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증명이 뭡니까?”
파벨 우편조합의 접수원이 물었다.
김태오는 펜을 들어 종이 위에 세 개의 네모를 그렸다.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내용을 보냈는지 증명해 주는 서류예요.”
“편지는 그냥 보내면 되는데요?”
“그냥 보냈다가 못 받았다고 하면요?”
“다시 보내면 되죠.”
“두 번째도 못 받았다고 하면요?”
“또 보내면…….”
접수원의 말끝이 흐려졌다. 태오는 웃으며 종이를 밀어 주었다. 드래곤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는 남자에게 우편을 여러 번 보내는 일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었다.
“발송 내용을 보관하고, 상대가 받았는지도 기록해 주세요. 수수료는 내겠습니다.”
“그런 제도는 없는데요.”
“그럼 오늘부터 만들어 보시죠.”
접수원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화가 아니라 은화 두 닢을 탁자 위에 놓자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새로운 등기 서비스라고 하면 되겠군요.”
역시. 세상은 달라도 돈은 행정의 속도를 높였다.
그날 오후, 태오는 리네아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계약 만료까지 닷새. 한숨부터 나올 법한 상황이었지만 태오는 할 일이 많았다.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요구하는 것과 별개로, 집 상태를 제대로 남겨야 했다.
“벽난로 정상. 북쪽 창문 정상. 계단 세 번째 판자는 교체.”
리네아가 수첩에 적었다.
“그건 집주인이 고쳐야 하는 부분이었어요.”
“수리비 청구 안 했습니다. 영수증은 있어요.”
“영수증까지요?”
“상대가 드래곤이잖아요. 말싸움으로 이기기는 어렵죠.”
리네아가 작게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집을 둘러보던 그녀가 침실 문틀에 손가락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 문틀…….”
“왜요?”
“마력 봉인이 약해졌어요.”
“살면서 문제는 없었는데요.”
“혹시 집 안에서 누가 검은 불꽃을 본 적은 없나요?”
태오는 고개를 저었다.
리네아는 문틀 아래 박힌 작은 쇳조각을 살펴봤다. 검은색의 얇은 비늘 모양이었다. 태오는 장식용 경첩이라고 생각했던 물건이었다.
“발카스 님이 직접 남겨 둔 소유권 표식이에요.”
“집주인이 자기 집에 이름표 붙이는 건 이해합니다. 그런데 왜 침실 안쪽이죠?”
“글쎄요.”
그녀는 쇳조각에 손을 대려다 멈췄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어요.”
“왜요?”
“용의 비늘은 주인이 싫어하는 일을 기억하거든요.”
태오는 심장이 조금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돈 문제에 마법까지 끼어들면 골치가 아파졌다. 그는 집을 깨끗하게 쓰려고 노력했지만, 벽 속의 비늘이 무엇을 감시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먼저 기록해 주세요. 저 표식은 제가 설치한 게 아닙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사진 같은 거 만들 수 있습니까?”
“기억 수정으로 장면을 남길 수는 있어요.”
“좋네요. 방마다 부탁합니다.”
리네아는 마력을 담은 수정 조각을 꺼냈다. 방 안의 모습이 작은 빛으로 복제됐다. 태오는 조각 하나마다 날짜와 위치를 써서 봉투에 넣었다.
“태오 씨.”
“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돌려받으면 다 쓸모없는 종이가 되겠죠.”
“못 돌려받으면요?”
“그때는 지금 만든 종이가 제 무기가 되고요.”
리네아는 아무 말 없이 다음 방으로 걸어갔다.
***
그날 저녁, 태오는 집주인에게 보낼 편지를 완성했다. 감정적인 표현은 빼고 사실만 적었다. 계약 기간, 보증금, 반환 기한, 집 상태 확인 요구.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덧붙였다.
[해당 기한 내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파벨시 거주권 등록소에 분쟁 조정을 요청하겠습니다.]
좋다. 지나치게 공격적이지 않으면서도 뜻은 명확하다.
리네아는 봉투를 받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발카스 님은 기분 나쁜 편지를 싫어하세요.”
“그럼 기분 좋은 편지를 보내는 방법이 있습니까?”
“금화를 더 넣는다든가…….”
“제가 받을 사람인데요?”
“그렇죠.”
리네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왜 제가 하필 이 집을 중개했을까요.”
태오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
“그건 제가 묻고 싶습니다.”
편지는 다음 날 오전 우편조합을 통해 발송됐다. 목적지는 검은 산맥의 북쪽 동굴. 배송 담당자는 주소를 보는 순간 배달료를 세 배로 올리려 했다.
