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시 공동 분쟁 조정실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김태오는 줄의 끝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첫 순서 아닙니까?”
리네아가 물었다.
“맞아요. 그런데 서류 확인 때문에 입장 순서를 기다리래요.”
“인생에서 줄은 왜 항상 길까요?”
“짧은 줄에 선 사람들은 이미 들어가 버려서요.”
리네아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태오는 웃지 않았다. 자기 말이 너무 정확해서 슬펐다.
오늘은 열한 명의 공동 분쟁 예비조사가 공식 중간 심사를 받는 날이었다. 마르셀 등록관은 지금까지 확보한 계약 원본, 일부 지급 확인, 수리비 청구, 옛 계정 자료를 심사 담당자에게 전달했다.
그중 누가 직접 출석할지, 누구의 이름을 가릴지, 어떤 자료가 다른 세입자에게 공개돼도 되는지 모두 구분해야 했다.
소피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함께 왔다. 헤스는 빵집을 잠시 닫았고, 로벤은 마차 배차를 바꿨다. 각자 하루를 비워서 이 자리에 온 것이다.
“오늘 꼭 돈을 받을 수 있을까요?”
소피가 물었다.
태오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돈을 주는 자리가 아니라 기록과 다음 절차를 정하는 자리입니다.”
“그럼 또 기다려야 하네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래도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하게 만들어 보죠.”
소피는 아이의 모자를 고쳐 씌웠다.
태오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드래곤과 말로 싸우는 일은 때로 재미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비가 없어 힘들어하는 모습 앞에서 웃는 건 어려웠다.
세입자들은 오전 내내 출석 준비를 했다. 리네아가 출석 명단을 다시 확인하자 로벤이 갑자기 물었다.
“내 일기장은 몇 쪽부터 보여 주면 되나?”
“일단 증거 목록에 적은 부분만요. 심사관이 원본을 대조하자고 하면 그때 보여 주시면 됩니다.”
“열두 해를 적었는데 열 장만 보겠다니 좀 섭섭하군.”
태오는 웃었다.
“오늘은 경주 대회가 아니니까요. 기록이 길다고 먼저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헤스가 테이블에 빵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내 증표는 어떻게 하지? 31-A 말일세.”
“계정 47과 같은 시설인지 확인되지 않았어요. 관련 자료를 갖고 계시되, 직접 연결된 사실처럼 말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난 분명 내 돈 대신 받았어.”
“그건 충분히 증언할 수 있어요. 받은 상황을 그대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모임에서는 누가 더 억울한지를 설명하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과 그 경험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나누어 말하려 했다.
소피는 아이가 손으로 그린 그림 한 장을 꺼냈다. 작은 집 옆에 붉은 얼굴의 용이 서 있고, 하늘에는 둥근 해가 떠 있었다.
“이걸로도 증거가 될까요?”
태오는 그림을 받아 들었다.
“마음에는 강한 증거가 되겠지만, 보증금 반환액을 정하는 자료는 아닐 것 같아요.”
소피는 조금 멋쩍게 웃었다.
“아이가 아침에 꼭 가져가라고 해서요.”
“그럼 가지고 계세요. 나중에 돈을 받으면 함께 볼 수 있잖아요.”
“그때는 용이 웃는 그림으로 다시 그려 달라고 해야겠어요.”
“저는 금화가 웃는 그림이 더 좋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웃었다.
태오는 작은 봉투에 자기 자료를 정리했다. 조정 회의에서 받은 30금화의 반환 확인서, 미지급 270금화가 적힌 문서, 별도 제기된 수리비 청구, 기술 점검 기록, 계정 47 조사 신청서. 각각 다른 사건처럼 보였던 종이들이 이제 하나의 차례로 놓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출석자들에게 말했다.
“제가 말하다가 사실과 추측을 섞으면 바로 지적해 주세요. 여기서는 제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로벤이 눈을 크게 떴다.
“자네가 먼저 그런 말을 하는군.”
“돈을 받으려면 틀린 부분을 빨리 고쳐야 하니까요.”
리네아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요즘은 태오 씨가 틀리면 기분이 좀 좋아요. 저도 가르칠 일이 생기거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저도 더 어려운 문제를 준비하죠.”
“제발 금고 문제만요.”
“장담은 못 하겠네요.”
둘의 대화에 헤스가 혀를 찼다.
“저 둘은 무슨 말을 해도 계약 이야기야.”
로벤이 웃었다.
“그래도 서로 듣는 걸 보면 아주 나쁜 사이는 아닌 모양이지.”
