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난 창고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파벨시 사람들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비늘이 햇빛을 반사했고, 긴 꼬리가 시계탑 옆을 스쳤다.
발카스였다.
김태오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집주인님이 이렇게 빨리 출동하실 줄은 몰랐는데.”
토른이 그의 목덜미를 붙잡아 뒤로 끌었다.
“농담할 때가 아니야! 연기가 바람을 타고 퍼진다!”
창고 출입문 안쪽에는 관리소 직원 두 명이 갇혀 있었다. 안에서 기침 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출입구의 목제 보강재가 열기에 뒤틀렸고, 잠금쇠가 눌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을 부술 수 있습니까?”
태오가 토른에게 물었다.
“사람부터 물려.”
드워프는 주변을 확인했다. 관리소가 보유한 비상 도끼와 지렛대를 가져오는 동안 리네아가 대피한 사람들에게 물을 나눠 주었다.
“태오 씨, 이쪽으로 와요!”
그녀가 소리쳤다.
“안에 두 명이 있습니다!”
“구조대가 올 거예요. 당신 혼자 들어가면 한 사람 더 구해야 하잖아요!”
그 말은 뼈아프게 정확했다.
그때 발카스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드래곤은 창고 위에서 날개를 펼치더니 낮고 긴 울음소리를 냈다.
바람이 한순간 뒤집혔다.
연기가 시장 쪽으로 퍼지지 않고 강 방향으로 밀렸다. 그 사이 출동한 수로 소방대가 물마법 관을 연결했고, 토른은 구조대와 함께 뒤틀린 문을 벌렸다.
직원 두 명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한 사람은 팔을 데었고 다른 한 사람은 연기를 마셨다. 리네아가 기다리던 구급대에 두 사람을 인계했다.
태오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문 앞에 세워진 바람막이를 붙잡고 사람들이 안전하게 통과할 길만 유지했다.
하늘에서 발카스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내 도시의 지붕에 불을 옮기지 마라!”
태오는 속으로 생각했다.
드래곤은 불을 뿜어도 골치 아프고, 불을 안 뿜어도 목소리가 너무 컸다.
***
불길은 큰 건물로 번지지 않았다. 창고 한쪽 벽과 선반 몇 개가 타고, 일부 서류가 젖었다. 인명 피해는 중상을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처음 집계됐지만, 정확한 상태는 구급대가 확인해야 했다.
발카스는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왔다. 도시 경비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드래곤은 타다 남은 창고를 바라봤다.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바람이 그렇게 불었을 뿐이다.”
태오가 옆에서 말했다.
“그 바람이 드래곤 모양이었는데요.”
발카스가 그를 돌아봤다.
“인간. 네가 여기에 왜 있느냐?”
“공개 자료를 보러 왔습니다.”
“어딜 가도 서류가 따라다니는군.”
“집주인님 덕분입니다.”
발카스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갔다 올라갔다.
“오늘은 그 입을 좀 닫아라.”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한마디 더 했겠지만, 구조된 직원이 들것에 실려 가는 모습을 보자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
화재 현장에 접근 금지선이 설치됐다. 마르셀은 연락을 받고 도착했고, 고대 시설 자산관리부의 세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보관 자료는 전부 손실됐습니까?”
세딘이 물었다.
관리소 책임자는 머리를 저었다.
“원본은 대부분 지하의 방화 보관함에 있었습니다. 다만 일반 점검표와 물품 반입 기록 일부가 탔습니다.”
토른이 잿더미를 바라봤다.
“지하를 억지로 열면 물과 열기가 더 들어갈 수 있어. 구조 안전부터 확인해야 해.”
마르셀은 공식 봉인 보존을 요청했다. 태오도 자신이 앞서 열람한 그림과 접수서류의 사본을 제출했다. 중요한 자료가 전부 타 버린 것처럼 소문이 퍼지는 일을 막으려는 목적이었다.
“불이 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태오가 경비대장에게 물었다.
“조사 중입니다. 창고 안쪽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기름이 원인인지 난로인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누군가 일부러…….”
리네아가 말을 시작했다가 멈췄다.
태오는 그녀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가능성은 적어도, 지금 단정하면 안 되죠.”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세딘이 관리소 직원에게 말했다.
“일곱 해 전 이관 물품 목록은 별도 원본이 있습니다. 소실 여부를 확인하기 전엔 어떠한 재발급도 진행하지 마십시오.”
태오의 귀가 번쩍 뜨였다.
