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시 거주권 등록소의 대기표에는 숫자가 백스물셋까지 적혀 있었다.
김태오가 받은 번호는 백스물넷이었다.
그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아홉 명뿐이었다.
“숫자가 왜 이래요?”
옆자리에 앉은 리네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오전에 대기표를 뽑고 포기한 사람이 많아서요.”
“그럴 만하네요.”
접수 창구에서는 서기관 한 명이 커다란 장부를 뒤적이고 있었다. 종이는 산처럼 쌓였고, 옆에는 서류를 물어 나르는 작은 정령 둘이 지쳐 널브러져 있었다. 태오는 반나절을 앉아 기다리면서 이곳 공무원들도 힘들게 산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백스물넷 번!”
마침내 번호가 불렸다.
태오는 서류를 한 아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증금 반환 분쟁을 접수하러 왔습니다.”
서기관은 계약서를 펼쳤다. 처음에는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소유주 이름을 보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발카스?”
“네.”
“그 발카스?”
“동명이인이 있습니까?”
“없을 겁니다.”
서기관은 기침을 했다.
“귀하의 사건은 접수가 어렵겠습니다.”
태오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사유가 뭔가요?”
“본 등록소는 왕국의 거주 관련 분쟁을 다루지만, 고대 종족 재산에는 특별 관할 규정이 적용됩니다.”
“드래곤은 예외라는 말씀이군요.”
“예외라기보다 전통적인 권리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태오는 문장 하나를 골라 되풀이했다.
“특별 관할 규정이요. 조항 번호 알려주시죠.”
서기관은 장부를 뒤졌다. 한 장을 넘기고, 세 장을 넘기고, 다른 장부를 꺼냈다. 잠시 뒤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글쎄요. 옛날 규정이라…….”
“규정이 있으면 보여 주세요. 없으면 접수해 주시면 되고요.”
“사람이 말이야, 상황을 좀 봐 가면서…….”
“저도 상황 보러 산맥까지 다녀왔습니다.”
서기관의 눈이 커졌다.
“직접요?”
“네. 살아 돌아왔습니다.”
리네아는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도 증인입니다.”
서기관은 잠시 둘을 바라보더니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럼 구두 조정 신청서라도 작성하시죠.”
태오는 미리 가져온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아니, 벌써요?”
“사무실에 오기 전에 준비했습니다.”
그는 봉투에서 우편 수령 확인, 집 상태 기록, 계약서 사본을 차례로 꺼냈다. 서기관은 마치 굶주린 뱀에게 먹이를 받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아 들었다.
접수만 되면 끝일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서기관은 신청서 끝에 난감한 도장을 찍었다.
[보류. 임대인 출석 통지 불가.]
“아니, 주소가 있잖습니까.”
“있긴 하지만 검은 산맥으로 공문을 보낼 수가 없어서요.”
“우편조합은 보냈습니다.”
“그건 개인 편지고요.”
“공문은 왜 안 됩니까?”
“지난번 보냈다가 서류 담당자가 태워 먹혔거든요.”
“서류 담당자가요?”
“서류요. 담당자는 도망쳤고.”
태오는 안도할 틈도 없이 서기관에게 물었다.
“그러면 드래곤에게 공문을 전달할 방법을 만들어야겠네요.”
“그건 등록소의 업무 범위를 넘습니다.”
그 말에는 묘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누구도 새로운 일을 맡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태오는 속으로 짧게 욕을 했다. 한국에서 민원 창구를 돌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돌아가라는 말 대신 관할이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당사자만 계속 걸어야 했다.
그는 서류를 회수하지 않았다.
“보류 상태로라도 접수 번호 남겨 주세요.”
“왜 굳이…….”
“오늘 제가 왔다는 기록이 필요합니다.”
서기관은 마지못해 번호를 찍었다.
[분쟁 사건 218-47.]
태오는 숫자를 내려다봤다.
또 47이었다.
설마 같은 번호일까.
그는 가방 안의 검은 비늘을 만져 봤다. 차가웠다.
***
등록소 밖에서 리네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무 아래서 과일을 팔던 상인이 두 사람을 불렀지만 리네아는 듣지 못했다.
“왜 그러세요?”
“중개인 길드에서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제가 분쟁 신청한 게요?”
“발카스 님과 거래하는 중개인은 몇 안 되거든요. 괜히 눈 밖에 나면 다른 집도 맡기 어려워질 수 있어요.”
태오는 걸음을 멈췄다.
