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산맥에서 날아온 편지는 무겁지 않았다. 정확히는 종이 세 장이었다.
문제는 그 세 장에 적힌 금액이었다.
[임차인 김태오에 대한 특별 시설 관리 청구액: 금화 126닢.]
김태오는 편지를 펼치자마자 계산기를 찾았다. 이세계에 전자 계산기는 없으니 낡은 주판을 꺼냈다.
“저번에는 212닢이었죠?”
“예.” 리네아가 대답했다.
“그중 86하고 56은 철회했어요. 봉인 오염 70은 징수 중단 상태고요.”
“그렇죠.”
“그런데 오늘은 왜 126이죠?”
그녀가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기존 청구와 별개로 ‘안전 대기 관리비’ 40, ‘자료 추적 협조비’ 38, ‘보전 자산의 위험 통지 비용’ 48이래요.”
태오는 주판을 밀어 놓았다.
“저 사람들 주판도 저랑 같은 제품인가요?”
“그건 왜요?”
“숫자 더하는 솜씨가 너무 좋은데.”
리네아는 웃지 못했다. 보증금 일부를 반환한 집주인이 도리어 이런 비용을 청구하면 세입자는 심리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태오도 그랬다. 작은 작업장을 새로 임차하는 계획은 아직 멀리 있었고, 270금화는 묶여 있었다.
그는 청구서에 빨간 글씨로 썼다.
[채무와 비용 청구는 별개. 근거 미확인. 지급 동의 아님.]
“발카스 님이 직접 승인했을까요?” 리네아가 물었다.
“모릅니다. 알아봐야죠.”
태오가 코트를 챙겼다. 가방의 비늘은 잠금함에 두고, 오늘은 계약서 사본과 수첩만 들고 나갔다.
***
발카스의 파벨 자산관리사무소에는 수상할 정도로 편안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태오는 그 의자를 보며 잠깐 생각했다. 채권자가 오래 앉아 기다리게 할수록 체념하기 쉽도록 만든 건 아닐까.
바렌은 서류를 훑었다.
“정식 통지입니다. 서명을 거부하시더라도 송달 효력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받은 사실은 인정합니다. 지급할 의무는 다툽니다.”
“당신은 모든 말을 분리하는군요.”
“지금까지 섞어서 설명하실 때마다 문제가 생겼으니까요.”
바렌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비용은 계정 47 조사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조사에 협조하는 게 왜 세입자 비용입니까?”
“당신의 증표 보유 때문에 위험이 증가했습니다.”
“증표는 집주인이 줬습니다.”
“…….”
태오는 그 공백을 수첩에 적었다.
“상대방 침묵, 9초.”
“그것까지 적지 마시오!”
“안 적겠습니다. 방금 적은 건 지울게요.”
그는 정말 줄을 그었다. 바렌은 더욱 화난 얼굴이 되었다.
“최소한 합리적인 보관 조치에는 동의해야 합니다. 증표를 중립 보관소에 맡기면 위험 관리비의 일부를 유예할 수 있습니다.”
“중립 보관소는 누가 고릅니까?”
“양측 협의죠.”
“그런데 미리 쓰신 서류에는 발카스 자산관리사무소가 지정한다고 적혀 있네요.”
바렌은 서류를 빼앗듯 가져갔다.
“표준 조항입니다.”
“표준이 항상 공정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태오는 입으로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손끝은 차가웠다. 금화 126닢은 대충 넘길 액수가 아니었다. 일곱 해를 사라졌다는 남자의 신원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집주인은 바로 지금 현실적인 비용으로 그를 옥죄었다.
“발카스 님과 직접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산맥에 계십니다.”
“차량비가 또 청구될까 봐 걱정이군요.”
바렌은 이번에도 웃지 않았다.
***
이벨의 사무실에서 청구서 검토가 시작됐다. 자문관은 금액의 많고 적음부터 판단하지 않았다.
“계약서에 비용 전가 조항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발카스가 법적 근거를 적었습니까?”
“고대종족 자산 관리규약 제9항이라는데요.”
“그 규약은 비용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걸 증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위험을 예방하려는지, 왜 채무자가 아닌 임차인이 내는지 물어야겠군요.”
“저는 채권자인데 갑자기 지갑 담당자가 됐네요.”
“그게 분쟁 당사자가 피곤한 이유입니다.”
태오는 청구서에 적힌 별도의 문장을 발견했다.
[본 청구액은 기존 보증금 채무에서 상계될 수 있음.]
