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집은 강변에 있었다. 햇빛이 잘 들었고 창문은 넓었다. 집주인은 친절했으며, 가장 먼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보증금은 절대로 떼먹지 않습니다.”
김태오는 문턱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리네아가 웃음을 참으며 그의 팔을 잡았다.
“그 말이 처음부터 나오면 긴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장님.”
집주인은 당황했다.
“아니, 저는 좋은 뜻으로…”
“알아요. 그저 계약서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태오가 미소 지었다. 그의 원금 300금화는 발카스에게서 전부 반환받았다. 그렇다고 아무 집이나 덥석 계약할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둘은 처음부터 각자의 돈으로 얼마를 낼지, 공용비를 어떻게 관리할지,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한 공간을 함께 쓰며 필요한 의사결정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계약서 첫 장은 깔끔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의 작은 글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입주자 중 한 명이 임의로 퇴거하면 잔여 보증금은 소유자가 정하는 방식으로 분배한다.]
“여기서 소유자라는 건 집주인입니까?” 태오가 물었다.
“네. 다투지 않게 적어 둔 거죠.”
“그러면 저희끼리 합의한 분배 방식보다 집주인 판단이 앞설 수도 있겠네요.”
집주인은 펜을 내려놓았다.
“보통은 이렇게 쓰는데.”
리네아가 친절히 대답했다.
“입주자 두 명의 지분과 실제 출자액을 기재해 두면 분쟁을 더 줄일 수 있어요. 선생님도 지급 상대를 명확히 알 수 있고요.”
“둘 다 계약 당사자로 들어가겠다는 건가요?”
“네. 물론 집주인께서 그 조건을 원하지 않으시면 저희가 다른 집을 보면 됩니다.”
그 말은 협박도 흥정도 아니었다. 선택이었다. 태오는 옆에 선 리네아를 바라봤다. 예전 같으면 중개인인 그녀가 자신을 대신 설득해 주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지금은 함께 조건을 결정하는 두 사람으로 앉아 있었다.
집주인은 한동안 생각하다 수정안을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당장 계약하지 않고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태오에게 묘한 여유를 줬다.
“어땠어요?” 리네아가 물었다.
“창문은 마음에 듭니다. 계약서는 좀 덜 마음에 들고요.”
“그럼 다음 집.”
“이렇게 쉽게요?”
“연애도 집도, 억지로 시작하면 나중에 피곤하잖아요.”
태오는 그녀가 일부러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건 저희 관계에도 적용됩니까?”
“당연하죠. 그러니까 제가 언제든 마음을 바꿀 수도 있어요.”
그가 순간 굳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대신 당신도 언제든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럼 지금 말하겠습니다. 방금은 놀랐어요.”
“그건 인정할게요.”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태오는 그 손을 잡았다.
***
두 번째 집은 골목 안 작은 이층집이었다. 아래층에는 제빵사가 살았고 위층은 비어 있었다. 난방은 좋았지만 문을 열 때마다 향긋한 빵 냄새가 올라왔다.
“아침마다 빵 냄새가 나겠네요.” 태오가 말했다.
“그래서 월세에 빵값을 포함해야 하나 고민입니다.” 집주인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토른에게 구조 점검을 맡길 수 있을지 물어보자 집주인은 흔쾌히 승낙했다. 다만 지붕이 오래되어 수리 일정을 계약서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리네아는 자신의 중개수수료와 이해관계 신고 문제도 정중히 밝혔다.
“이번 거래는 제 사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거래입니다. 길드에 신고하고, 원하시면 독립 중개사에게 중개를 의뢰하셔도 됩니다.”
집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는 비교 견적을 받아 보겠습니다.”
리네아는 흔쾌히 수락했다. 태오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자신과 연인이라는 이유로 직업적인 의무를 덮어 두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멋있어요.”
“계단이요?”
“당신이요.”
리네아는 고개를 돌렸다.
“이런 데서 갑자기요?”
“집을 소개할 때 가장 근사해 보여요.”
“그럼 오늘 밤에도 계약 조항을 읽어 드릴까요?”
“그러시면 제가 잠을 못 잡니다.”
“어머, 그렇게 자극적이에요?”
“반드시 서명이 어디 들어가는지까지 신경 쓰게 되니까요.”
그녀는 웃다가 그의 팔을 툭 쳤다.
***
세 번째 집은 오래된 석조 주택이었다. 잘 관리된 정원과 작은 서재가 있었지만 입구 앞에서 태오가 멈췄다. 대문 옆 금속판에 검은 비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혹시 이 집 주인…”
“드래곤은 아니에요.” 리네아가 먼저 말했다.
