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문서 보관소에서 온 봉투는 다른 편지보다 세 배쯤 무거웠다.
김태오는 처음에 문서가 아니라 돌멩이가 들어 있는 줄 알았다. 실제로 봉투 안에는 돌처럼 두꺼운 종이 묶음이 들어 있었다.
“제57-K호 원문 열람 회신이래요.”
리네아가 봉투의 겉면을 읽었다.
“드디어요.”
태오는 천천히 끈을 풀었다. 첫 장에는 열람 가능 범위, 둘째 장에는 수수료 계산, 셋째 장에는 보존 상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정작 필요한 내용은 네 번째 장부터였다.
“왕국에서도 서류가 제일 먼저 나오네요.”
“왕궁이 오래 버틴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요.”
“적을 칼로 쫓기 전에 신청서를 받으니까요?”
“그건 좀 효과적이겠는데요.”
두 사람은 웃었다. 그러나 문서 첫 문단을 읽고는 곧 조용해졌다.
[왕실 구채무 정리령 제57-K호. 과거 공공 보증사업과 연동된 민간 보관계정에 대한 원장 보존 및 임시 지급 중지에 관한 지침.]
태오는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임시 지급 중지.”
리네아가 되풀이했다.
“왕국이 금고를 잠갔다는 경고문과 비슷해요.”
“비슷하지만 이 문서가 계정 47에 직접 적용됐는지부터 봐야죠.”
그들은 페이지를 넘겼다.
문서에는 오래전 왕국이 주택조합과 몇몇 상단의 보증사업을 정리하면서 회계 원장을 보전하고, 분쟁이 있는 계정의 지급을 일시 중지하도록 요청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보관계정이 자동으로 잠긴다는 규정은 없었다.
게다가 제57-K호는 공통 지침이었다. 태오가 찾는 것은 그 지침에 따라 계정 47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개별 문서였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네요.”
태오가 말했다.
리네아가 페이지를 가리켰다.
“아니에요. 적어도 어떤 종류의 문서를 찾아야 하는지는 알았잖아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일을 이렇게 배웠다. 첫 단서가 결론을 주지 않더라도 다음 질문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주면 그만큼 가치가 있었다.
문서 가장자리에는 여러 시대에 덧붙인 해설이 있었다. 왕실 구채무 정리령이 처음 마련됐을 때 왕국은 오래된 전쟁과 재건 사업을 정리하고 있었다. 민간 주택조합에 왕실 보증이 일부 섞이면서 회계 장부가 뒤엉켰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왕실이 주택조합 돈을 빌렸다는 뜻입니까?”
태오가 물었다.
리네아는 해설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정확히는 어떤 보증사업의 손실을 왕실이 일부 부담할 수 있다고 약속한 것 같아요. 이 문서만으로 실제 돈이 오갔는지는 몰라요.”
“왕실이 보증했다는 말만 듣고 돈을 맡겼을 사람도 있었겠네요.”
“그럴 가능성이 있죠. 하지만 태오 씨의 계약은 훨씬 나중에 작성됐으니까 직접 같은 약속에 포함되는지도 확인해야 해요.”
태오는 끄덕였다. 이세계의 역사를 배우는 일은 대체로 전쟁과 영웅 이야기로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사람들의 삶에 남은 흔적은 전쟁이 끝난 뒤의 빚과 계약서에 있었다.
“우리 동네도 옛날에 전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파벨시 동문 쪽에요?”
“네. 사람들이 오래된 성벽을 보면서 왕국을 지킨 전사들을 이야기하더군요.”
리네아는 창밖의 지붕들을 가리켰다.
“그 전사들이 돌아와 살 집을 마련하는 것도 전쟁만큼 어려운 일이었을 거예요.”
태오는 생각에 잠겼다.
“영웅들에게 집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중에 집주인이 드래곤이 됐다면 곤란하겠군요.”
“어쩌면 그런 약속들이 수백 년 동안 다른 문서로 바뀌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중요한 문서는 왜 꼭 없어집니까?”
“사람들은 돈을 쓴 사실보다 돈을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을 더 쉽게 잊으니까요.”
태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농담으로 흘려보낼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제57-K호에 적힌 용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원장 보존'은 장부를 없애지 말라는 뜻이다. '임시 지급 중지'는 지급을 막는 절차가 될 수 있다. '개별 적용'은 특정 계정에 실제로 어떤 명령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단 제57-K호가 있다고 계정 47이 자동으로 잠기는 것은 아니군요.”
“네. 그게 첫 번째 결론이에요.”
“두 번째는요?”
