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제 태오 씨의 계약을 중개한 사람이기만 한 건 아니에요.”
리네아가 그렇게 말했을 때, 김태오는 한 손에 빵을, 다른 손에 서류를 들고 있었다.
“그럼 뭔데요?”
“맞혀 보세요.”
그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파벨시의 햇살 좋은 아침이었다. 등록소 앞 계단에는 오전 접수를 기다리는 사람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이벨은 아직 오지 않았고 마르셀은 점심 전에 사유부 보관기관에서 답변을 받겠다고 했다.
“공동 조사인?”
“틀렸어요.”
“증인?”
“그것도요.”
“주택 관련 소비자 피해 상담인?”
리네아는 한동안 그를 쳐다봤다.
“당신은 정말 세상의 모든 관계를 직책으로 바꾸고 싶어 하나 봐요.”
태오는 손에 든 빵을 내려다보았다. 입에 빵이 들어가 있었으면 대답할 시간을 벌었을 텐데.
“리네아 씨.”
“네.”
“그럼 제가 묻겠습니다. 우리 둘이 지금 무슨 관계였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웃음을 그쳤다. 눈동자에 반짝이는 빛이 조금 느려졌다.
“아주 가끔은, 당신이 먼저 물어 주길 기다렸어요.”
태오는 손을 내밀었다. 리네아는 이번에는 놀리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그럼 우선 같이 저녁 먹는 사람부터 할까요? 사건 없을 때도요.”
“사건이 없을 때라니, 너무 높은 조건을 거네요.”
“아, 그러네요. 이 동네에서는 불가능할 수도.”
그녀가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떴다.
“수수료는요?”
“그건 협상해야죠.”
“선불이 좋아요.”
태오가 낯선 표정을 짓자 리네아는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귓가에 작은 웃음이 닿을 정도였다.
“오늘 저녁, 도망가지 말기.”
태오는 어이없이 쉬운 조건에 웃었다.
“그건 지킬 수 있습니다.”
“증인도 있어요.”
“누구요?”
“방금 저기서 우릴 보고 기침한 마르셀 등록관.”
마르셀은 정말 계단 위에서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두 사람보다 붉었다.
“두 분. 업무 시간에는 등록소 입구를 막지 마십시오.”
“예.” 태오가 대답했다.
리네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 도시는 로맨스에도 접수번호가 필요하나 봐요.”
***
사유부 보관기관의 답변은 예상보다 빨랐다. 중앙 수익권 통지 보관소는 관련 열람 심사를 시작하겠다고 했고, 처음부터 완전한 원문을 보여 주는 것은 어렵지만 신청인의 미반환 보증금과 직접 관련된 부분을 부분 발췌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태오는 이벨과 함께 갔다. 리네아는 이해충돌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자료 열람 보조인으로 등록됐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일과 권리 조사 문서를 취급하는 일은 따로 관리해야 한다고 이벨은 강조했다.
“연애를 시작했다고 법률 조언도 달라지나요?” 태오가 물었다.
“그런 표현으로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리네아가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이벨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사적 관계가 있더라도 진술은 각자 책임집니다. 그게 다입니다.”
태오는 리네아를 돌아봤다.
“들으셨죠?”
“네. 당신은 정말 분위기 파괴에 소질이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보관소 직원은 사유부의 존재를 확인했다. 하지만 한 묶음 전체가 아니라 기간별로 나뉘어 있었다. 일곱 해 전 여름에 작성된 표제 목록에는 세 가지 사유가 따로 적혀 있었다.
[관리인 승계 자료 미비.]
[수익권자 통지 불완전.]
[동일 계정에 대한 상충 열람·처분 요청 발생.]
“상충 요청이라면 누군가 계정의 돈을 움직이려 했다는 겁니까?”
“그것까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직원이 말했다. “열람과 처분을 한 항목으로 묶어 둔 구서식이라서요.”
“그럼 구체적인 신청서 번호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심사 가능한 범위를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태오는 또 하나의 접수번호를 받았다. 몇 번이나 기다려 본 탓인지 오히려 기분이 차분했다.
***
보관소를 나서려는데 리네아가 과거 길드 장부의 사본을 꺼냈다. 중개업 감독 심사 때문에 그녀가 계속 검토하던 것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날짜가 겹쳐요.”
“어떤 날짜요?”
“일곱 해 전, 길드가 고대종족 자산에 관한 설명 의무를 강화한 시점이요. 다렌 씨가 관리권 등재를 신청한 지 한 달도 안 됐어요.”