“일곱 해 전 이관 물품 목록이요?”
세딘은 그를 바라봤다.
“공개할 수 있는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태오가 먼저 대답했다. 세딘이 정말 당황한 표정을 짓는 걸 그는 처음 봤다.
***
밤이 늦어 사람들이 흩어진 뒤, 태오는 리네아와 함께 하숙집 앞 벤치에 앉았다.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했다. 헤스가 싸 준 빵을 나눠 먹는데, 태오의 손등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디 다치셨어요?”
“아니요. 그냥 조금 놀랐나 봅니다.”
“불이 무서웠어요?”
“네.”
태오는 숨기지 않았다.
“저는 마법사가 아니라서 불길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었어요. 안에 사람이 있는 걸 듣고도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답답했죠.”
“당신은 경보를 울리게 하고 구조대에 위치를 알려줬잖아요.”
“그것뿐입니다.”
“그것도 필요한 일이었어요.”
리네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만약 뛰어들었다면 저는….”
그녀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태오가 고개를 돌렸다. 리네아의 눈에는 평소의 장난기가 없었다.
“미안합니다. 앞으론 제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할게요.”
“그 약속, 잊지 마세요.”
그녀가 그의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강바람 소리만 들었다.
“리네아 씨.”
“네.”
“아까는 제가 창고로 들어갈까 봐 화나셨죠?”
“네.”
“많이요?”
“아주 많이요.”
“그럼 제가 사과를…….”
“한 번 더 하면 진짜 화낼 거예요.”
태오는 입을 다물었다. 리네아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대신 내일 아침에도 같이 밥 먹어요.”
“계약 기간은 얼마나 됩니까?”
“이건 계약이 아니라 부탁이에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간을 안 정하겠습니다.”
리네아는 대답 대신 손가락 사이를 조금 더 깊게 맞잡았다.
***
***
다음 날 오전 태오는 창고에서 구조된 직원의 상태를 확인하러 임시 진료소를 찾아갔다. 구급대는 두 사람 모두 의식이 돌아왔고, 몸 상태를 지켜보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상세한 치료 내용은 가족과 본인에게만 알릴 수 있다고 했다.
태오는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바라봤다.
“그럼 이건 전달해 주실 수 있습니까?”
“환자분들이 받겠다고 하시면요.”
접수 담당자가 웃었다.
잠시 뒤 한 직원이 태오를 만나겠다고 했다. 오른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어제 문 밖에서 저희가 있다고 외치던 분 맞죠?”
“네. 그때는 많이 놀랐습니다.”
“저도요. 안에서는 밖의 소리가 잘 안 들렸거든요. 누가 문을 두드리라고 외쳤는지만 기억나요.”
태오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오래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제 몇 시쯤 안에 계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정확한 시각은 모르겠습니다. 오후에 점검표를 정리하고 있었어요.”
“창고에서 어떤 냄새가 났는지는요?”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연기 냄새가 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안쪽이 어두웠습니다. 기름 냄새가 먼저 났는지 모르겠어요.”
태오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럼 회복부터 하세요. 화재 원인은 경비대에서 확인하겠죠.”
직원이 그를 불러 세웠다.
“한 가지는 기억합니다. 불이 나기 전 출입 대장을 확인하려고 했는데, 새로 붙인 이름표 한 장이 없어졌다고 동료와 이야기했어요.”
“어떤 이름표였습니까?”
“기억이 분명하진 않습니다. 창고 안에는 늘 물건을 옮기는 사람이 많았으니까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진술이 화재와 관련됐을 수도 있었지만, 단순한 관리 실수일 수도 있었다.
“제가 들었다고 기록해도 괜찮습니까? 경비대에도 전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제가 정확히 기억한다고 쓰지는 말아 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료소를 나온 태오는 마르셀에게 진술 요지를 별도로 전달했다. 유력 용의자를 찾은 듯 떠드는 대신, 조사자가 확인할 수 있는 질문만 적었다.
[창고 이름표 교체 작업 여부. 출입 대장 관리자 및 시각. 진술인의 기억 불확실.]
***
그날 오후 도시 경비대는 화재로 피해를 입은 상인들의 임시 보관소를 설치했다. 태오는 소피의 아이와 함께 마차를 끌고 온 로벤을 만났다.
“오늘은 무슨 서류를 쓰나?”
로벤이 물었다.
“임시 보관 상자에 번호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런 건 경비대가 할 일 아니냐?”