“계정 47이 그런 종류의 사업과 연결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세 번째는 그 연관성을 보여 줄 문서를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리네아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가 한 팀이 되더니 공부도 잘되네요.”
“원래는 중개사가 고객에게 설명하는 거 아닙니까?”
“그럼 오늘 강의료를 받을까요?”
“빵값도 아직 못 갚았는데요.”
“알겠어요. 일단 외상으로 해 둘게요.”
태오는 속으로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의 삶에는 왜 이렇게 채권자가 많아지는 걸까. 집주인에게 받을 돈은 안 들어오는데 사람들에게 갚을 밥값은 계속 늘었다.
그는 문서 오른쪽 아래에 찍힌 날짜를 보았다. 공식 원장 보존 명령은 발카스가 집을 인수하기보다 앞선 시기였다. 즉 그가 이 집의 소유자가 되기 전부터 보관금 기록을 따로 관리해야 한다는 사정이 있었던 셈이다.
“이 부분은 중요하겠어요.”
“어떤 부분이요?”
“발카스가 만든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발카스가 인수할 때 어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은 있죠.”
리네아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알았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때 작성된 매입 계약이나 인수 실사 기록을 보면 확인할 수도 있을 거예요.”
태오는 수첩에 새 질문을 적었다.
[발카스의 주택 인수 당시 보관계정 및 미환급 채무 고지 여부.]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더 떠올랐다. '왕국이 잠갔다'는 익명 경고를 보낸 사람이 원장 보존과 지급 중지를 일부러 혼동시키고 있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경고문은 거짓말과 사실의 중간쯤에 놓인 셈이었다. 사실을 조금 섞으면 거짓도 그럴듯해진다. 태오는 그런 식의 설명을 예전에 장터에서 여러 번 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찾아야 할 건 금고 열쇠보다 말의 뜻일지도 모르겠어요.”
리네아가 그를 보았다.
“무슨 뜻이요?”
“누군가 '봉인'이라고 말할 때 정말 마법 자물쇠를 뜻하는지, 법적인 지급 제한을 뜻하는지, 아니면 관리자 승인이 없다는 뜻인지요.”
리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셋을 따로 확인하죠.”
태오는 종이에 세 개의 네모를 그렸다. 마법적 봉인, 법적 지급 제한, 관리권 공백. 처음에는 같은 말처럼 들리던 것들이 이제 서로 다른 줄에 놓였다.
그제야 사건을 조금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
마르셀은 왕실 회신을 확인한 뒤 별도 목록을 꺼냈다.
“제57-K호와 관련된 개별 명령서는 왕실과 민간 보관관리청에 나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확인된 것은 공통 지침의 존재뿐입니다.”
“그럼 계정 47이 실제로 지급 정지됐는지 알 방법이 있습니까?”
“당시 발송 기록과 수령 기록을 대조해야 합니다. 문제는 수령기관인 파벨 주택조합이 청산됐다는 점입니다.”
태오는 머리를 감쌌다.
“받은 기관이 없어졌으면 누가 기록을 갖고 있죠?”
“청산 관리인에게 넘어갔거나, 적법한 승계자가 보관할 수 있습니다. 승계가 불완전했다면 어느 쪽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돈이 묶인 건지, 서류가 없어진 건지부터 모른다는 거군요.”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마르셀은 태오가 가져온 로벤의 일기장 사본도 보았다.
“다렌이 인계 입회자로 적혔군요. 하지만 비공식 메모입니다.”
“그가 직접 문서를 전달했다는 로벤 씨의 증언은 있습니다.”
“그 사실은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다렌이 관리권자였다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태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마르셀의 일은 사람을 절망하게 만드는 것과 희망을 너무 빨리 품지 않게 만드는 것 사이의 좁은 길을 걷는 일이었다.
“그럼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하죠?”
“파벨 옛 청산 사무국입니다. 현재는 재무 보관실의 일부로 편입됐습니다.”
“그렇게 찾으면 처음부터 알려 주시지.”
“처음에는 그곳에서 어떤 자료를 찾아야 할지 몰랐으니까요.”
태오는 더 묻지 않았다. 정답은 늘 사람이 필요한 만큼 늦게 도착했다.
***
재무 보관실은 시장 뒤편의 작은 회색 건물이었다. 문 위에는 구겨진 문패가 걸려 있었다.
[민간 보관계정 관련 이관자료.]
서기는 태오의 신청서를 받고 오래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번호표와 낡은 장부가 뒤섞여 있었다.
“여기서는 원본을 만질 수 없어요. 제가 넘겨 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표시 없는 종이는 복사할 수 없습니다.”
“왜요?”
“기록인지 낙서인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할 만큼 상식적인 규정이었다.
