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시 공동 분쟁 조정실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은 발카스의 대리인 바렌이었다.
그는 왼쪽에 이벨을, 오른쪽에 옛 주택조합 회계 보조 다렌 베스를 두고 앉았다. 맞은편에는 김태오와 리네아, 미라, 로벤이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바렌은 물 한 잔을 비웠다.
“오늘은 왜 증인이 이렇게 많습니까?”
엘레아 의장이 답했다.
“서로 다른 자료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누구의 주장도 여기서 바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태오는 그 말을 들으며 서류를 정리했다. 그의 가방은 무거웠지만 원래 목적은 여전히 간단했다. 돌려받을 270금화. 그 돈을 기다리는 동안 드래곤과 왕국의 서류가 겹겹이 쌓여 가방이 통통해진 것이었다.
“요즘은 제가 작은 기록소가 된 기분입니다.”
리네아가 속삭였다.
“입장료라도 받으세요.”
“그러면 관리비가 또 청구될 겁니다.”
두 사람이 웃으려는 순간 엘레아가 회의를 시작했다.
***
다렌 베스는 자신이 봤다고 주장하는 두 지급 명단을 설명했다. 그는 실물 원본을 소지하지 않았다. 대신 옛 업무 인수인계 수첩과 당시 서식 표지를 제출했다.
“첫 번째 명단에는 계약 번호와 세입자 이름이 있었고, 보증금 수령 확인 절차가 붙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에는 같은 계정 번호가 있었지만 지급받을 사람의 주소만 적혀 있었습니다.”
“두 명단의 금액이 같았습니까?” 이벨이 물었다.
“저는 금액표까지 볼 권한이 없었어요.”
“그럼 같은 돈을 두 번 지급하려 했다는 결론은 아직 내릴 수 없군요.”
“맞습니다. 하지만 같은 계정에 두 방식의 수취인 표가 있다는 게 이상했습니다.”
바렌은 곧바로 끼어들었다.
“서식 초안과 실제 집행 서류를 혼동하시는군요. 행정 착오일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그래서 원본이 필요합니다.”
바렌은 입술을 다물었다. 태오는 아까의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행정 착오라면 바꾸면 된다. 누군가 돈을 가로채려 했다면 밝혀야 한다. 지금 단계에서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미라는 옛 관리인단의 인계표를 꺼냈다.
“두 종류의 명단이 있었다는 말은 저도 들어 봤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통지 대상자 목록, 하나는 실제 반환 권리자 확인 목록이었을 수 있어요.”
“목록이 다른 이유가 정당할 수도 있다는 거군요.”
“그렇지. 그래서 서류 제목과 작성 목적부터 확인해야 해.”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
문제는 자료 위치였다. 원본 목록이 있는 장소는 중앙 수익권 통지 보관소였다. 담당 기관은 제3자의 개인정보가 포함돼 있으므로 전체 원본을 제출할 수 없지만, 조정실 명의의 제한적 대조 요청은 심사하겠다고 했다.
엘레아는 두 항목을 나눠 적었다.
첫째, 실명 공개 없이 같은 계약번호가 중복 기재된 사례가 있는지.
둘째, 지급 명단과 통지 명단의 작성 목적·승인 상태가 어떻게 다른지.
태오는 그 구분이 좋았다. 목록 전부를 공개해 달라고 외치는 것보다 목적에 필요한 정보를 정확히 요청하는 편이 현실적이었다.
바렌이 말했다.
“그런 대조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렇겠죠.” 태오가 대답했다.
“그동안 당신 보증금 반환이 늦어질 텐데요?”
“이미 늦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조사는 임대인의 지급 의무와 별개죠. 계정이 잠겼어도 발카스 님은 채무자라는 걸 인정하셨습니다.”
엘레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 부분은 기존 회의록에 있습니다. 김태오 씨의 원금 미반환 270금화는 현재 확정된 사실관계이고, 새로운 청구액 126금화는 다투는 중입니다.”
바렌은 서류를 내려다봤다.
태오는 한동안 그렇게 보이는 숫자를 바라봤다. 남은 금액이 아직도 그대로라서 화가 났지만, 적어도 어느새 깎여 있지는 않았다.
***
회의가 끝나려는데 발카스가 들어왔다. 그는 인간형으로 나타났지만 평소보다 옷깃이 흐트러져 있었다. 동굴에서 바로 온 것인지 희미한 유황 냄새가 났다.
“이 일이 언제 끝나느냐?”
엘레아가 정중하게 말했다.