“용 둥지잖습니까!”
“계약 전에 말했으면 이해했을 텐데요.”
“거긴 사람이 아니라 용이 살아서요.”
“수취인은 용이고, 보내는 사람은 사람입니다. 위험 부담이 있으면 보험을 붙이세요.”
“그런 보험이 어디 있어요!”
“그럼 왕복 확인만 해 주세요. 직접 전달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접수원은 고민 끝에 전령매를 보냈다. 새에게는 용이 보지 못하는 방향으로 날아가 봉투만 떨어뜨리는 훈련이 되어 있다고 했다. 태오는 그 설명을 듣고 직원들의 안전부터 걱정했다. 전령매라도 산재보험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해가 기울 무렵, 회신이 왔다.
[수취인이 봉투를 먹었습니다. 전달 완료.]
“……먹었다고요?”
태오는 우편조합으로 달려갔다.
접수원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은 가끔 편지를 먹습니다.”
“읽고 먹었습니까, 읽기 전에 먹었습니까?”
“그것까진 새가 확인할 수 없어서요.”
“수령 확인은요?”
접수원이 은빛 작은 깃털을 내밀었다.
“봉투가 용의 마력에 닿으면 남는 흔적입니다. 유효합니다.”
태오는 잠시 깃털을 바라봤다. 편지 내용은 몰라도 도착했다는 증거는 남았다. 세상이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해 있어도 이용할 건 이용해야 했다.
“좋습니다. 이걸로 접수증 발급해 주세요.”
“정말 분쟁 신청하실 겁니까?”
“제 돈이잖아요.”
접수원이 고개를 저었다.
“무모한 사람이시군요.”
“그 말은 자주 듣습니다.”
태오는 밖으로 나오며 접수증을 펼쳤다. 은빛 깃털은 확실하게 빛났다. 보낼 때와 받을 때의 날짜가 찍혀 있었다.
첫 번째 증거 확보.
이제 집주인을 만나야 했다.
***
도시 북문에는 검은 산맥으로 가는 화물 마차가 하루 한 번 섰다. 산기슭 광산에서 내려오는 철광석을 운반하고 돌아갈 때는 식량을 실어 갔다. 태오는 마부에게 여비를 물었다.
“금화 한 닢.”
“왕복이요?”
“편도.”
“비싼데요.”
“돌아오실 수 있으면 그때 흥정하시죠.”
마부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웃지 않았다.
태오는 잠시 생각했다. 성격 급한 사람이라면 곧바로 마차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돈을 받으러 갔다가 목숨까지 잃고 싶지는 않았다. 계약서, 수령 확인, 집 상태 기록을 한데 묶었다. 돌아오지 못하면 누군가 이 자료를 볼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는 리네아를 찾아갔다.
“혹시 제가 사흘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이 서류를 거주권 등록소에 내 주세요.”
리네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태오 씨, 그 정도로 무모한 일은 하지 말아요.”
“그럼 같이 가실래요?”
“…….”
“중개인도 계약 이행을 확인할 책임이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리네아가 한참 고민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모르는 척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겠죠.”
그녀는 사무실 서랍에서 낡은 은색 배지를 꺼내 들었다. 파벨 중개업 길드의 표식이었다.
“대신 약속 하나 해요. 발카스 님이 화내면 절대 소리 지르지 않기.”
“제가 왜 소리를 질러요?”
“보통 사람들은 용 앞에서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둘 중 하나예요.”
“저는 돈을 달라고 할 건데요.”
“그게 세 번째로 위험한 행동이에요.”
리네아는 이마를 짚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의 부동산 시장도 참 만만치 않았다.
***
태오는 산맥으로 가기 전에도 할 일을 하나 더 만들었다. 시장의 오래된 지도 가게에 들른 것이다. 검은 산맥은 파벨과 가까워 보였지만, 실제 길에는 절벽과 검문소가 있었다. 지도를 펼쳐 보니 동굴로 이어지는 길이 세 개였다.
“이 길은 막혔어요.”
지도 상인이 왼쪽 선을 가리켰다.
“지난겨울에 산사태가 났거든요.”
“그럼 가운데 길은요?”
“거긴 괴물이 나옵니다.”
“오른쪽은요?”
“통행료가 비싸요.”
태오는 잠시 세 개의 선을 바라봤다.
“결국 돈을 내라는 거군요.”
“대개 세상일이 그렇죠.”
