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관측소의 야간 안전 중단 의견서는 산악보전반의 보통 사고기록과 다른 장부에 실려 있었다. 김태오는 그 사실을 듣고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이제는 서류를 찾을 때 가장 먼저 목록을 분류한 사람의 목적부터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안전 중단 의견이라면 장비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는 뜻이겠네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딘이 말했다. “하지만 내용이 뭔지 보기도 전에 송신 중단 명령이라고 단정해선 안 되겠죠.”
왕실 위탁실은 제한 열람용 사본을 준비했다. 문서에는 오래된 관측소의 시간표가 함께 딸려 있었다. 등불 점화, 바람 측정, 당직자 교체, 발송대 반응, 연락소 대조까지 한 칸씩 다른 사람의 필체가 남아 있었다.
태오는 오래된 모래시계 그림을 보고 멈췄다.
“저 시계는 뭡니까?”
“자정 무렵 강풍이 불면 관측소의 수정 시계가 멈추는 일이 있었대요.”
나엘이 보관된 설비 설명서를 펼쳤다. 관측소의 야간 경보 시계는 바람의 진동으로 수정추가 움직여 눈금을 기록했는데, 오래된 장치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온이 특정 온도 아래로 떨어지거나 송신석의 결계가 어긋나면 수신 표시가 유지돼도 시계는 멈출 수 있었다.
“그러면 같은 시각에 적힌 수신과 송신 기록이 실제로 같은 순간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맞아요. 당시 당직자도 시계 오류 가능성을 메모했습니다.”
디아나가 말했다.
“이걸 근거로 어떤 기록을 거짓이라고 몰아가는 건 섣부릅니다. 시각 보정표가 필요해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하나의 답보다 하나의 정확한 질문이 생겼다.
***
토른은 오래된 수정 시계의 구조도를 보며 머리를 긁었다.
“이런 장치를 산꼭대기에 놓고 사람이 정확한 시간을 적길 바란다고?”
“왕실이 큰돈을 들여 만든 거라는데요.”
“큰돈을 쓰면 나쁜 설계도 비싸게 만들 수 있지.”
태오는 웃었다. 토른은 그 말 뒤에 설명을 이어 갔다. 시계가 멈출 때 통지 관련 장부에는 보정 전 시각, 대체 시각, 당직자의 육안 확인이 따로 남아야 했다. 당시 규정대로라면 새벽 교대자는 이전 당직자의 메모까지 인수해야 했다.
“그럼 확인란이 비었다고 누가 근무를 빼먹은 건 아닐 수도 있군요.”
“그럴 수 있다. 보정표에 적어 놨을 수도 있고, 정전이었던 것처럼 마법 공급이 끊겼을 수도 있다.”
“특정 날에 그랬는지는 아직 확인해야겠죠.”
“그래. 오늘은 기술 설명만 할 수 있어.”
토른의 대답은 언제나 벽처럼 단단했다. 태오는 그런 사람과 함께 조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정오에 헤스가 기록방을 찾아왔다. 그는 작은 종이봉투와 빵 한 덩어리를 놓았다. 봉투에는 발카스에게 지난 165화에 받은 10금화 중 일부로 가게 굴뚝 점검을 예약했다는 영수증이 있었다.
“이 돈을 보증금 반환으로 받았다는 건 분명히 적어 뒀소.”
“그런데 점검비로 쓰셨군요.”
“내 돈이 들어왔으니 어디에 쓸지는 내가 정해야지.”
“맞습니다.”
헤스가 낡은 손을 펼쳤다.
“발카스가 또 돈을 줬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 뒤로 받은 건 없소. 사람들이 마음대로 다 돌려받았다고 말하는 게 싫어서.”
태오는 헤스의 계약별 장부를 꺼내지 않고 그 말을 들었다.
“기존 10금화는 실제 수령. 이후 추가 지급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기록하겠습니다. 남은 금액은 계약 원본과 대조해야 하고요.”
“그렇게 해 줘.”
헤스는 잠시 뒤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빵 굽는 일을 오래 해서 그런지,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걸 보면 사람도 기다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빵집 문 닫고 기다리라는 말은 못 받아들이겠어.”
태오는 웃었다.
“그러니 가게는 계속 열어 두셔야죠.”
“그럴 거야. 오늘 점검 끝나면 다시 빵을 구울 거고.”
헤스는 고집스럽고 단단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태오는 그가 쥔 빵칼의 손잡이에서 삶이 서류보다 먼저 움직인다는 걸 보았다.