“상계한다는 건 돈을 안 주고 여기서 깎겠다는 뜻이죠?”
“그렇게 주장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죠. 하지만 상계 요건이 인정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 잔액을 144로 줄였다고 말하면 안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현재 확인된 미환급 원금은 270입니다.”
이벨은 그 숫자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건 꼭 기억하십시오. 가압이나 보전 조치가 나왔다고 임대인이 적은 비용을 곧바로 인정하는 건 아닙니다.”
태오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금 살 것 같습니다.”
“금화가 들어온 건 아닙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이제 현명하게 불안해질 수 있으니까요.”
이벨이 드물게 웃었다.
***
그날 오후, 세입자 모임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일부는 소송이 길어지는 게 두려웠다. 소피는 아이를 안고 말없이 계산했다. 126금화 같은 청구가 다른 세입자에게까지 적용되면 버틸 자신이 없다고 했다. 헤스는 분통을 터뜨렸다.
“세상에 돈 맡겨 놓은 사람이 도리어 돈을 더 내라니!”
“상대가 주장한 비용일 뿐입니다.” 태오가 말했다. “아직 확정된 게 아니에요.”
로벤은 소피를 바라봤다.
“우리가 너까지 끌고 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구나.”
“맞아요.” 소피가 솔직히 말했다. “다른 사람은 오래 기다릴 수 있을지 몰라도 저는 이번 달 집세가 급해요.”
태오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다른 세입자의 선택을 집단의 명예처럼 강요할 수는 없었다.
“개별 합의를 선택하셔도 괜찮아요. 다만 실제 받는 돈과 포기하는 권리를 정확히 확인하시고 결정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서류를 같이 읽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화내지 않을까요?”
“그건 제가 설득할 문제가 아닙니다. 돈은 각자 인생이니까요.”
리네아는 그 말을 듣고 태오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 가만히 있는 접촉이었다. 그래도 태오는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때 토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드워프는 땀에 젖은 도면을 들고 있었다.
“너희가 받았다는 위험 관리비 청구서 좀 보여 봐라.”
“왜요?”
“시설 관리 실적이라는 항목이 있다더군. 실제로 점검했는지 확인하려고.”
태오가 종이를 건넸다.
토른은 두 줄을 읽고 짧게 코웃음을 쳤다.
“안전 대기 인원을 세 명 배치했다는데? 그날 집에는 나하고 네가 있었어.”
“혹시 밖에서 기다렸을 수도 있죠.”
“그런데 일지에 적힌 점검일은 보관 창고에 불이 난 날이다.”
태오가 얼굴을 들었다.
“그날은 모든 현장 점검이 중단됐습니다.”
“그렇지. 내가 직접 중단 통지를 받았어.”
이벨의 사무실에서 받았던 숨통이 이번에는 분노로 바뀌었다.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려고 사실이 아닌 일을 청구서에 적었다면 그건 단순한 계산 착오보다 무거운 문제였다.
그러나 태오는 먼저 기록을 확인하기로 했다. 날짜 하나가 틀린 문서와 허위 청구를 구분해야 했다.
태오는 토른과 함께 그날의 점검 중단 통지를 찾았다. 기록 보관 창고 화재가 난 날, 모든 시설 방문 예정자는 중앙 경보 때문에 이동을 멈추라는 안내를 받았다. 토른의 공방에도 정식 통지가 남아 있었다.
“이게 원본입니다.”
“날짜를 대조해 봐라.”
청구서에는 오전과 오후에 관리사무소 인원 세 명이 주택 외부 구조를 관찰했다고 적혀 있었다. 긴급 중단 통지는 정오 전에 발송됐고, 화재 발생 시각은 그보다 조금 앞섰다. 시간이 겹친다고 해서 오전 점검까지 모두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태오는 성급한 말을 삼켰다.
“점검 전에 왔다가 중단됐을 수도 있겠군요.”
토른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서 청구서를 부정하려면 점검자의 방문 기록을 봐야 한다.”
“제가 집에 있었으니 아무도 안 왔다고 말하면?”
“네가 집 뒤편을 계속 지켜본 건 아니잖아.”
태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마르셀과 자료 보관 문제를 이야기하느라 출입구를 비운 시간도 있었다.
토른이 공방 뒷벽을 가리켰다. 드워프는 현장마다 기술자가 장비를 사용한 시간을 기록하는 공구 대여장을 운영했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공동 장비를 빌리지 않았고, 외부 업체 등록에도 같은 날짜에 공사 신청이 없었다.
