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산맥으로 가는 마차는 예상보다 훨씬 평범했다.
앞바퀴가 삐걱거렸고, 짐칸에서는 양배추 냄새가 났다.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고대 드래곤에게 항의하러 가는 길치고는 지나치게 생활감이 넘쳤다.
“멀미하시면 이걸 씹으세요.”
리네아가 작은 잎사귀를 내밀었다.
김태오는 그것을 받아 들고 냄새를 맡았다.
“박하 같네요.”
“산맥에서 자라는 풀인데 속이 편해져요.”
“드래곤한테 물리면요?”
“그건 안 됩니다.”
“역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 약초는 없군요.”
리네아는 대답 대신 창밖을 보았다. 그녀도 긴장한 모양이었다.
태오는 가방을 끌어안았다. 안에는 계약서 원본을 제외한 복사본 세 부와 집 상태를 담은 기억 수정, 우편 접수증, 이전 세입자에게 연락하려고 적어 둔 주소가 있었다. 원본은 파벨의 서기관에게 맡겼다. 남은 것은 목숨뿐이었다.
마부가 말을 걸었다.
“정말 발카스 님을 만나러 갑니까?”
“네.”
“무슨 용무인데요?”
“돈을 받을 게 있어서요.”
마부가 고삐를 놓칠 뻔했다.
“누구한테요?”
“발카스요.”
“그분한테 돈을 받을 게 있다고요?”
그는 한참 태오를 살펴보더니 중얼거렸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
태오는 웃지 않았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본인에게는 웃을 일이 아니었다. 금화 삼백 닢은 그가 이세계에서 이 년 넘게 허리띠를 졸라매 모은 돈이었다. 남의 화물을 밤새 정리하고, 눈 오는 날에도 시장 창고 문을 열어 번 돈이었다. 숫자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돌려받아야 했다.
길이 험해지자 마차는 더욱 천천히 움직였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바위 사이로 검은 깃털 같은 재가 흩날렸다.
“이 산엔 왜 나무가 없어요?”
“발카스 님이 오래전에 한 번 크게 화내셨거든요.”
“그게 언제인데요?”
“대략 삼백 년 전이요.”
태오는 산을 둘러봤다.
삼백 년 전에 화낸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니. 성격 관리가 필요한 집주인이었다.
마차는 해가 기울 무렵 산기슭에서 멈췄다. 더 위쪽으로는 말이 가지 않으려 했다. 마부는 두 사람의 짐을 내려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돌아오는 마차는요?”
태오가 소리쳤다.
“살아 돌아오면 알아서 찾으시오!”
목소리만 남기고 마차는 사라졌다.
태오는 리네아를 바라봤다.
“서비스가 별로네요.”
“목숨 걸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좋은 서비스예요.”
두 사람은 좁은 돌길을 올랐다. 산허리에 커다란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동굴 앞에는 ‘무단 출입 금지’라고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팻말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가 있었다.
[방문객은 자기 재산을 직접 지켜야 하며, 분실에 대해 소유주는 책임지지 않음.]
태오는 기가 막혔다.
“표지판부터 면책조항이네요.”
“발카스 님은 규칙을 좋아하시거든요.”
“규칙을 좋아하는 분이 보증금 반환 기한은 안 지키려고 하시고?”
리네아는 아픈 데를 찔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동굴 안에서 바람이 불었다.
따뜻한 바람이었다. 이어 쇠 냄새와 오래된 동전 냄새가 풍겼다. 발밑에는 주먹만 한 금덩어리가 바위처럼 박혀 있었다. 태오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저 금, 캐도 됩니까?”
“절대 안 돼요.”
“금은 많네요.”
“말씀드렸잖아요. 엄청난 부자라고.”
“그런데 왜 삼백 닢은 못 줍니까?”
리네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
동굴 안쪽은 궁전보다 컸다. 거대한 기둥 사이로 금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보석으로 만든 물길이 흐르고, 먼 천장에서는 푸른 불꽃이 떠다녔다. 그 한가운데에 검은 비늘의 드래곤이 누워 있었다.
태오는 숨을 멈췄다.
머리만 작은 집 한 채 크기였다. 날개는 접혀 있었지만 펼치면 동굴 전체를 가릴 것 같았다. 검은 뿔이 천장을 향해 굽어 있었고, 눈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속까지 읽는 듯했다.
드래곤이 한쪽 눈을 떴다.
“누가 내 잠을 방해하느냐.”
목소리만으로 바닥이 울렸다.
리네아가 곧장 허리를 숙였다.
“발카스 님. 파벨 중개인 리네아입니다.”
“엘프냐.”
“네. 임대 계약 관련해 확인드릴 사항이 있어…….”
“또 집을 빌리러 왔느냐?”
“아닙니다. 기존 세입자입니다.”