***
오후에는 디아나가 시각 보정표 한 장을 찾아냈다. 그 종이는 관측소 자료 묶음이 아니라 왕실 산악 설비 수리 장부에 붙어 있었다. 기술 담당자의 참고용이라 개인 이름이 거의 없었다.
“여기 보세요.”
기준 시계가 멈춘 구간과 연락소의 지상시계가 기록한 구간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특정 계정의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태오는 시각 보정이 된 날과 47-C 관련 날짜가 일부 겹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그날 기록들이 전부 틀렸다는 겁니까?”
“전부는 아니에요. 일부 시각을 다시 대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날 두 차례 송신됐다고 적힌 게 사실은 한 번일 수도 있습니까?”
“가능성은 있습니다. 반대로 한 번으로 합쳐 적힌 게 여러 절차였을 수도 있죠. 원본 시계 눈금과 당직표를 같이 봐야 합니다.”
태오는 탁자에 손을 올렸다. 오래된 시계를 고치려는 게 아니라, 그 시계를 기준으로 완료 처리한 문서가 있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
저녁에는 리네아와 작은 집의 임대인과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이 마음에 두고 있는 서재 있는 집이었다. 임대인은 공동 임차계약과 보증금 출자액을 구분해 적는 수정안에 동의했다. 다만 지붕의 낡은 기와를 수리한 뒤 입주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수리 일정을 먼저 적어 두겠습니다.” 리네아가 말했다.
“그럼 계약은 오늘 하는 겁니까?” 집주인이 물었다.
태오가 리네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답했다.
“수리 범위와 비용을 확인하고 계약하겠습니다. 오늘은 조건 합의안까지만요.”
집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지 않아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며 태오가 물었다.
“좀 아쉬워요?”
“조금요. 그래도 우리가 살 집이니까 제대로 알고 들어가야죠.”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과 함께라면 저는 어느 집에서든 좋을 것 같아요.”
리네아는 그를 쳐다봤다.
“그런 말 하면서도 창고 옆방은 싫다고 할 거잖아요.”
“그건 인정합니다.”
“하하. 좋아요. 솔직해서.”
***
왕실 기술 보관실에는 작은 수정 시계의 실물 모형이 있었다. 토른이 장갑을 끼고 그 앞에 섰고, 태오는 사용 허가가 난 교육용 모형에만 손을 댔다. 원본을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수백 년의 기록을 고치기는커녕 손상시킬 수도 있었다.
토른이 한쪽 회전축을 눌렀다. 수정추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바람을 흉내 낸 장치에서 진동이 나오자 멈췄다. 그러나 옆의 표시등은 한동안 그대로 빛났다.
“봐라. 시계는 멈췄는데 수신 표식은 남아 있지.”
“그럼 누군가 기록지를 보면 신호가 그 시각 내내 들어왔다고 착각하겠군요.”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숙련된 당직자라면 시계 상태도 함께 적었을 거야.”
토른은 시계의 작은 보정판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고산지대의 온도와 수정추 상태에 따라 눈금을 바로잡는 표가 있었다.
“당시 당직자가 이걸 알았을까요?”
“일반 규정에는 있었어. 실제 그 사람이 교육받았는지, 그날 적용했는지는 모른다.”
태오는 그 대답을 그대로 적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증거가 비면 누군가 고의로 숨겼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이제는 규정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실제 지켜졌다는 사실도 다르다는 걸 안다.
그때 보관실 직원이 별도 카드 한 장을 가져왔다. 그 카드에는 제0호 관측소의 기록 담당자가 당직을 바꾸는 절차가 적혀 있었다. 앞 근무자가 시계를 보정하지 못했을 경우 다음 근무자가 보정 전 시각을 먼저 표시하고, 확인되면 다시 기록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규칙이 있으면 오류는 없었겠네요.” 태오가 말했다가 곧 머쓱하게 웃었다. “아니, 오류를 줄일 수 있었겠네요.”
직원도 웃었다.
“제도가 있다고 실수가 사라지진 않으니까요.”
***
밖으로 나왔을 때 이안이 태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역 일을 함께 하던 옛 동료였다. 그는 시장에서 왕실 기록국이 용의 금고를 연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물었다.
“드디어 돈이 쏟아진다더라. 사실이냐?”
“아닙니다. 지금은 옛 관측소 통지 기록을 조사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왜 다들 금고 이야기를 하냐?”