“경비대가 하는데 제가 자원해서 도와드리는 겁니다. 소방대가 쓴 장비를 정리할 사람이 부족하대요.”
로벤이 머리를 긁적였다.
“평소엔 계약서나 보더니 이제 상자까지 세는군.”
“상자를 못 세면 나중에 기록이 맞지 않습니다.”
로벤은 태오 옆에서 조심스럽게 상자를 옮겼다.
“이건 무슨 물건이지?”
“식료품이에요. 젖지 않게 위에 올려 주세요.”
소피는 아이를 업고 따뜻한 물을 나눴다.
화재 현장은 누구의 음모를 증명하는 무대가 아니었다. 장사를 쉬어야 하는 사람, 가족의 안부를 기다리는 사람, 젖은 장부를 펴서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 태오는 그들을 보며 자신이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했다.
돈은 숫자였다. 하지만 그 숫자가 돌아오지 않을 때 사람의 하루가 흔들렸다.
그날 저녁 로벤이 말했다.
“너는 요즘 드래곤을 조금 다르게 보는 것 같아.”
“어떻게요?”
“예전엔 그놈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했잖아.”
태오는 잠시 생각했다.
“저는 처음부터 집주인이 보증금을 안 돌려주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지금도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불을 끄는 데 도왔지.”
“그렇죠. 그건 고마운 일입니다.”
“그럼 좋은 놈인가?”
“아뇨. 사람을 구한 일과 돈을 돌려주지 않은 일은 서로 따로 봐야죠.”
로벤은 혀를 찼다.
“또 구분하는군.”
태오가 웃었다.
“이 일을 겪고 나니 그게 제일 편하더라고요.”
그는 집으로 돌아와 보증금 잔액을 다시 적었다. 금화 270닢.
오늘 구조대에 대한 감사와 자신이 받아야 할 돈은 한 장의 종이에 억지로 묶을 필요가 없었다.
***
집으로 돌아와 앉아서도 태오는 진료소 앞 풍경이 떠올랐다. 현장에 있던 누구도 어제의 소동을 영웅담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다친 사람에게는 내일 다시 일할 수 있는지가 먼저였고, 상인들에게는 불에 젖은 물건을 어디에 말릴지가 먼저였다. 그는 자신도 그런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을 기억했다. 유명해지려고 집주인에게 돈을 요구한 게 아니었다. 평범하게 다시 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
이튿날 공식 화재 조사 1차 보고가 나왔다. 발화 지점은 창고 서쪽 작업대 근처로 좁혀졌으나, 사고인지 방화인지는 불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현장에서 불에 탄 기름천이 발견됐지만 그곳에서 기름천은 평소 운송 물품을 싸는 데도 쓰였다.
소문은 이미 거리를 돌고 있었다. 누군가는 발카스가 서류를 태웠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태오가 금고를 열려다 불을 냈다고 주장했다.
태오는 파벨 소식지 기자에게 짧게 말했다.
“어떤 쪽이든 조사 결과 없이 사람 이름부터 쓰면 안 됩니다. 직원 두 분이 다친 일이 먼저예요.”
기자는 펜을 멈췄다.
“제목을 뭘로 정하라는 겁니까?”
“화재가 났고 구조됐다는 사실을 쓰세요.”
“독자들이 재미없어할 텐데요.”
“저도 재미없습니다. 그래도 그게 실제 있었던 일이잖아요.”
그날 오후 태오는 익명 편지 원본과 지금까지의 열람 사본을 서로 다른 곳에 나눠 보관했다. 하나는 마르셀의 사건 기록에, 하나는 자신의 집에, 하나는 리네아 길드의 적법한 사건 보관철에 들어갔다.
“분산 보관하는군요.”
토른이 말했다.
“한곳이 타 버려도 남도록요.”
“넌 이제 금고 만드는 사람처럼 생각하는구나.”
태오가 웃었다.
“금고 여는 사람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때 전해진 새 공문에는 짧은 안내가 있었다.
[화재로 소실 여부 확인 중이던 7년 전 중앙 이관 목록 원본은 별도 보관실에서 확인됨.]
[관련 문서 목록 중 ‘다렌 발송 의뢰 문서함’에 대응하는 이관 접수번호가 존재함. 내용물 및 실제 인수자는 아직 조사 중.]
태오는 종이를 오래 바라봤다.
불은 큰 피해를 남겼다. 그러나 다렌의 기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몰랐던 접수번호 하나가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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