발카스의 눈동자가 태오에게 향했다.
“저 조그만 인간이?”
태오는 고개를 숙였다.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싸우러 온 것도 아니었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안녕하십니까. 동문 골목 이층집에 사는 김태오입니다.”
“모르는 이름이다.”
“당연하시겠죠. 직접 만나 뵙는 건 처음이니까요.”
“그렇다면 나를 왜 찾아왔느냐.”
“계약이 끝나서 보증금을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정적.
동굴 구석에서 떨어지던 물방울 소리까지 들렸다.
발카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보증금?”
“금화 삼백 닢입니다.”
“삼백?”
“네.”
“내 황금 산을 보아라, 인간. 내가 고작 삼백 때문에 너를 속일 것 같으냐?”
태오는 주변을 둘러봤다. 눈앞의 황금은 그가 평생 벌어도 구경하지 못할 규모였다. 그렇다고 계약서의 숫자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돌려주시면 됩니다.”
드래곤의 콧구멍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났다.
“아직 정산하지 않았다.”
“퇴거 점검 자료 가져왔습니다.”
태오는 가방을 열어 기억 수정을 꺼냈다.
“모든 방의 상태를 기록했고, 수리비 영수증도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한 장씩 설명드리겠습니다.”
드래곤은 수정을 힐끗 보았다. 그러고는 큰 하품을 했다. 입안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 리네아가 잽싸게 태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너무 가까이 가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태오는 한 걸음 물러섰다.
“제가 원하는 건 싸움이 아닙니다. 지급 날짜만 확정해 주세요.”
“다음 달.”
“계약서에는 일주일 이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주.”
“그다음 주에도 못 주시면요?”
“인간, 너는 질문이 많구나.”
“돈이 아직 안 들어왔으니까요.”
발카스가 발톱을 바닥에 찍었다. 돌바닥이 갈라졌다.
“이 위대한 발카스를 의심하느냐!”
리네아는 눈을 감았다. 태오는 목이 바짝 말랐다. 당장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뒤돌아보니 출구까지 너무 멀었다. 드래곤 앞에서 달리기는 해결책이 아니었다.
“의심하지 않으려고 직접 왔습니다.”
“뭐?”
“정말 지급하실 생각이라면 날짜를 문서로 남겨 주세요. 그러면 저는 그날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발카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는 눈앞의 인간을 살폈다. 겁을 먹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태오의 손끝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민 종이를 거두지는 않았다.
“금화 삼백이 네게 그토록 귀하냐?”
“네.”
“하찮은 금속 조각일 뿐이다.”
“발카스 님에게는 그럴 수 있겠죠.”
태오는 조금 망설이다 덧붙였다.
“저한테는 이 년입니다.”
드래곤이 말이 없어졌다.
“매일 일해서 모은 이 년이요. 저 돈이 있어야 다른 집으로 옮기고, 새 일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바람이 다시 동굴 안을 돌았다.
잠시 후 발카스가 말했다.
“나가라. 보증금 문제는 집사를 통해 처리하겠다.”
“집사 이름이 뭡니까?”
“…….”
“연락할 주소는요?”
“인간!”
발카스의 포효에 천장 돌가루가 떨어졌다.
리네아가 태오의 팔을 끌어당겼다. 더 버티면 정말 위험했다.
“오늘은 이만 가요!”
태오는 계약서를 움켜쥐고 물러났다.
***
발카스가 화를 냈을 때 동굴의 다른 모습도 드러났다. 벽면의 오래된 문양이 하나씩 붉어졌고, 황금 더미 뒤에 앉아 있던 작은 석상들이 고개를 돌렸다. 태오는 눈을 의심했다. 석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리네아 씨.”
“네?”
“저거 원래 움직입니까?”
“어디요?”
“금화 뒤의 석상이요.”
리네아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보물 수호 인형이에요. 건드리면 안 돼요.”
태오는 괜히 양손을 들었다. 보물을 훔치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하지만 동굴의 주인이 화낼 때마다 수호 인형이 움직인다면, 대화가 틀어질 경우 도망갈 길도 사라질지 몰랐다.
발카스의 발톱 아래에는 크고 작은 열쇠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어떤 것은 돌문만큼 크고, 어떤 것은 손톱만 했다. 열쇠마다 숫자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태오는 자신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봤다.
“그걸 왜 보느냐.”
발카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열쇠가 많아서요.”
“모두 내 재산의 증거다.”
“집 열쇠도 저기에 있습니까?”
“집이 몇 채인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 몇 채인지 몰랐다. 그는 매일 들어오던 자기 집 현관문 하나만 알고 있었다. 이 순간 발카스가 가진 재산이 크다는 사실보다 무서운 것은, 집주인이 자기 집이 얼마나 많은지도 정확히 모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혹시 임대 관리인은 따로 두셨습니까?”