“확인했습니까?”
“네. 사흘 전에요. 인간 세대주이고 등기 기록도 확인했습니다.”
“조상 중에는…”
“태오 씨.”
“알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들자 그녀가 또 웃었다.
“그래도 이런 무늬에 긴장할 만하죠.”
집주인은 오래된 문장을 설명했다. 비늘이 아니라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본뜬 가문 장식이었다고. 파벨이 강항 도시였던 시절의 흔적이란다. 태오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이 모든 날카로운 무늬를 발카스와 연결하는 버릇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이 집에는 작은 서재가 있었다. 태오의 기록방과 별도로 개인 문서를 보관하기 충분했고, 리네아는 창문 가까운 책장을 마음에 들어 했다. 두 사람은 오래 그 앞에 섰다.
“여기에 무얼 놓고 싶어요?” 태오가 물었다.
“여행에서 사 온 지도요. 그리고 당신이 아직 쓰지 않은 이야기.”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데요.”
“매일 장부를 쓰잖아요. 언젠가 장부 말고 다른 이야기도 써 보세요.”
태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가끔 리네아는 그가 자기 안에서 찾지 못한 부분까지 미리 보는 사람 같았다.
“당신은요?”
“저는 제 고객들이 새 집에 들어가기 전에 꼭 알고 싶었던 것들을 작은 책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럼 이 서재가 바빠지겠네요.”
“그렇죠. 두 사람 몫의 책상이 필요할 거예요.”
그 순간 태오는 집을 ‘그녀와 함께 살 장소’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일을 하면서 함께 돌아오는 장소’로 처음 상상했다.
***
오후에 발카스의 전갈이 도착했다. 그는 직접 나타나지 않고, 대신 바렌을 보냈다. 바렌의 손에는 왕실 고산자료 위탁실이 요구한 보존 협조 동의 양식이 있었다.
“영지의 옛 산길을 통행하려면 토지 경계와 통행 안전에 관한 자료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태오가 물었다.
“자료 보관실 방문에는 필요 없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현재 단계는 위탁실 문서 목록 조회입니다. 혹시 나중에 현장 조사 요청이 들어올 때 참고하려는 겁니다.”
태오는 서류를 따로 내려놓았다.
“미리 협조받는 건 괜찮지만, 실제 허가가 난 것처럼 일정에 적지 않겠습니다.”
바렌이 웃었다.
“발카스 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태오는 고개를 들었다. 이 말에 익숙해질 날이 올까.
바렌은 한 가지를 더 설명했다. 제0호 관측소에서 회수 결과라는 제목의 별첨은 두 건이지만, 첫 번째 행정 목록대조본의 사본은 이미 일부 비식별 열람이 가능해질 전망이었다. 반면 봉함 원자료는 봉인 상태와 원본 등록번호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두 회차처럼 급하게 상자를 열 일이 없겠군요.”
“네. 산에 올라가야만 할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태오는 안도하면서 조금 서운한 자신을 발견했다. 모험을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상한 건물이 등장하면 속으로 흥분하는 버릇은 아직 남아 있었다.
***
저녁 식사 때 리네아는 오늘 본 세 집의 장단점을 식탁 위에 적었다. 태오는 세 번째 집의 서재와 조용한 정원을 가장 먼저 이야기했다.
“그 집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네. 다만 보증금과 월 부담이 저희 둘의 현재 수입에서 무리가 없는지 확인해야겠어요.”
“저도요. 지금은 좋은 집을 보는 것만으로 즐거워요.”
그녀는 잠시 종이를 바라봤다.
“당신이 저와 함께 집을 찾자고 했을 때 조금 무서웠어요.”
“왜요?”
“전에 제가 소개한 집 때문에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까요.”
태오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감쌌다.
“그때 중요한 걸 빠뜨린 건 잘못이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 문제를 같이 마주한 것도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잘못하면 고치고, 불편하면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람이 너무 성숙해지면 놀릴 맛이 안 나요.”
“그 문제도 개선하겠습니다.”
리네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
둘은 집을 보기 전에 예산을 다시 맞춰 보았다. 리네아의 중개수입은 달마다 일정하지 않았고, 태오의 기록방도 개업 초기라 수수료가 크게 달랐다. 두 사람이 마음에 드는 집이라고 해서 매달 무리한 비용을 내며 살 수는 없었다.