“법이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론 연결을 입증할 수 없죠.”
“맞아요. 그래서 전 그때 있었던 징계 사건 목록을 신청했어요. 이름은 가리고 사유만요.”
그녀는 자료를 펼쳤다.
[임대차보증금 수익권의 귀속 불명확 사유 미고지.]
“이게 뭐죠?”
“한 중개인이 집을 매매하면서 보증금 관리권 문제가 있는 줄 알고도 계약 상대방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건이에요. 바로 그때 이런 고지 의무가 추가됐고요.”
“파벨 주택조합과 관련 있나요?”
“소재지는 가림 처리되어 있어요. 지금은 모릅니다.”
태오는 리네아를 바라봤다.
“이거 찾으시느라 얼마나 돌아다녔어요?”
“꽤 많이요.”
“왜 저한테 말 안 했습니까?”
“당신은 또 내가 위험해질까 봐 멈추라고 했을 테니까.”
“그건 사실입니다.”
리네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봤다.
“그런데 저도 이 일의 당사자예요. 제가 소개한 집이고, 제가 제대로 설명 못 한 부분이 있었잖아요.”
태오는 대답을 잠시 멈췄다. 그녀의 선택을 연인이 되고 싶다는 이유로 덮을 수 없었다.
“그럼 우리 규칙을 하나 정합시다.”
“뭔데요?”
“혼자 위험한 장소는 가지 않기. 조사 자체를 막지는 않기. 자료는 숨기지 않기.”
그녀가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나 더요.”
“뭐죠?”
“당신도 혼자 다 짊어지려 하지 않기.”
“그건 조금 어려운데요.”
“그럼 제가 매일 확인할게요.”
그녀는 웃으며 약속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태오는 손가락을 걸었다.
***
저녁 약속은 정말 이루어졌다. 파벨 동문 근처의 작고 따뜻한 식당이었다. 서빙하는 노파가 두 사람을 보고 묻지도 않았는데 창가 자리를 안내했다. 리네아는 메뉴판을 두 장 받아 한 장을 태오에게 건넸다.
“오늘은 돈 얘기 금지.”
“그럼 가격표도 안 봐야 합니까?”
“그건 보세요. 제가 당신 파산하는 건 원치 않아요.”
“저도요.”
리네아는 웃으며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태오는 그 동작을 오래 바라보다가 뒤늦게 메뉴판을 들었다.
“아까 왜 그렇게 봤어요?”
“뭘요?”
“제 얼굴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짓말.”
“정확히는 말을 고르는 중이었습니다.”
“아, 계약 용어에 없는 말을 찾는구나.”
태오가 결국 웃었다. 그는 식탁 위에 손을 올렸다. 리네아의 손끝과 닿았다. 그걸 피하지 않고 조용히 손을 포갰다.
“예뻐서요.”
리네아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평소라면 태오를 몰아붙이는 쪽은 늘 그녀였다.
“그런 말도 할 줄 아네요.”
“이것도 기록하실 겁니까?”
“아뇨.” 그녀가 작게 말했다. “이건 기억할래요.”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밤거리는 한산했다. 리네아가 멈춰 섰다. 태오도 따라 멈췄다. 그녀가 한 걸음 가까워져 그의 코트 앞섶을 잡았다.
“오늘은 가로등 개수 안 물어볼 거죠?”
“참아 보겠습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태오도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했다. 이제는 장난 대신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리네아가 낮게 물었다.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뭘요?”
“앞으로도 제가 계속 당신 옆에 있는 거요.”
“그건 제가 바랐던 일인데요.”
두 사람은 짧게 입을 맞췄다. 서두르지 않은,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될 입맞춤이었다. 리네아가 물러나며 웃었다.
“이건 중개 수수료에 포함되지 않아요.”
“다행이네요. 전세금이 다 돌아와도 감당 못 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녀가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 그 밤에는 아무 전달석도 울리지 않았다.
식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파벨시의 작은 다리를 건넜다. 낮에는 시끄럽던 시장이 조용해지자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또렷했다. 리네아는 난간에 팔꿈치를 얹고 별빛을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요?”
“물론이죠. 보증금 300금화 얘기부터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좋은 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설명하셨죠. 드래곤이란 말은 안 하셨지만.”
리네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 부분은 아직도 미안해요.”
“이젠 그걸로 농담하면 안 되겠네요.”