“실제 점검을 했다고 해도 이 자료만으론 입증이나 반박을 끝낼 수 없다.”
“그럼 무엇이 필요하죠?”
“점검 일지, 담당자 이름, 관찰 위치, 사진 같은 기록. 비용이 왜 세입자에게 청구됐는지도.”
태오는 목 뒤를 문질렀다.
“숫자 잘못 적었다는 말로 끝낼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그러면 청구서를 고치면 된다. 끝까지 우기면 그땐 다른 문제고.”
둘은 그날 오후 현장 확인서 사본을 함께 정리했다. 태오는 장인의 손글씨가 의외로 반듯하다는 데 놀랐다.
“왜 그렇게 봐?”
“드워프 글씨는 다 돌에 새기는 모양일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편지를 보낼 때마다 바위 하나씩 나르겠냐?”
태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공방을 나오는 길에 소피가 어린아이를 안고 지나갔다. 아이는 태오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사탕을 하나 꺼내 주려다 부모에게 먼저 물었다.
“괜찮을까요?”
“네. 감사합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사탕을 받았다. 소피는 태오를 보며 낮게 말했다.
“어른들 문제 때문에 아이한테 웃는 걸 잊고 지냈어요.”
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한동안 보증금을 생각하느라 저녁이 어떤 냄새인지조차 잊었다.
“소피 씨, 혹시 관리사무소에서 또 뭐가 오면 바로 서명하지 마세요. 함께 읽어 드리겠습니다.”
“네. 저도 이제 날짜와 금액은 직접 확인하려고요.”
그 말이 작게 뿌듯했다. 태오는 소피가 골목을 돌아 나가는 걸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다음에는 그 아이에게 어떤 맛의 사탕을 좋아하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토른은 태오가 돌아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했다.
“숫자가 커진다고 사람을 겁주기 쉬워지는 건 아니야. 그 숫자가 왜 생겼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지.”
“제 금화 270닢도 그렇겠죠.”
“그건 설명이 이미 끝났잖아. 받았으면 돌려준다.”
태오는 짧게 웃었다. 몇 달이나 걸렸지만,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말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청구서 앞에는 여전히 발카스의 고대 인장이 선명했다. 태오는 종이를 접으면서 생각했다. 드래곤이라고 해서 모든 직원의 계산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직원의 잘못이 곧 드래곤이 일부러 꾸민 일이라는 증거도 아니다. 그래서 각 청구마다 작성자와 승인 경로를 남기기로 했다.
***
다음 날 바렌에게 보낸 답변서는 짧았다. 청구된 126금화의 법적 근거와 인력 배치 기록, 점검 중단일 소명, 상계 주장 근거를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청구도 승인하지 않으며 270금화 잔액은 그대로라는 문장도 넣었다.
저녁에 태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장갑을 낀 큰 남자. 인간형 발카스였다.
“네놈이 내 사무소를 뒤집어 놓았다더군.”
“제가요?”
“바렌이 세 통의 소명서를 작성하고 있다.”
“그분 업무 아닌가요?”
드래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내가 왜 네게 금화 삼십 닢을 줬다고 생각하느냐?”
“받아야 할 금화 삼백 중 일부니까요.”
“그렇게만 생각하는군.”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까?”
발카스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계정의 문이 함부로 열리면,” 그가 말했다. “돈을 받을 사람이 가장 먼저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저한테 증표를 주시고, 나중엔 돌려달라고 하신 겁니까?”
“나는 문을 열라고 준 적 없다.”
“그럼 왜 주셨어요?”
발카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다렌을 만났나?”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만났습니다.”
드래곤은 난로 앞에서 천천히 돌아섰다.
“그에게 봉투가 있었다면 반드시 겉면뿐 아니라 전달 경로를 확인해라.”
“집주인이 채무자에게 수사 조언까지 해 주시네요.”
“고마워하지 마라.”
“감사하는 건 잔액을 받으면 하겠습니다.”
발카스는 긴 숨을 내쉬었다.
“인간. 너는 정말 피곤하다.”
“매달 청구서 보내시는 분이 할 말씀은 아니죠.”
드래곤의 입가가 아주 잠깐 움직였다.
그가 떠난 뒤, 태오는 출입 기록에 발카스의 방문을 적었다. 그리고 다음 한 줄을 붙였다.
[드래곤의 경고: 봉투 전달 경로 확인. 청구액 126금화는 승인되지 않음.]
같은 종이에 쓰였지만 두 사실은 아직 서로 다른 문제였다.
제3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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