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 전의 임시 보관인을 찾는다고?”
미라는 구두 굽을 갈던 손을 멈췄다. 그녀의 작업대에서는 가죽 냄새와 기름 냄새가 났다. 벽 한편에는 오래된 청산 관리인단 표식이 작은 장식으로 매달려 있었다.
“정식 관리인인지 확정된 건 아닙니다.” 김태오가 말했다. “다렌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그 사람에게 봉투를 받았다고 해요.”
“봉투?”
“겉면에는 ‘채권자 측 임시 보관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미라가 송곳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채권자 측이라.”
리네아가 물었다.
“아시는 표현인가요?”
“옛 조합이 청산될 때 가장 많이 싸운 단어 중 하나지. 집을 사는 사람과 보증금을 맡긴 사람이 서로 다른 권리를 가졌다는 뜻이니까.”
미라는 오래된 서랍에서 손때 묻은 규정집을 꺼냈다. 페이지 가장자리가 부드러워질 만큼 읽은 책이었다. 그 안에는 계정 47을 둘러싼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업무 구분만 남아 있었다.
[자산 매각 담당. 계정 보존 담당. 수익권 통지 담당.]
“옛 조합은 망하기 직전에 임대주택부터 처분했어. 그런데 집을 넘긴다고 원금 보관계정 관리권까지 자동으로 넘어가지는 않았지.”
“그런데 그 기록이 비어 있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그게 문제야. 비워 뒀다고 누구에게나 권한이 생기는 건 아니거든.”
미라는 잠시 망설였다.
“다렌이 신청서를 냈던 날, 우리는 그를 관리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어. 정확히는 인정할 근거가 부족했지.”
“그럼 왜 신청했을까요?”
“누군가를 막으려 했을 수도 있어.”
“누구를요?”
“모르지. 그때 나는 행정직이었어. 멋진 비밀을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 자료가 빠진 칸에 붉은 표시를 하던 사람이었지.”
태오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멋진 음모보다 빠진 서류를 확인하는 사람이 지금은 더 필요했다.
***
미라의 규정집에는 증표 분류가 따로 실려 있었다. 47-A는 보존 상태에 대한 확인 표식, 47-B는 조회 신청의 근거 표식, 47-C는 집행에 관한 이의·감시 기록에 연결되는 표식으로 설명됐다. 다만 표식을 가졌다고 곧바로 계정을 여는 권한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토른이 추정한 것과 비슷하군요.”
“토른네 집안이 보관소를 설계했으니까.”
“47-C는 누가 갖고 있나요?”
“그 기록은 내가 볼 권한이 없었어.”
“그렇다면 누가 볼 권한이 있었죠?”
“청산 관리인단이 해산할 때 최종 접수서를 보관한 기관.”
미라는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짚었다.
“여기. 중앙 수익권 통지 보관소.”
리네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중앙 운송보관소와 다른 곳이네요.”
“다르지. 물건을 어디로 옮겼는지 기록하는 곳과 돈을 돌려받을 사람에게 통지했는지 기록하는 곳은 달라.”
태오는 한숨을 쉬었다.
“이세계에선 돈이 하나인데 서류는 네 군데 있군요.”
“원래 돈이 하나일수록 사람들이 많이 싸우는 법이야.”
미라가 씁쓸하게 웃었다.
***
중앙 수익권 통지 보관소는 대문부터 묘했다. 커다란 금고 모양의 문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나무였다. 문 앞에는 ‘기록은 재산이 아니라 권리 확인의 시작입니다’라는 표어가 걸려 있었다.
“이곳 사람들도 문구 좋아하네요.” 태오가 말했다.
“당신은 ‘보증금을 돌려주세요’라고 걸고 싶겠죠.”
“나쁘지 않은데요.”
접수원은 두 사람의 신청서를 읽고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부속대장 열람은 권리 당사자거나 적법한 위임을 받은 사람으로 한정됩니다.”
“저는 미환급 임차인이고, 등록소 예비조사 사건번호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련 부분의 범위 제한 열람을 심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임차인의 개인정보는 가려집니다.”
“좋습니다.”
“다만 오늘 바로 볼 수는 없습니다.”
태오는 익숙하게 웃었다.
“이제 놀랍지도 않습니다.”
“왜 웃으시죠?”
“화내면 열람이 빨라지진 않을 테니까요.”
접수원은 조금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담당 부서 이름과 예상 절차를 정확히 적어 주었다. 태오는 그 친절이 고마웠다.
