니까?”
“둘 다 휘게 하면 원래대로 되돌리기 어렵지.”
태오는 그 말에 웃었다. 토른이 어깨를 으쓱했다.
***
점검이 끝난 뒤 소피는 창고 밖에서 태오를 붙잡았다. 오늘 받은 일당을 손바닥에 올려 보이며 아이의 신발을 사려고 한다고 했다.
“그렇게 작은 돈도 직접 받으니 안심이 돼요.”
“지급 확인서도 받으셨죠?”
“네. 당신이 하도 말해서요.”
태오는 민망하게 웃었다.
소피는 갑자기 한 가지를 물었다.
“만약 발카스가 당신에게 돈을 먼저 다 돌려주면, 우리 일도 끝나는 건가요?”
태오는 즉답하지 않았다.
“제가 당사자인 계약은 끝날 수 있습니다. 다른 분들의 계약은 별도예요. 하지만 절차를 정리한 자료는 남겨 두려고 합니다. 제가 없어도 활용할 수 있도록요.”
“고맙지만, 그게 당신 의무는 아니잖아요.”
“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요.”
소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오는 처음부터 모두를 구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전세금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같은 일을 겪는 사람들을 알게 됐다. 그 사실을 끝까지 잊고 싶지 않았다.
***
집으로 돌아가기 전 리네아는 태오에게 작은 공책을 보여 주었다. 처음 중개업 일을 시작했을 때 작성했던 물건이었다. 집마다 햇빛이 드는 시간, 비 오는 날 지붕 상태, 주변 시장까지 걸리는 거리 등을 적어 두었다.
“당신 집에도 메모가 있어요.”
“뭐라고 적으셨어요?”
그녀는 읽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주방이 넓고, 이웃이 조용하며, 집주인 쪽 서류가 지나치게 낡음.”
“마지막 줄이 중요했네요.”
“제가 그때 더 자세히 알아봤어야 했어요.”
태오는 책을 덮어 주었다.
“잘못 안내한 건 바로잡으면 되죠. 지금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쉽게 용서해 주네요.”
“아직도 종이를 이렇게 많이 들고 다니시는 걸 보면 수고는 충분히 하셨죠.”
리네아는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은 한참 공책을 들여다봤다. 기록은 누군가를 몰아세우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다음 사람에게 더 나은 설명을 해 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
해 질 무렵 바렌이 감정인 두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동쪽 창고의 처분 가능 목록 중 일부가 첫 분류를 마쳤다고 했다. 누구도 금액을 확약하지 않았지만 일단 품목별 소유권 관련 서류가 붙어 있었다.
“이만큼 준비했습니다.” 바렌이 말했다.
태오는 양손으로 목록을 받았다.
“다른 집주인에게 이런 걸 요구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태오는 첫 줄을 읽었다. 난로 스물셋, 철판 예순 묶음, 농기구 교체 부품. 그리고 맨 아래에 적힌 항목이 그의 눈을 붙잡았다.
[제4 보전 통로 철제 표식함. 매각 대상 제외. 사유: 위탁 보관 추정.]
“이건 왜 여기 있죠?”
바렌이 들여다봤다.
“창고 목록에서 물품을 제외한 이유를 적은 것입니다. 소유권이 분명하지 않으니까요.”
“제4 보전 통로라면 옛 공동 보관소 자료 분류에도 붙어 있었는데요.”
“우연일 수 있습니다.”
토른이 고개를 저었다.
“그쪽 도면에서도 같은 이름을 썼어. 설계자가 한 사람이었으니까.”
“열어 볼 수 있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안 됩니다.” 바렌이 즉답했다. “매각 대상이 아닌 물품입니다. 소유자가 확인될 때까지 봉인해야 합니다.”
태오는 당장 열자고 우기지 않았다. 오히려 표식함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물었다.
“왜 그걸 묻습니까?”
“오늘 아침 금고상회 직원이 조정표를 찾을 수 있다며 제4 보전 통로 번호를 보여 줬거든요.”
바렌이 굳었다.
“그 직원 이름을 아십니까?”
“명함은 못 받았습니다.”
바렌은 잠시 생각하다 감정인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이 목록이 외부로 알려지기 전에 특정 보관함을 찾는 사람이 있었다고요?”
“네.”
“그렇다면 발카스 님께 바로 보고해야겠습니다.”
태오는 그 얼굴에서 처음으로 단순한 짜증과 다른 긴장을 읽었다.
***
밤에 집에 돌아오니 리네아가 오래된 등불을 닦고 있었다.
“어땠어요? 창고는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은 있답니다. 다만 누가 산다고 확정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진전이네요.”
“그런데 왜 드래곤이 평범한 철판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죠?”
“오래 살다 보면 누구나 필요 없는 물건을 쌓아 두잖아요.”
“드래곤이라면 좀 더 반짝이는 걸 모을 줄 알았습니다.”
리네아가 미소 지었다.
“당신도 종이를 잔뜩 모으잖아요.”
“제 종이는 다 돈이랑 관련이 있습니다.”
“그럼 아주 드래곤다운 취미네요.”
태오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손에 든 등불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금고 얘기 말고 다른 얘기 할까요?”
“어떤 거요?”
“우리 처음 만난 날, 당신이 계약서를 세 번 읽어서 제가 바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땐 세 번으로 부족했죠.”
“네. 앞으로는 제가 옆에서 같이 읽을게요.”
리네아가 다가와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태오는 잠시 웃으며 그녀를 안았다. 그 짧은 침묵이 어쩌면 서류 백 장보다 귀하게 느껴졌다.
그때 전달석이 희미하게 빛났다.
태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안 볼 거예요?” 리네아가 물었다.
“삼십 초만요.”
“왜요?”
“비싼 차를 버린 벌금을 갚는 중입니다.”
그녀가 소리 없이 웃었다.
삼십 초 뒤 확인한 전달문에는 동쪽 창고의 철제 표식함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위탁 추정 물품의 원소유자 확인 신청 접수. 신청인의 대리인 표기: 브라운 금고상회.]
발카스 자산 목록을 처음 공개한 날이었다.
그런데 브라운은 마치 그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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