“같은 숫자 47이 자꾸 등장해서요. 그 숫자만으로 똑같은 물건이나 권한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이안은 실망한 얼굴이었다. 태오는 그에게 간단한 그림을 보여 주었다. 47-B는 조회 요청을 위한 표식이고, 47-C는 공익감시와 통지 관련 기능표식이며, C-47-예비는 보관함의 분류명이다. 옛 장부의 E-47/4는 환전소의 업무 번호였다.
“그러니까 숫자는 비슷한데 다 다른 거라고?”
“네. 같은 거리 이름이라고 모든 집의 주인이 같진 않듯이요.”
이안이 피식 웃었다.
“한 번에 이해됐다.”
그는 발카스 이야기를 더 묻고 싶어 했지만 태오는 다른 세입자들의 계약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는 이제 무슨 일로 먹고사나?”
“기록방을 운영합니다. 장부와 계약 자료를 정리하는 일이죠.”
“옛날에 자네가 제일 싫어하던 일이잖아. 하역장에서도 인수증을 누가 쓰냐고 투덜댔으면서.”
“그러게요. 인생이 참 묘합니다.”
이안은 태오의 등을 툭 쳤다.
“그래도 손이 튼튼할 때 가끔 짐 나르러 와라.”
“그건 업무 계약서를 쓰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하, 정말 사람이 변했군.”
***
밤에는 태오가 오래된 자기 수첩 두 권을 나란히 놓았다. 첫 권에는 온통 분노가 가득했다. '발카스가 또 거짓말을 한다', '누군가 돈을 숨긴 게 분명하다' 같은 문장도 있었다. 그는 그때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돈을 돌려받지 못해 집을 잃을까 봐 두려웠던 마음은 진짜였으니까.
다만 지금의 자신은 그 문장들 옆에 작게 메모를 붙일 수 있었다.
[그때는 의심. 이후 증거 대조 필요.]
그는 옛 감정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옛 감정이 사실로 둔갑하지 않게 했다.
리네아가 수첩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늘 화가 나 있었어요.”
“그랬죠. 당신한테도 심하게 말했고요.”
“그래도 잘못한 걸 고치려고 했잖아요.”
“당신도요.”
두 사람은 잠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잘못 없는 연애보다 잘못했을 때 사과할 수 있는 연애가 더 오래갈지도 몰랐다.
리네아는 손을 내밀었다.
“내일은 시계 말고 집에 놓을 탁자를 볼까요?”
“좋습니다.”
“시간 정확한 사람을 고르려는 건 아니죠?”
태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탁자는 시간을 모르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토른은 오래된 시계의 오차를 설명한 뒤 고장 원인을 한 가지로 단정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추위, 결계의 약화, 부품 마모 가운데 무엇이 실제 문제였는지는 수리보고서가 있어야 알 수 있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술적 가능성과 확인된 사고 원인을 서로 다른 칸에 적었다. 물건의 이상을 찾는 일에도 누군가를 함부로 탓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필요했다. 리네아는 시간이 멈춘 시계 이야기보다 그 시계를 보던 태오의 표정이 더 궁금했다. 그는 오류의 원인을 알아내면 누군가의 억울한 기록이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말했다. '그래도 오늘 저녁만큼은 우리 시간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태오는 웃으며 접어 둔 수첩을 서랍에 넣었다.
***
밤이 되자 발카스가 태오에게 전달문을 보내 왔다.
[옛 자산관리실의 산악 연락 담당 근무기록을 확인했다. 해당 시기의 협조 연락자는 두 명이었다. 둘 다 관측소 당직자는 아니었다.]
태오는 그 기록을 보존 목록과 대조하겠다고 답했다. 연락 담당자가 두 명이었다면 후대에 직책 하나를 사람 하나로 오해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누구의 실수를 확정할 순 없었다.
이어 디아나가 한 줄을 더 보냈다.
[47-C 관련 송수신 시각의 일부는 관측소 시계 오류 영향 범위에 들어갈 수 있음. 제로호 야간 안전 중단 의견서의 별지 원본 확인 권고.]
태오는 처음부터 다시 표를 그렸다. 발송시각, 수신석 반응시각, 당직 교대시각, 지상 연락소 도착시각. 이름과 돈을 적기 전에 필요한 것은 시간의 순서였다.
그런데 고쳐 쓴 순서에서 작은 빈칸 하나가 도드라졌다.
[수신석 반응 이후, 재전달 유보 사유 작성 이전: 확인자 공란.]
누가 그 사이에 무엇을 했는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은 지난 일곱 해 동안 사람의 수령으로 둔갑한 기록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는 구간이었다.
태오는 촛불을 끄며 중얼거렸다.
“멈춘 시계가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지.”
제17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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