그들은 오전 내내 목록을 살폈다. 계정 41부터 46까지는 보관 기관과 관리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47번 항목에는 수령기관 이름만 남아 있었다.
[파벨 주택조합 공동 보관계정 47.]
[관리권 이전 참조: 부속대장 B-19.]
“B-19는 어디 있습니까?”
서기가 목록을 확인했다.
“현재 미열람 상태입니다.”
“어디에 있죠?”
“다른 기관이 보관 중인 걸로 적혀 있습니다.”
“어느 기관이요?”
서기는 한참 장부를 넘겼다.
“고대 시설 자산관리부.”
태오의 머릿속에서 어젯밤에 읽은 점검 의견서가 떠올랐다. 발카스 측 기술자 켈이 현장 반응을 통보하도록 권고했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그 부서가 지금도 존재합니까?”
“저는 모릅니다. 이관 표시가 수십 년 전 것이거든요.”
또 '모릅니다'였다. 태오는 적어도 공무원에게는 가장 믿을 만한 답이 '모른다'일 때가 있다는 사실을 배워 가는 중이었다.
***
점심에 리네아가 작은 식당으로 태오를 끌고 갔다. 그는 계산부터 하려 했지만 그녀가 먼저 동전을 내밀었다.
“오늘도 제가 살게요.”
“이러면 나중에 빚이 커집니다.”
“원금과 이자를 꼼꼼하게 적으세요.”
“이자율은 얼마입니까?”
리네아는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제가 정할 수 있나요?”
“그럼 먼저 계약 조건을 알아야죠.”
“좋아요. 나중에 저랑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니기.”
태오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건 지금도 하고 있는데요.”
“그때는 서류 없이요.”
태오는 문득 자신이 마지막으로 서류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낸 날이 언제였는지 떠올려 보았다. 이세계에 오기 전에도 별로 없었다.
“그건 꽤 비싼 이자인데요.”
“싫어요?”
“아뇨. 너무 비싸게 느껴져서요.”
리네아는 웃더니 그의 그릇에 고기 한 조각을 더 얹어 주었다.
“그럼 계약은 나중에 해요.”
태오는 입안에 고기를 넣었다. 이상하게도 요즘 가장 어려운 계약은 임대차가 아니었다.
***
오후에는 뜻밖의 방문자가 있었다. 재무 보관실 서기가 태오를 출입문으로 불렀다.
“이걸 보세요. 제57-K호 적용 현황의 오래된 색인 사본입니다.”
그는 낡은 용지를 펼쳤다. 계정 번호 옆에 여러 색의 점이 찍혀 있었다.
“검은 점은 문서 보존, 붉은 점은 지급 보류, 푸른 점은 이관 완료를 뜻한다고 옛 설명서에 쓰여 있어요.”
“47번은요?”
“검은 점 하나만 있습니다.”
태오는 종이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럼 지급 보류 명령이 없었다는 뜻입니까?”
“그렇게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건 목록이고, 원본이 빠졌거나 나중에 수정됐을 수 있으니까요. 다만 이 색인에는 지급 보류 표시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리네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발카스 님이 말한 봉인은 무슨 뜻일까요?”
태오는 천천히 대답했다.
“돈을 지급할 수 없는 이유가 왕실 명령인지, 관리권이 정리되지 않아 시스템상 막힌 건지, 다른 계약 때문인지 아직 구분할 수 없겠죠.”
“하지만 확인할 대상은 줄었네요.”
“네. 오히려 질문이 더 정확해졌습니다.”
태오는 구문서 원본을 다시 살폈다. 제57-K호는 왕국이 손댈 수 있는 절차를 설명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실제로 손댔다는 증거까지 주지는 않았다.
그때 마지막 페이지 하단에서 이상한 표기를 발견했다.
[계정 47 별도 봉인 상태 확인은 부속대장 B-19를 우선한다.]
B-19.
관리권 이전 참조에도 적혀 있던 번호였다.
태오는 마르셀에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대장에 관리권 이전과 봉인 상태가 함께 적혀 있다면, 지금까지 따로 보였던 두 문제를 같은 문서로 조사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문서를 가진 곳이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발카스 측 기술자들은 그 문서의 보관 기관으로 추정되는 곳에 태오의 증표 보유 사실을 알리려 하고 있었다.
집주인이 보낸 점검팀은 단순히 계단만 살피고 돌아간 것이 아닐 수 있었다.
태오는 그 의심을 수첩에 쓰기 전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추정. 아직 증거 부족.]
하나의 추측이 사실처럼 굳어지는 순간, 그가 지키려던 기록도 누군가의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제1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