태오는 서류 봉투를 묶는 데 집중했다. 마침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이 생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서기가 첫 순서를 호명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숨을 고르며 일어났다. 자신의 돈, 자신의 생활, 자신의 약속을 설명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태오는 맨 앞에서 걸어가며 생각했다. 드래곤과 싸우는 영웅 이야기는 듣기 좋을지 몰라도, 정말 어려운 건 열한 사람이 서로 다른 사정을 가진 채 같은 문 앞에 서는 일이었다.
그 문을 여는 데는 47-B보다 더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
심사실의 의장은 중년의 인간 여성이었다. 이름은 엘레아였다.
그녀는 참석자들을 살펴보고 말했다.
“이 자리는 모든 임차인의 보증금 반환을 확정하거나 금고의 봉인을 해제하는 재판이 아닙니다. 확인된 분쟁을 어떤 범위로 조사할지 정하는 행정 심사입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부터 기대치를 정확하게 정하는 사람이었다.
엘레아는 마르셀에게 물었다.
“확인된 원금 총액은?”
“열한 건 합계 1,180금화입니다. 그중 김태오 임차인의 원금은 300금화이고, 30금화의 일부 반환이 확인됐습니다. 다른 변제 내역은 아직 검증 중입니다.”
“그러면 1,180금화를 전부 미반환액이라고 표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 현재 확인 가능한 잔액과 조사 중인 잔액을 구분해 제출했습니다.”
태오는 자기도 모르게 작게 박수를 치려다가 손을 내렸다.
기록이 정확해지는 건 좋았다. 다만 그보다 좋은 건 은행 계좌에 금화가 들어오는 일이었다.
발카스 측 대리인 바렌이 일어섰다.
“저희는 임대인의 금전 반환 책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고 측은 계정 47의 관리권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왕실과 무관한 사적 자산에 접근하려 하고 있습니다.”
엘레아가 물었다.
“금고를 실제로 열려고 시도한 기록이 있습니까?”
“증표를 가지고 지하 시설을 조사했습니다.”
태오는 손을 들었다.
“정식 기술자의 안전 점검이 있었고, 봉인은 열지 않았습니다. 접근을 요청할 권리와 개방할 권리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근거 문서를 제출했습니까?”
“점검 결과서와 토른 장인의 별도 소견이 있습니다.”
엘레아는 서류를 받아 읽었다.
“현재 제출된 기록에는 무단 개방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무단 개방을 전제로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바렌은 입술을 다물었다.
태오는 속으로 작게 환호했다. 오늘 하루만큼은 마르셀과 엘레아를 한 팀으로 묶어 칭찬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 친한 사이도 아니겠지만, 말을 함부로 확정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
다음 쟁점은 발카스 측의 수리비 청구였다.
바렌은 계단 하부 손상 자료를 제출했고, 토른은 이전 상태 기록과 수리 영수증을 제출했다.
“왜 임차인이 수리비를 냈죠?”
엘레아가 태오에게 물었다.
“당장 계단을 쓰기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책임인지 확정되기 전이어서 비용을 우선 지불했습니다. 그게 제가 손상을 만들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임대인에게 청구할 계획입니까?”
“관련 절차를 검토 중입니다. 오늘은 중복 청구 여부부터 확인하고 싶습니다.”
토른이 앞으로 나섰다.
“내 이름으로 발행한 수리 영수증과 임대인 측 손상 견적이 같은 위치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견적서에 적힌 보수 방법은 현장에서 수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견적이 허위라는 겁니까?”
바렌이 물었다.
“그건 나는 모르오. 다른 공법을 계산했을 수도 있지. 다만 지금 집 상태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 설명이 필요하다는 말이오.”
엘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임대인 측은 산정 근거와 실제 점검 일시를 제출하십시오.”
그 말에 소피가 손을 들었다.
“제 집도 비슷한 청구를 받았습니다. 그날은 아무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엘레아가 조용히 답했다.
“관련 자료를 별도로 제출해 주세요. 공통 문서의 사용 여부는 비교하되, 각 주택의 상황을 구분해서 조사하겠습니다.”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
가장 긴 논의는 계정 47의 기록 보존 문제였다.
마르셀은 제57-K호와 부속대장 B-19의 존재를 설명했다. 그러나 원본을 확보하지 못했고, 관리권 승계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바렌은 즉시 반박했다.
“공동 분쟁 조정실에 왕실 문서 보관 명령을 내릴 권한은 없습니다.”
“맞습니다.”
엘레아가 말했다.
