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오는 여행용 가방을 펼쳐 놓고 가장 먼저 신발을 꺼냈다. 구두도, 장부도, 계약서도 아닌 산길용 신발이었다. 몇 달 전의 자신이라면 여기서 이미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다. 검은 산맥에 용이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당장 계약서를 들고 올라갔고, 정상에 이르러서야 두꺼운 외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또 산에 가요?”
문에 기대 있던 리네아가 물었다.
“아직 아닙니다.”
“그런데 신발은 왜 꺼내 놨어요?”
“가도 되는지부터 확인하려고요. 가게 된다면 이 신발이 맞는지도요.”
그녀가 웃었다.
“사람이 이렇게 신중해질 수도 있군요.”
“드래곤에게 전세금을 받아 본 사람은 달라집니다.”
“전세금은 이제 다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더 조심하려고요. 전에는 제 돈이라도 찾아야 했지만 지금은 남의 권리와 관련된 일이니까.”
태오는 신발을 다시 가방 밖에 놓았다. 그가 받은 원금 300금화는 완납됐고, 그 사실은 수첩에도 회계장부에도 지급 확인서에도 같게 적혀 있었다. 더 받을 금화를 찾는 여행이 아니다. 구 서고 기록을 보존하고, 잘못된 통지 처리를 바로잡는 데 필요한 증거가 어디 있는지 살피는 일이었다.
그는 편지 하나를 펼쳤다.
[왕실 고산자료 위탁실. 제0호 감시 관측소 폐쇄분 회수 결과 별첨의 보존 목록 여부에 대한 문의 접수.]
문의 접수. 아직 목록이 확인됐다는 말도 아니었다.
“일단 위탁실에 가려고 합니다.”
“어디 있는데요?”
“산 아래 행정구역이라고 들었습니다. 산 위 관측소와는 별개로요.”
리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발카스의 집을 소개했던 당시에도 이런 구분이 선명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집을 소유한 자와 그 지하 보관소의 관리권자는 같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는 관측소와 관측소 자료를 맡은 위탁실도 구분해야 했다.
“그럼 제가 안 가도 되는 날인가요?”
“당신이 결정하세요. 내일 중개인 길드 감독 점검이 있지 않습니까?”
“오후에요. 오전에는 세 집을 보기로 했고요.”
태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세 집?”
“그새 잊었어요? 우리가 함께 살 집 후보요.”
드래곤의 비늘과 왕실 공문을 기억하느라 연인의 약속을 놓칠 뻔한 남자가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게 먼저죠.”
리네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는 그렇게까지 말씀드리진 않았는데.”
“오늘 일정표에는 그게 먼저입니다.”
“좋아요. 그럼 합격.”
“무슨 시험이었습니까?”
“집을 같이 볼 자격.”
태오는 그 자격만큼은 기꺼이 받고 싶었다.
***
아침에 그는 혼자 왕실 기록국으로 갔다. 세딘과 마르셀, 기록 보존담당 이르마 솔이 한 방에 모였다. 책상 위에는 서로 다른 세 문서가 있었다. 하나는 일곱 해 전 관측소가 받은 공문 목록, 다른 하나는 폐쇄 뒤 왕실 위탁실로 보내야 할 자료의 운송표, 마지막은 최근 발급된 자료 문의 접수증이었다.
“맨 위의 회수 결과 별첨이라는 표현부터 설명해 주십시오.” 태오가 말했다.
세딘이 첫 종이를 집었다.
“그 시절 관측소는 계정 47의 감시표식 소재 문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관련 기준 인영 자료를 회수하거나 찾으라는 지시가 내려왔지요.”
“그럼 찾았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회수 결과를 별첨하라고 적힌 겁니다. 성공 여부는 본문에 없어요.”
이르마가 운송표를 펼쳤다.
“이 종이는 관측소가 폐쇄된 뒤 남은 자료를 위탁실로 이관하라는 목록입니다. 목록에 적혔다고 실물이 도착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도착 대장을 봐야 합니다.”
“세 개를 연결하면 확실한 게 뭐죠?”
“그런 자료를 찾으려 했고, 폐쇄 때 관련 묶음이 있었다고 적혔으며, 지금은 실물이 어디 있는지 검증 중이라는 정도입니다.”