“당연하다.”
“그분 이름을 알려주시면 다음부터는 직접 찾아뵙지 않겠습니다.”
발카스가 움직임을 멈췄다.
“다음부터?”
“보증금을 돌려주실 때까지 필요한 일이 있으면요.”
“정말 집요한 인간이군.”
태오는 억지로 웃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연락처라도 받고 싶어서요.”
발카스는 콧김을 내뿜었다. 다시 작은 불꽃이 튀었다. 용이 한숨을 쉬어도 사람에게는 화재 경보 같았다.
그때 동굴 안쪽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 나왔다. 손에는 커다란 장부가 들려 있었다. 얼굴의 절반은 가면으로 가렸고,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주인님. 정산 시간을 초과했습니다.”
“이 인간이 방해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서명도 남아 있습니다.”
태오는 그 사람이 품에 안은 장부를 바라봤다. 표지에는 숫자가 줄지어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중 몇 개는 처음 보는 형태였다. 용이 쓰는 숫자일까, 고대어일까.
“실례지만 관리인이십니까?”
검은 옷의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방문객이 알 필요 없습니다.”
“제가 대여 계약 당사자라서요. 연락할 창구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그는 태오를 잠시 바라보다 차갑게 대답했다.
“임대 관리 문의는 파벨 중개 길드를 통하십시오.”
리네아가 당황해 한 걸음 나섰다.
“길드에서는 회신을 받지 못하고 있어서…….”
“그러면 길드의 문제입니다.”
장부를 든 사람은 더 말하지 않았다. 태오는 가면의 눈구멍 뒤에서 아무 표정도 읽지 못했다. 정작 발카스보다 이 사람이 더 불친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몸을 돌리자 장부 뒷면의 작은 표식이 드러났다. 세 개의 둥근 고리가 서로 맞물린 문양이었다. 태오는 그것을 기억해 뒀다.
동굴 입구까지 물러나는 동안 리네아가 속삭였다.
“저 사람은 처음 봐요.”
“관리인은 아는 분이 아니었습니까?”
“발카스 님의 집사들은 보통 임프들이었어요. 저런 사람은…….”
말끝이 흐려졌다. 태오는 더 묻지 않았다. 적어도 드래곤이 직접 모든 거래를 관리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다음에는 이 장부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
동굴을 빠져나왔을 때는 해가 완전히 졌다. 두 사람은 산기슭의 작은 초소에서 밤을 보냈다. 경비병은 드래곤에게 항의하러 갔다는 말을 듣고 따뜻한 수프를 한 그릇 더 줬다.
“살아 나온 것만 해도 대단하십니다.”
태오는 수프를 떠먹으며 물었다.
“원래 발카스는 보증금을 잘 안 돌려줍니까?”
경비병이 주변을 살폈다.
“그분 땅에 사는 사람들은 다 부자라고 생각하죠. 실제로는 돈을 돌려받은 사람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왜죠?”
“주인이 늦게 줘도 다들 기다리거든요. 화내면 무섭잖아요.”
태오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게 문제였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돈을 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세입자 입장에서는 돈 없는 집주인과 다를 바 없었다.
경비병은 초소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작은 나무 상자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하나 왔습니다.”
상자에는 태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저한테요?”
“동굴 집사에게서요. 내일 아침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태오는 뚜껑을 열었다.
금화가 들어 있을 줄 알았다.
안에는 작은 검은 돌 하나와 짧은 편지가 있었다.
[임차인 김태오. 보증금 지급은 현재 불가능하다. 대신 임대인의 자산 가치를 보장하는 증표를 제공한다.]
리네아가 편지를 읽고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뭡니까?”
“발카스 님의 비늘이에요.”
태오는 검은 돌을 집었다. 표면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래서요?”
“굉장히 귀한 물건이에요.”
“팔면 얼마죠?”
“용의 비늘은 시장에서 마음대로 거래할 수 없어요.”
“그럼 현금으로 바꿀 수 없다는 거네요.”
“그렇죠.”
태오는 상자를 닫았다.
집주인에게 돈을 받으러 갔다가 집주인의 몸에서 떨어진 비늘을 받아 왔다.
이것도 참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비늘 뒷면에는 마법으로 새긴 아주 작은 숫자가 있었다.
[보관 번호 47-B.]
태오는 그 숫자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리네아 씨.”
“네?”
“드래곤 비늘에도 물품 번호를 붙입니까?”
리네아의 표정이 굳었다.
“보통은…… 안 붙여요.”
그러면 왜 번호가 붙어 있을까.
태오는 비늘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돈 대신 받은 물건이어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아무 의미 없는 돌은 아닌 것 같았다.
내일 파벨로 돌아가면 알아볼 일이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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