리네아가 처음 계약할 때 왜 집주인의 정체를 말하지 않았는지 이제 조금 이해가 됐다. 그녀에게는 일감이었다. 발카스가 마음만 먹으면 중개업 길드를 흔들 수 있었다. 그렇다고 설명을 감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럼 처음에 말씀해 주셨어야죠.”
리네아가 고개를 숙였다.
“맞아요.”
“소유주가 드래곤이라는 걸요.”
“그때는…… 정말 문제 없을 줄 알았어요.”
“저도 그랬습니다.”
태오는 화가 났다. 다만 리네아가 일부러 자신을 속여 돈을 빼앗았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었다. 계약서의 중개 확인란에는 분명 리네아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녀가 증인으로 서겠다고 했다는 점도 사실이었다.
“지금부터라도 같이 확인해 주세요.”
“뭘요?”
“이 집 말고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는지요.”
리네아가 눈을 들었다.
“다른 세입자들이요?”
“네. 저 혼자만 문제라면 개인 분쟁인데, 여러 명이면 이야기가 달라지잖아요.”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계약 기록부터 찾아볼게요.”
“고맙습니다.”
태오는 시장으로 향했다. 배가 고팠다. 드래곤을 만나러 다녀오고 관청을 돌아다니느라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는 길가에서 갓 구운 빵 두 개를 사서 하나를 리네아에게 건넸다.
“이럴 때일수록 밥은 먹어야죠.”
“태오 씨는 이상한 사람이에요.”
“왜요?”
“목숨 걸고 용한테 돈 받으러 갔다 와서는 빵값부터 계산하잖아요.”
“돈 걱정하는 사람이니까 빵값도 계산하는 겁니다.”
둘은 빵을 먹으며 등록소 건너편의 긴 줄을 바라봤다.
***
오후에는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태오의 집으로 다부진 체격의 드워프가 들어섰다. 어깨에는 커다란 공구함이 걸려 있었다. 수염에 쇳가루가 묻어 있었고, 손에는 못보다 굵은 손가락이 달려 있었다.
“김태오라는 사람이 누구냐?”
“접니다.”
“나는 토른. 이 집 계단을 고친 사람이 네 놈이라며?”
태오는 경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문제 있습니까?”
“문제가 있지.”
토른은 계단을 두 번 밟았다. 그러자 세 번째 판자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이 나무는 원래 하중을 받는 구조가 아니야. 위에서 힘이 걸리면 금방 틀어진다.”
“그래서 바꿨습니다.”
“위쪽 연결부도 봐야 해.”
“그건 손대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토른의 눈썹이 움직였다.
“누가?”
“집주인이 남긴 봉인이라고요.”
드워프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계단 아래에 무릎을 꿇고 바닥을 살폈다. 잠시 뒤 손가락으로 작은 틈을 짚었다.
“여기서 발열이 나고 있어.”
“난방 마법 때문입니까?”
“아니. 아래에서 올라오는 다른 마력이야.”
토른은 공구함에서 얇은 쇠막대를 꺼내 바닥 틈새에 넣었다. 막대 끝이 푸르게 빛났다. 태오는 그 빛이 집 문틀의 비늘에서 보았던 것과 닮았다는 걸 알아챘다.
“이 집 언제 지어진 겁니까?”
“계약서에는 백삼십 년 됐다고 되어 있습니다.”
“흠.”
“뭔가 잘못됐습니까?”
토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공구함을 닫고 일어났다.
“네가 보증금 못 받았다는 소문 들었어.”
“벌써요?”
“시장에서 사람 입은 바람보다 빠르지.”
드워프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한 가지 알아 둬라. 용이 사는 곳엔 언제나 금고가 있다. 그런데 용이 빌려준 집에도 금고가 있다는 건 좀 다른 이야기야.”
태오는 계단 아래를 바라봤다.
“무슨 뜻입니까?”
“내일 다시 오마. 설계도부터 찾아야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떠났다.
태오는 한동안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바닥 틈 사이로 정말 아주 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여태 난방 배관인 줄 알았던 열이었다.
드래곤이 집주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팠다.
그런데 집 밑에 무언가 숨겨져 있기까지 하다니.
“제발.”
태오는 바닥을 향해 중얼거렸다.
“집은 그냥 집이면 안 되나?”
***
토른이 떠난 뒤 태오는 한 가지를 더 확인하려고 등록소로 돌아갔다. 오늘만 두 번째 방문이었다. 처음에는 서기관이 귀찮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지만, 태오는 웃으며 문 앞의 안내판을 가리켰다.
“주택 안전 기록은 공개 열람이라고 적혀 있네요.”
“그건 공개지만 열람 비용이 듭니다.”
“얼마입니까?”