지도 상인은 웃으며 가장 안전한 길을 표시해 주었다. 태오는 고맙다고 말한 뒤 식량과 물을 샀다. 검은 산맥에서 돈을 받아야 한다는 목표도 중요했지만, 돌아오는 데 필요한 식비까지 없으면 이야기가 더 복잡해질 게 뻔했다.
그는 시장 끝에 있는 목공소를 찾아가 얇은 나무판 두 장을 주문했다. 계약서의 은빛 인장을 종이로 여러 번 베끼는 건 불안했다. 비나 불에 젖어도 복원할 수 있도록 문양을 새겨 두려는 생각이었다.
“이건 집주인이랑 싸우려고 만드는 거요?”
목수가 웃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집주인이 누군데?”
“발카스요.”
목수의 웃음이 뚝 끊겼다.
“그 말은 장난으로도 하지 마시오.”
“장난 아닙니다.”
목수는 한참 고개를 젓다가 가격을 깎아 주었다.
“돌아오면 나머지 돈을 받겠소.”
“왜요?”
“안 돌아오면 장사 접을 테니까.”
태오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소문만으로 동네 사람들 표정이 이렇게 달라지는 집주인이라니. 그렇지만 그가 겁낼 이유도 충분했다. 검은 산맥의 주인은 힘으로 도시를 멸망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계약서의 반환 조항을 다시 읽었다. 일주일 이내 반환. 늦어지면 서면 통지. 통지받지 못하면 분쟁 조정 신청 가능. 계약서에는 의외로 세입자를 보호하는 문구가 많았다. 서류를 만든 사람은 법을 몰라서 쓴 것 같지 않았다.
“리네아 씨, 이 조항은 누가 작성했습니까?”
“예전 중개업 길드가 만든 표준 계약서예요.”
“발카스가 직접 만든 건 아니군요.”
“네. 그분은 계약서 읽는 걸 귀찮아하시거든요.”
태오는 반색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조항을 집주인이 몰랐을 가능성도 있었다. 다만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그분, 인간 모습으로 만날 수 있습니까?”
“가끔요.”
“가능하면 그렇게 만나고 싶네요.”
“왜요?”
“얼굴이 작은 상대랑 이야기하면 목이 덜 아프니까요.”
리네아는 멍하니 그를 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위험한 약속을 앞둔 사람치고는 태오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그날 밤, 그는 여행 짐을 세 번이나 확인했다. 계약서 사본, 물, 말린 고기, 손전등 대신 쓰는 작은 발광석. 그리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편지 한 장.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계약서 원본과 증거를 훼손하지 말 것. 누구의 잘못인지 확인하기 전에 섣불리 소문으로 단정하지 말 것.]
태오는 편지 끝에 서명했다. 서류가 사람을 대신 지켜 줄 수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확인하려 했는지 남길 수는 있었다.
이튿날 새벽 그는 문을 잠갔다. 평소와 같은 작은 집인데, 처음으로 낯설게 보였다. 그곳에서 태오가 잃지 않으려고 애쓴 모든 시간이 잠자고 있었다.
반드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
출발 전날 밤, 태오는 다시 한 번 계약서를 살폈다. 은빛 문구 사이에 작게 적힌 특별 조항이 눈에 들어왔다.
[보증금은 임대인의 재산 보전 목적을 위해 별도 보관한다.]
계약 당시에는 좋은 조항이라 생각했다. 세입자의 돈을 따로 관리한다면 위험이 줄어들 테니까.
그런데 그 아래에 붙어 있는 둥근 인장은 조금 이상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문양인 줄 알았지만 불빛에 비추자 세 겹의 고리가 서로 얽혀 있었다.
마치 쇠사슬 같았다.
“리네아 씨.”
태오가 계약서의 인장을 가리켰다.
“이건 무슨 표시죠?”
리네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문양은…….”
“네.”
“예전 금고 보관 표시일 거예요. 발카스 님이 아주 오래전에 쓰던 방식인데, 요즘은 거의 못 봤어요.”
“보증금을 금고에 따로 넣어 둔다는 뜻입니까?”
“아마요.”
태오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좋은 소식일까? 어딘가에 보관했다면 돈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리네아가 그 문양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왜요?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녀는 계약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발카스 님의 금고는…… 한 번 닫히면 아무나 열 수 없거든요.”
“집주인은 열 수 있겠죠.”
“그렇겠죠.”
“그런데 왜 그렇게 불안한 표정이세요?”
리네아가 아주 작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 금고가 열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백 년 전이니까요.”
태오는 계약서를 천천히 접었다.
이제 보증금 반환 문제에 금고 열쇠까지 추가됐다.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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