밖으로 나오던 길에 리네아가 말했다.
“분명 처음부터 이런 일을 겪을 줄 알았으면 계약 안 하셨겠죠?”
“당연하죠. 그런데 그 집을 얻지 않았다면 리네아 씨와 이렇게 오래 다닐 일도 없었을 겁니다.”
리네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건 지금 고백이에요?”
“아뇨, 인과관계 분석인데요.”
“조금 전 문장은 고백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어요.”
태오는 당황해서 잘못된 말을 골랐다.
“그럼 계약서에 적어 놓을까요?”
“당신 정말…….”
그녀는 화가 난 척했지만 손을 먼저 잡았다. 태오는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
그날 저녁 다렌을 자처한 남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봉투의 전달 경로를 설명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마르셀과 이벨의 입회가 전제였다.
남자는 시장 뒤편의 좁은 임시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에서 비공식 회담을 열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태오는 거절했다. 대신 등록소 소회의실을 잡았다. 이제 누구도 사적인 방에서 비늘을 받거나 문서를 넘길 수 없도록 하려는 결정이었다.
“날 못 믿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믿을 가능성을 남겨 놓으려고요.”
“참 이상한 소리군.”
“비밀이 많을수록 장소가 분명해야 합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구체적인 장소를 말했다.
“북쪽 교각 아래에 밤마다 켜지는 안내등이 있습니다. 일곱 해 전엔 그 아래에 작은 관리소가 있었죠. 거기서 세 개의 고리 문양을 가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 이름은요?”
“나에게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소. 모두 그를 ‘보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발카스와 어떤 관계라고 했습니까?”
“그 이름을 직접 쓰진 않았습니다. 나는 드래곤의 옛 관리인이라고 추측했을 뿐이지요.”
이벨이 표시를 남겼다.
“그럼 앞선 진술 중 ‘발카스의 옛 관리인’이라는 표현은 직접 확인한 사실이 아니라 추정이었다고 수정하겠습니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동의했다.
“그렇게 해 주시오.”
태오는 그 모습을 보고 숨을 내쉬었다.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은 가끔 누군가의 말을 작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 보관인이 봉투를 직접 줬습니까?”
“아닙니다. 그때는 원본 보관 통지서만 받았습니다. 지금의 봉투는 지난달 어떤 전달자가 넘겼소.”
“전달자는 누구입니까?”
“회색 장갑을 낀 사내. 동네마다 우편물을 전달하던 사람은 아니었어요.”
“이름을 아십니까?”
“계약 명의는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마르셀은 외형 묘사와 날짜, 여관과 접촉한 장소를 기록했다. 정체를 바로 알 수는 없지만 조사할 만한 흔적은 늘었다.
그날 소회의실을 떠나기 전, 마르셀이 전달자의 특징을 한 번 더 확인했다. 회색 장갑을 꼈다는 말은 사람을 가리키기엔 너무 넓은 정보였다.
“그 사람이 타고 온 마차 문양이나 말 색깔은 기억합니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마차를 타지 않았습니다. 걸어왔어요. 대신 봉투를 넣은 가죽 가방에 길쭉한 흰 줄이 있었지요.”
“그 줄은 장식입니까?”
“모릅니다. 가방이 낡아서 안쪽 천이 튀어나온 걸지도요.”
마르셀은 진술을 적었다. 태오는 옆에서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을 따로 표시했다. 목소리, 키, 손의 모양, 전달한 시각 같은 질문은 차차 할 수 있지만 이제 남자가 기억을 꾸며 낼 위험도 있었다.
“억지로 기억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걸로 괜찮습니까?”
“틀린 정보로 찾는 게 더 나쁩니다.”
남자는 잠시 조용해졌다.
“태오 씨, 내가 당신처럼 젊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좋았을 거요.”
“무슨 뜻입니까?”
“일곱 해 전에는 확인되지 않은 말을 너무 많이 믿었소.”
“누구의 말이었죠?”
“내가 금고 관리인이 되면 모두의 돈을 돌려줄 수 있다는 말.”
이벨이 즉시 펜을 들었다.
“그렇게 안내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시 옛 조합 서류를 들고 다니던 중개인이 있었소. 본명을 들었지만 잊었습니다.”
리네아가 고개를 들었다.
“중개인이라면 길드에 기록이 남았을 수 있어요.”
“그는 길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적어도 배지를 달고 있진 않았어요.”