태오는 작은 종이에 예상 지출을 적었다. 보증금과 월 사용료, 난방비, 주택 수리와 관련한 예비비, 각자의 작업장으로 오가는 교통비. 리네아는 펜을 빼앗듯 집어 들고 '쉬는 날을 위한 돈'이라는 칸을 추가했다.
“이건 뭡니까?” 태오가 물었다.
“같이 살다가 피곤하다고 여행을 포기하지 않으려고요.”
“휴식 예산이군요.”
“당신 말로 하면 그렇죠. 저는 그냥 행복할 돈이라고 부를래요.”
태오는 잠시 웃었다가 그 이름을 그대로 적었다. 사람이 사는 집을 고르는 일은 최소 비용으로 하루를 버티는 방법을 찾는 일과는 달랐다. 두 사람은 일도 하고, 쉬기도 하고, 때로는 손님을 맞을 것이다.
“그럼 각자 개인적으로 쓰는 돈은 서로 검사하지 않기로 합시다.” 그가 말했다.
“좋아요. 대신 공동으로 쓰기로 한 돈은 같이 확인하고요.”
“찬성합니다.”
리네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저와 함께 살면 모든 가계부를 당신이 맡아 버릴까 봐 걱정했어요.”
“저도 잠깐 그럴 뻔했습니다.”
“아, 인정하시는군요.”
“제가 잘하는 일을 전부 혼자 해야 한다는 착각이 있었어요. 장부가 보기 쉬우면 당신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면 되겠죠.”
그녀는 미소 지었다. 예전 같으면 태오는 '내가 관리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정확성이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집을 보러 가는 길에 두 사람은 강가에 앉아 잠시 아침빵을 나눠 먹었다. 태오가 빵 끝에 붙은 작은 씨앗을 떼어 내려 하자 리네아가 물었다.
“왜요?”
“이를 닦았는데 끼면 불편하니까요.”
“그럼 당신은 결혼식 날에도 음식부터 검사하겠어요.”
태오의 손이 멈췄다.
“결혼식이요?”
“예를 들면요.”
리네아가 태연하게 빵을 베어 물었다. 태오는 대답을 찾으려 했지만 그녀는 벌써 강물 쪽을 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묻자 그녀는 눈만 돌려 웃었다.
“궁금하면 언젠가 직접 물어보세요.”
“그 언젠가를 미리 정하고 싶군요.”
“오늘은 집 세 곳부터요.”
태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드래곤과는 300금화의 계약을 두고 수없이 말다툼했지만 이 엘프는 짧은 한마디로 그를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리네아가 빵을 먹으며 웃는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확인할 서류가 많아도 미래는 빈칸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어떤 질문은 지금 답하지 않아도 함께 걸으며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그날 아침 본 집의 위치를 지도에도 표시했다. 기록방에서 걸리는 시간과 중개 사무실에서 걸리는 시간은 조금씩 달랐다. 리네아는 어느 한쪽의 동선을 기준으로 삼기보다 둘 다 무리 없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산다는 건 상대가 자신에게로 이사 오는 일이 아니라, 두 사람이 새 주소를 같이 선택하는 일이었다.
***
밤이 깊은 뒤 왕실 위탁실의 짧은 답변이 도착했다. 회수 결과 목록대조본의 첫 장은 ‘보존 결과’가 아니라 ‘현장 조사 대상’ 분류표였다. 그곳엔 세 가지 항목이 있었다.
[제0호 관측소 송신 설비 점검.]
[기준 인영도보 보관대 상태 확인.]
[기능 표식 관련 수령·회수 진술 참조.]
문장들은 조사해야 할 대상의 이름일 뿐, 점검과 수령이 완료됐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그러나 마지막 줄의 옆에는 이전에 보지 못한 검은 네모가 찍혀 있었다.
[현장 상태: 송신구 폐쇄.]
태오는 그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47-C와 연결된 옛 통지가 단순히 편지가 아니라 산 위의 송신 설비를 통해 전달됐을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이제 어떤 문서가 관측소에 도착했는지뿐 아니라, 관측소가 무엇을 밖으로 보낼 수 있었는지도 살펴야 했다.
그는 잠깐 욕심이 나서 지도를 펼쳤지만 곧 접었다. 열람 허가도 기상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산길을 계획할 이유는 없었다.
리네아는 잠든 줄 알았는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집은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서재 있는 집이요.”
“나도요.”
태오는 그녀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관측소의 신호가 어디를 향했는지는 내일 확인해도 된다. 오늘은 두 사람이 같은 집을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
제17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