“농담해도 돼요. 하지만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니까.”
태오는 난간 위 그녀의 손 가까이 손을 올렸다.
“처음엔 리네아 씨가 저한테 집을 판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집은 판 게 아니라 중개했어요.”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따지실 거예요?”
“당신한테 배웠는데요.”
둘은 함께 웃었다. 리네아는 태오의 어깨에 얼굴을 잠깐 기대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가 당신을 만나려고 사건 진행 상황을 먼저 확인하고 있더라고요.”
“저도 비슷합니다.”
“정말요?”
“자료 열람일에 리네아 씨가 못 오면 조금 섭섭해요.”
“그건 업무잖아요.”
“그러니까 이상한 거죠. 업무를 하러 가는데 보고 싶은 사람이 생기니까.”
리네아의 미소가 조금씩 깊어졌다.
“저는 말보다 행동을 더 믿거든요.”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태오는 그녀의 손을 잡고, 똑바로 그녀를 바라봤다.
“앞으로도 같이 저녁 먹고 싶어요. 집을 옮겨도, 이 사건이 끝나도.”
리네아는 눈을 크게 떴다. 다음 순간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건 꽤 진지한 약속이네요.”
“다른 계약보다 이건 쉽게 지키고 싶습니다.”
“그럼 부디 만기 날짜는 적지 마세요.”
“네. 만기 없는 약속으로 하죠.”
그녀가 웃으며 손끝으로 태오의 손등을 쓸었다. 남자는 순간 강물 흐르는 소리도 잊었다.
그때 다리 아래에서 오리 한 마리가 요란하게 울었다. 태오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리네아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드래곤 앞에서는 안 놀라더니 오리한테 놀라요?”
“드래곤은 적어도 말로 예고하고 으르렁거리잖아요.”
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났다.
태오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이세계에서 남길 가장 큰 재산이 금화가 아닐 수도 있다고. 물론 그렇다고 금화 270닢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집에 돌아가기 전 리네아는 식당에서 남은 작은 빵 봉지를 태오에게 건넸다.
“내일 아침 먹어요.”
“리네아 씨는요?”
“저는 길드에 먹을 게 있어요.”
“그럼 하나씩 나눠요.”
태오는 봉지를 열어 반씩 나눴다. 리네아가 웃으며 그의 손에서 빵 한 조각을 받았다.
“이런 것도 같이하는 게 좋아요.”
“빵 먹는 일이요?”
“아니요. 서로 몫을 챙겨 주는 일이요.”
그는 그제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이 관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험을 대신 모두 떠안는 계약이 아니었다.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늦은 시간 돌아오면 차 한 잔을 나눠 마실 수 있는 관계였다.
“내일도 같이 점심 먹을 수 있을까요?”
“사건이 있어도요?”
“있어도요.”
리네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럼 좋아요. 제가 늦으면 먼저 먹지 말고요.”
“그건 좀 어려운 조건인데.”
“왜요?”
“제가 배가 고프면 협상력이 떨어집니다.”
그녀는 웃으면서 빵을 입에 물었다. 태오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웃었다. 짧은 약속이었지만 더는 서류가 필요하지 않았다.
태오는 문득 자신이 예전처럼 집만 얻고 싶어 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누군가와 저녁을 함께 먹을 생각보다 매달 얼마를 아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지금도 그 계산은 중요했다. 다만 이제는 가장 저렴한 집보다 돌아왔을 때 반겨 줄 사람이 있는 집을 생각하게 되었다.
***
다음 날 아침, 사유부 부분 발췌 허가가 나왔다. 태오는 어제의 기쁨을 가슴 한편에 두고 등록소로 갔다.
담당자가 가져온 자료에는 일곱 해 전의 상충 신청서를 가리키는 참조번호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다렌 명의의 관리권 등재 신청.
다른 하나는, 같은 날 접수된 별도의 처분 보류 요구였다.
신청인 이름은 가려져 있었다. 다만 신청 구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자산양수인 겸 해당 계정 채무 관련자.]
태오는 오랫동안 종이를 바라봤다.
집을 산 사람이었다. 계정에 관한 채무를 가진 사람이었다.
발카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이름이 가려져 있었다.
“이걸로 누군지 알 수 있나요?” 리네아가 물었다.
“아직은요.”
그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이제 다음 싸움은 누가 돈을 움직이려고 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움직이지 못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느냐를 확인하는 싸움이 되었다.
제3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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