태오는 그 차이를 표시했다. 일곱 해 전의 ‘중개인’과 현재 리네아가 속한 길드의 중개인을 바로 연결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 남자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난 예전에 청산 장부를 통째로 사겠다는 사람을 봤소.”
“누구요?”
“금고상회라는 이름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장부 한 권만 넘기면 내 보증금보다 큰돈을 주겠다고 했지요.”
태오는 심장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브라운의 제안과 비슷했지만, 오래된 사건과 현재의 제안을 같은 거래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언제였습니까?”
“내가 북쪽 교각을 건너기 전 여름이었소.”
이벨이 확인했다.
“금액과 대화 내용은 별도로 상세히 진술해 주십시오.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은 비워 두셔도 됩니다.”
남자는 동의했다.
마르셀이 서류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이제 봉투의 전달 경로뿐 아니라 일곱 해 전 당시 신청의 목적도 확인해야 하겠군요.”
태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래된 미스터리가 거대한 마법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보이는 것은 더 평범하고 그래서 더 위험한 유혹이었다. 누군가 오래 걸려야 받을 돈을 단번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는 것.
바로 태오 자신도 몇 번이나 흔들렸던 약속이었다.
다렌 코르가 돌아간 뒤 마르셀은 태오에게 따로 물었다.
“그분이 불확실한 기억을 고쳐 진술한 점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게 진실인지와 별개로, 정정 내역이 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곱 해 전 일을 다시 묻는 게 조심스럽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마르셀은 옛 등록소의 접수 대장을 펼쳤다. 그는 봉투의 전달자와 과거 관리권 신청인의 관계를 구분할 수 있도록 기록 묶음에 색깔을 달리한 표식을 붙였다. 파란 표식은 과거 신청서와 그 당시의 증빙, 붉은 표식은 최근에 등장한 남자의 진술, 노란 표식은 이름을 모르는 전달자 관련 정보였다.
“이렇게 해 두면 나중에 누가 무엇을 직접 확인했는지 빨리 찾을 수 있겠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맞습니다. 한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의 확인을 대신하는 순간 실수가 생기기 쉬우니까요.”
“저도 복사해서 써도 됩니까?”
“공개 가능한 자료에만 사용하신다면요.”
태오는 메모지 세 장을 꺼냈다. 거기에는 자신도 모르게 빨간 색이 너무 많았다. 미확인 사항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색을 칠하는 행위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만큼 어떤 부분이 비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으니까.
등록소 복도를 나올 때 경비병이 그에게 말했다.
“오늘 그 중년 남자, 겁이 많이 나 보이던데요.”
“저도 그랬습니다.”
“당신은 늘 태연해 보여서 몰랐습니다.”
“이 세계에서 무서워 보이면 드래곤이 더 큰 소리로 으르렁거릴 것 같아서요.”
경비병이 소리 내 웃었다. 태오는 따라서 웃었다. 그가 원한 것은 무서운 일이 없어지는 세상이 아니었다. 무서울 때도 사람들이 말하고 기록하고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세상이었다.
마르셀은 노란 표식에 날짜도 덧붙였다. 태오는 그제야 자료의 시간 순서가 조금씩 보인다고 느꼈다.
***
미라는 저녁 늦게 태오에게 다시 연락했다. 규정집의 맨 마지막에 끼워 넣었던 종이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낡은 목록표였다.
[47 계정 최종 관리권 이관 첨부파일: 1건.]
[첨부파일 보관 책임: 권리 통지 보관소.]
[별도 봉인 내역: 사유부.]
“사유부라면 이유를 적은 장부인가요?”
“아마 그래. 옛 용어라 정확히는 해당 기관에 물어야 해.”
“왜 전에 이걸 못 봤죠?”
“책 뒷장에 붙어 있었어. 내가 그런 실수를 했다는 게 마음에 걸리네.”
태오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발견하셨잖아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미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다렌이 사라진 뒤 누군가 관리권 장부를 빼앗으려 했어. 당시엔 단순한 청산 자료 다툼이라 생각했지.”
“누군지 아십니까?”
“얼굴은 몰라. 하지만 가져가려던 사람이 물건의 값보다 ‘사유부’를 집요하게 찾았다는 건 기억해.”
전화가 끊긴 뒤 태오는 수첩에 새 줄을 만들었다.
[왜 봉인했는가 — 사유부.]
한 장의 장부를 찾으려다 일곱 해 동안 사람이 사라졌다면, 금고보다 먼저 확인할 것은 그 장부를 누가 두려워했는지였다.
제3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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