“조정실은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기록을 모으느라 살아 있는 시간을 다 쓰는군.”
태오가 일어섰다.
“그러면 지금 270금화를 주시면 제 기록 수집도 조금 줄어들겠습니다.”
발카스가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또 돈 이야기냐.”
“원래부터 그 이야기였습니다.”
리네아가 책상 아래에서 태오의 손을 잡았다. 화를 누그러뜨리려는 뜻이기도 했고 그에게 용기를 주려는 뜻이기도 했다.
태오는 한 걸음 물러서지 않았다.
“집주인께서 원래 받으셨던 돈을 돌려주셔야 하는데, 왜 제가 누구의 명단이 진짜인지까지 확인하고 있을까요?”
발카스의 얼굴이 굳었다.
“계정이 함부로 집행되면 원금 소유자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니 금고를 함부로 열자는 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원하느냐?”
“당신이 왜 계정 봉인을 걱정하는지 서류로 설명해 주세요. 그리고 별도 자산으로 갚을 수 있는지도 답해 주세요. 금고 속 돈만이 당신 재산은 아닐 테니까요.”
발카스가 어둡게 웃었다.
“나에게 자산 목록을 요구하는군.”
“전부는 아닙니다. 지급 가능 계획이요.”
드래곤은 잠시 생각하더니 바렌을 돌아봤다.
“보유 자산 중 매각 제한이 없는 항목부터 확인해라.”
바렌이 놀라 일어섰다.
“발카스 님, 그 말씀은…….”
“자산을 확인하랬지, 지급을 확약하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태오는 그 차이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금고 밖의 재원을 논의할 가능성이 생겼다.
***
오후에 브라운의 서면 답변이 도착했다. 금고상회는 다렌 코르 및 베스와 접촉한 직원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다만 거래 성립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사전 방문 이유는 계정 47의 잠재적 청산 채권 조사였으며, 직원 개인이 수집한 자료에는 접근할 수 없다고 적었다.
이벨은 답변을 읽고 말했다.
“이제 접촉 자체를 두고 다툴 필요는 줄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자료를 가져갔는지는 아직 모르는 거죠?”
“맞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해졌네요.”
“무엇입니까?”
“브라운 씨가 우리보다 오래전부터 47 계정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요.”
이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커졌지만 그 기간은 아직 확인해야 합니다.”
태오는 다시 수첩을 펼쳤다.
[접촉 사실 인정. 거래 성립 부인. 자료 취득 범위 미확인.]
회의 이후 태오는 조정실 복도에서 미라와 다시 마주쳤다. 그녀는 구두를 고치던 앞치마 대신 단정한 회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오랜만에 그렇게 많은 옛 서류를 봤어요.”
“힘드셨죠?”
“힘들다기보다 부끄러웠지. 우리가 그때 더 단단하게 기록을 남겼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지도 몰라.”
태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미라 씨가 혼자 책임질 일은 아니잖아요.”
“그건 네가 잘 모르는 일이야.”
미라는 짧게 웃었다가 곧 진지해졌다.
“옛 조합이 해산하기 전, 누군가 직원들에게 고지 완료 도장을 먼저 찍으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어. 다 끝나면 실제 통지는 나중에 보내면 된다고 했지.”
“누가 지시했습니까?”
“나는 중간 관리자에게 들었어. 원래 지시자가 누구인지는 몰라.”
“그 지시를 따르셨나요?”
“내가 맡은 부분은 보류했어. 그런데 다른 부서에서도 그렇게 했는지는 몰라.”
태오는 종이를 꺼냈다가 미라의 표정을 보고 멈췄다.
“지금 말씀은 공식 진술로 남기실 수 있나요? 책임이 걱정되시면 이벨과 먼저 상의하시고요.”
“그럴 생각이야. 오래된 일을 묻는 게 누구에게나 좋은 일은 아니지만, 아직 돈을 못 받은 사람이 있잖아.”
미라는 손을 모았다.
“내가 꼭 하나 기억해 줬으면 하는 건, 통지를 보냈다는 기록과 실제로 상대가 받았다는 기록은 달랐다는 거야.”
태오는 그제야 머릿속 여러 조각이 맞닿는 걸 느꼈다. 47-C가 확인하려 한 것도 통지 여부였다. 옛 장부에는 완료 표시가 없었고, 다렌은 수익권자를 먼저 확인해 달라고 신청했다. 발카스는 처분을 멈춰 달라고 요구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연결이 맞다는 증거는 여전히 부족했다.