“은화 한 닢.”
태오는 곧바로 동전을 꺼냈다.
서기관은 더 이상 핑계를 찾지 못했다. 묵직한 서류철을 끌어 와 탁자에 내려놓았다. 먼지가 날렸다. 태오는 맨 위 서류를 읽었다.
[동문 공동주택 12개 동. 기초 공사 승인.]
건축 연도는 백삼십 년 전. 하지만 보관소 설치 공사는 스물세 해 전이었다. 이상했다. 발카스가 집을 매입한 날짜와 같은 해였다.
“원래 지하실이 있었는데 나중에 봉인을 했다는 뜻이겠죠?”
“그럴 겁니다.”
“보관소 설치 승인자는요?”
“주택조합이라고 적혀 있군요.”
“그러면 보관소 소유권은 조합에 있었습니까?”
서기관은 한참 문서를 읽었다.
“조합이 청산된 뒤 승계자가 별도로 지정됐을 겁니다.”
“누구인데요?”
“그걸 알면 왜 여기에 앉아 있겠습니까.”
태오는 그만 웃음이 나왔다. 담당자가 너무 솔직해져서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조합이 왜 청산됐습니까?”
“사업이 잘못됐겠지요. 옛날 일입니다.”
“청산 당시 공고가 남아 있습니까?”
“일반 시민이 볼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서기관은 장부를 덮으려 했다. 태오는 서류에 기록된 날짜와 공사명을 따로 적고 고개를 숙였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리하지 마시오.”
“그 말은 요 며칠 정말 많이 듣습니다.”
태오는 건물 밖으로 나오며 공사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집을 인수하기 전부터 봉인을 지시했다는 기록과 이어졌다. 누군가 집 열두 채를 사기 전에 지하실부터 잠그고 싶어 했다. 그게 발카스 자신인지, 집을 넘긴 조합인지, 아니면 제삼자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수첩에 질문을 적었다.
[보관소는 누구의 돈을 지키려고 만들어졌나?]
[왜 매각 직전에 봉인했나?]
[봉인의 열쇠는 누가 가지고 있나?]
거리를 걷다가 태오는 우연히 오래된 우물 앞에 멈췄다. 우물에는 ‘주택조합 주민 공동 시설’이라는 석판이 남아 있었다. 우물가의 노인은 도르래를 고치고 있었다.
“이 조합이 예전에 여기 동네를 관리했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그랬지.”
“어떤 곳이었습니까?”
“돈 없는 사람들이 집을 마련하려고 만든 조합이야. 돈을 조금씩 모아 땅을 사고, 임대료도 싸게 받았지.”
“좋은 곳이었네요.”
“한동안은.”
노인의 손이 멈췄다.
“그러다 전쟁이 나고 돈이 부족해지자 외부에서 큰돈을 빌렸어. 처음에는 이자만 갚으면 된다고 했지.”
“누가 빌려줬습니까?”
“당시엔 왕실에서 보증했다고 들었네. 다들 믿었지.”
태오는 노인을 바라봤다.
“왕실이요?”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나도 몰라. 오래전 이야기야.”
태오는 고맙다고 인사했다. 혼자 들은 옛 소문을 사실로 적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기록을 찾아야 할지는 조금 분명해졌다.
지하 보관소와 왕실 보증.
평범한 집 밑에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낯선 병사가 두 사람을 지나쳤다. 갑옷에는 검은 산맥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병사는 태오를 알아본 듯 잠깐 멈췄다가, 아무 말 없이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태오는 뒤를 돌아봤다.
“리네아 씨.”
“왜요?”
“요즘 누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리네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럴 수도 있어요.”
둘은 말없이 집 쪽으로 걸었다. 태오는 문 앞에 쌓인 작은 화분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어떤 비밀이 있더라도 자신이 원한 건 거창한 싸움이 아니었다. 약속한 날짜에 자기 돈을 돌려받는 것. 그 작은 권리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했다.
태오는 수첩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길이 막혔을 때 무작정 문을 두드리는 것만이 답은 아니었다.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 사람의 말을 하나씩 대조하다 보면, 언젠가 닫힌 문에도 손잡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지 몰랐다. 보증금이 여전히 묶여 있어도 지금은 적어도 무엇을 모르는지 분명해졌다.
***
그때 문 아래로 작은 봉투 하나가 밀려 들어왔다.
발신인은 없었다.
[보증금을 돌려받고 싶다면, 등기부의 이전 소유자를 확인하세요.]
태오는 봉투를 들고 한참 서 있었다.
갑자기 이 집의 벽이 조금 낯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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