바렌은 잠깐 말을 멈췄다. 너무 쉽게 동의받아서 오히려 당황한 모습이었다.
엘레아는 계속했다.
“그러나 해당 문서가 현재 분쟁의 핵심 자료로 지목됐다는 사실을 기록할 권한은 있습니다. 관할 기관에 보존 협조를 요청하고, 당사자들에게 관련 자료를 임의 폐기하거나 변경하지 말라는 통지를 할 수 있습니다. 강제 명령은 별도 절차가 필요합니다.”
태오는 숨을 내쉬었다. 문이 열린 것은 아니지만 문 앞에 '아무나 건드리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이 세워지는 셈이었다.
“그럼 자료가 사라질 가능성을 줄일 수 있겠군요.”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분쟁 중이라는 사실을 통지하는 건 중요합니다.”
엘레아는 발카스 측에 계정 관련 보유 문서의 목록을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부속대장 B-19 원본의 소유자 또는 보관기관을 알고 있다면 답하라는 내용도 포함됐다.
바렌은 당장 답할 수 없다고 했다.
“언제까지 답변할 수 있습니까?”
엘레아가 물었다.
바렌은 발카스와 짧게 의논하겠다고 했다. 발카스는 오늘 직접 출석하지 않았고, 바렌이 답변 권한을 위임받아 왔다.
“열흘을 주십시오.”
“일주일 내 1차 목록을 제출하고,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면 추가 기간을 검토하겠습니다.”
바렌은 이를 받아들였다.
태오는 날짜를 수첩에 적었다. 일주일. 보증금을 돌려받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막연한 '나중에'보다는 나았다.
***
휴정 시간에 헤스가 빵을 나눠 주었다.
“오늘은 그냥 먹게. 돈 얘기하지 말고.”
태오는 빵을 받고 잠시 멈췄다.
“정말 공짜입니까?”
“그래, 공짜.”
“그럼 감사합니다.”
헤스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로벤이 옆에서 말했다.
“자네는 드래곤 앞에서도 돈 이야기밖에 안 하더니 빵 앞에서도 그러는군.”
“제가 돈을 모으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됐나?”
“집주인만 부자가 됐죠.”
세입자들이 웃었다. 소피의 아이가 갑자기 물었다.
“용 아저씨는 왜 우리 돈을 가져갔어요?”
어른들이 잠깐 조용해졌다.
태오는 아이 눈높이에 앉았다.
“우리가 돈을 맡겼는데 약속한 날에 돌려받지 못했어. 왜 그런지 알아보고 있어.”
“그럼 용 아저씨가 나빠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잘못이야.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더 알아봐야 해.”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약속 지키라고 말해 주세요.”
“그래야지.”
태오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말이 지금껏 들은 어떤 법률 조언보다 간단했다.
***
심사는 해가 질 무렵 끝났다.
결정문에는 세 가지가 적혔다.
첫째, 계약 원금과 일부 반환 기록을 구분해 조사한다.
둘째, 수리비 청구의 근거와 공통 양식 사용 여부를 확인한다.
셋째, 계정 47 관련 문서의 보존 협조를 요청하고 부속대장 B-19의 소재를 확인한다.
강제 반환 명령도, 금고 개방 허가도 없었다. 사람들은 아쉬워했지만 태오는 결정문을 오래 바라봤다.
첫 조정 회의에서 그가 얻은 건 금화 30닢이었다. 오늘 얻은 건 법적 효력이 제한된 조사 결정이었다. 두 가지를 단순히 같은 저울에 올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그날 밤 마르셀에게서 별도 연락이 왔다.
“김태오 씨. 흥미로운 자료가 접수됐습니다.”
“돈인가요?”
“아닙니다.”
태오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럼 어떤 자료죠?”
“고대 시설 자산관리부에서 부속대장 B-19의 열람 가능성을 회신했습니다. 원본 확인 절차가 필요하지만, 해당 자료가 완전히 소실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태오는 벌떡 일어났다.
“정말입니까?”
“예. 다만 열람 대상 범위와 제삼자 정보 보호를 검토해야 합니다.”
“언제 가능합니까?”
“연락을 기다려 주십시오.”
전달석의 불빛이 꺼졌다.
태오는 한참 문 앞에 서 있었다.
부속대장 B-19.
어쩌면 그 안에 발카스가 말하는 봉인의 정체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태오는 이번에도 수첩 맨 아래 한 줄을 적었다.
[존재 가능성 회신. 내용은 아직 확인되지 않음.]
그가 가진 가장 좋은 무기는 여전히,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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