“그 말씀을 꼭 공식으로 남겨 주세요.”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 창밖에는 가을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태오는 매일 흘러가는 시간을 생각했다. 로벤은 이미 열두 해를 기다렸고, 소피의 아이는 그 사이 자라고 있었다. 기록을 기다린다는 사실도 누군가의 삶에서는 실질적인 비용이었다.
“태오 씨.”
리네아가 다가와 불렀다.
“무슨 생각해요?”
“우리가 수익권자 목록만 붙들고 있다가 정작 돌아가야 할 돈을 잊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그럼 둘 다 챙겨야죠.”
“쉽게 말하시네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돈과 서류는 다른 문제니까.”
태오는 미소 지었다.
“맞아요. 그러니까 발카스 님의 지급 계획도 따로 계속 확인해야겠어요.”
두 사람은 마르셀에게 별도 요청을 남겼다. 조정실에서 수익권 조사 일정과 별개로 발카스의 자산 지급 계획 제출기한을 명확히 적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날짜를 요청하는 것이 곧 지급 약속을 얻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 모른 채 기다리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마르셀은 접수된 신청서를 읽고 말했다.
“검토해 보겠습니다.”
태오가 웃었다.
“그 말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왜요?”
“예전에는 ‘기다리십시오’만 들었거든요. 이젠 적어도 무엇을 검토하는지는 압니다.”
마르셀이 작게 웃었다.
“그건 확실히 나아진 일이지요.”
리네아가 태오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조금 일찍 퇴근하면 안 돼요?”
“집에서 하던 일은 다 끝냈는데요.”
“그럼 한 시간만 제 사람이에요.”
“한 시간은 짧은데.”
“그럼 두 시간?”
“그것도 짧네요.”
리네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오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먼저 걸어 나갔다.
“오늘은 저도 시간을 좀 욕심내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리네아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벨은 그날의 증언을 마무리하며 태오에게 자료 정리 순서를 다시 확인시켰다. 누가 돈을 맡겼는지, 얼마를 받았는지, 얼마나 돌려주었는지, 계정 집행 절차가 왜 멈췄는지를 다른 표로 관리하기로 했다.
“처음엔 모두 같은 문제인 줄 알았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그래서 사건이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표를 분리하면 해결할 수 있는 부분부터 다룰 수 있지요.”
“원금 반환부터요.”
“맞습니다.”
태오는 빈 표 위에 11명이라는 숫자를 적었다. 모두가 똑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임시 지급을 받았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특별한 조건으로 합의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사실은 추정하지 않고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남은 10명의 잔액부터 확인해 볼 수 있겠네요.”
“정확히는 태오 씨를 포함한 11명 각자의 미환급 잔액입니다. 태오 씨만 270금화가 확인됐고, 다른 분들의 반환 내역은 계속 확인해야 합니다.”
“네. 제 돈이 맨 앞에 적혀 있다고 다른 사람 돈도 같을 줄 알았습니다.”
이벨이 미소 지었다.
“이렇게 자꾸 고치다 보면 어느 날 정말 기록관이 될 수도 있겠군요.”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연봉이 얼마인지 먼저 듣기 전엔요.”
***
그날 저녁 태오는 소피가 있는 집으로 갔다. 그녀가 받았던 조기 정산 신청서는 정식 관리사무소에서 발송한 것이 아니라 제휴 상회 영업 직원이 배포한 홍보용 서식이었다는 확인을 받았다. 위임 범위와 실제 지급 조건은 불명확했다.
“그럼 바로 서명 안 하길 잘했네요.”
“네. 다만 합의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금액과 기한, 포기하는 권리 확인하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소피는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결정하진 않았어요. 아이가 크는 만큼 제가 기다릴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두려웠거든요.”
“이해합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제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태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 밖에서 리네아가 그를 기다렸다.
“오늘은 돈 얘기 금지라고 할까요?”
“오늘은 제가 먼저 제안하겠습니다.”
“정말요?”
“강가로 걸어가죠. 따뜻한 빵도 사고요.”
리네아는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계약서 없는 제안을 하는군요.”
태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루가 끝나 가고 있었다. 멀리 검은 산맥 위로 드래곤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비쳤지만, 지금은 두 사람이 걸을 길만 생각하기로 했다.
밤늦게 전달석에 새 통지가 남았다.
[계정 47 지급명단 대조 요청 접수. 단, 별도 처분 보류 요구의 실명 열람 관련 당사자 의견 청취 예정.]
실명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곱 해 전 그 요구를 했던 당사자에게 직접 설명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이었다.
제3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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