태오는 수첩에 각각 다른 칸을 만들었다. 질의, 회수 지시, 이관 예정, 인수 확인. 이 네 단계가 모두 완료됐다고 치면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해진 이야기 때문에 소피의 편지가 한때 ‘수신 완료’로 둔갑했다.
“어떤 열람 허가가 필요합니까?”
마르셀이 대답했다.
“보존 목록의 존재 여부와 공개 가능한 문서 제목을 확인하는 데는 제한된 조회 절차가 있습니다. 개인의 주소와 명의 이의가 담긴 원문을 보려면 당사자나 적법한 조력자의 자격을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저는 원본을 가져올 생각이 없습니다.”
“좋습니다. 실제로 어느 날 가져와야 한다면 그때는 운송과 인수 절차도 정해야지요.”
이르마가 웃었다.
“서고에서 일해 보면 가장 위험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불을 뿜는 드래곤이요?”
“그 사람은 적어도 눈에 보이죠.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잠깐 보기만 하겠다’며 묶음을 들고 사라지는 분입니다.”
태오는 웃지 못했다. 자신도 처음엔 47-B 표식을 들고만 가면 어떤 문이든 열어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
그날 오후 소피가 기록방을 찾았다. 태오는 그녀를 위한 작은 의자를 창가에 옮겼다. 소피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오는 길이었다.
“재통지 날짜가 나왔어요.”
“다행입니다. 어떻게 전달받기로 하셨습니까?”
“제가 직접 받을 거예요. 예전 주소나 모르는 대리인한테 보내지 말고요.”
그녀는 잠깐 망설였다.
“사람들이 또 다 끝났다고 말하면 어쩌죠?”
태오는 곧장 괜찮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지난번 잘못된 기사가 나왔을 때 소피가 겪은 일을 기억했다.
“공개 안내문에는 절차 상태만 적게 요청할 수 있습니다. 소피 씨 계약의 세부 내용은 본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제가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걸 사람들이 이해할까요?”
“이해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기록은 정확히 남길 수 있습니다.”
소피는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앞표지가 여러 번 젖었다 말랐는지 울어 있었다.
“여기엔 제가 직접 받은 돈만 적었어요. 그때 받은 열두 금화도요.”
태오는 수첩을 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건 소피 씨의 기준 장부군요.”
“예전엔 누가 기록해 준 대로만 믿었어요.”
“지금은 직접 확인하고 계시잖아요.”
그녀가 미소 지었다. 태오는 자신이 해 준 일이 무엇인지 과장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그녀가 기록할 시간을 마련한 것뿐이었다.
***
저녁 무렵 발카스가 기록방을 찾아왔다. 인간 모습인데도 문턱에 설 때마다 어딘가 산맥 하나가 함께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제0호 관측소에 관해 들었다.”
“네. 그곳 자료의 행방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곳은 일찍이 내 영지에서 왕실 감시를 위해 쓰던 산등성이에 있었다.”
“그럼 발카스 님이 관측소 주인이십니까?”
“아니다. 땅의 일부가 내 것이었던 시기는 있다. 관측 업무와 자료의 소유는 왕실 쪽이었다.”
태오는 그 대답을 적었다.
“일곱 해 전 연락 담당자가 발카스 님 자산관리실 사람으로 적혀 있습니다.”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 연락 창구는 우리 관리실에 뒀다. 눈이 내리면 왕실 사람이 지나갈 길을 열어 주기도 했으니까.”
“그 사람이 47-C를 받았습니까?”
“모른다.”
한때 발카스의 입에서 ‘모른다’는 대답을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태오는 놀라지 않고 기다렸다.
“내가 모르는 것을 내 이름으로 채우지 마라.” 드래곤이 덧붙였다.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산에 함부로 오르지 마라. 제0호 관측소는 철거된 곳도 있고, 눈 아래 빈 계단이 남은 곳도 있다.”
“공식 현장 접근 허가와 안전 확인 전에는 가지 않겠습니다.”
발카스는 태오가 한동안 자신을 빤히 보는 줄 알았다.
“무슨 말이냐?”
“드래곤 님이 방금 제게 아주 합리적인 안전 조언을 하셔서요.”
“내가 늘 위험을 즐기는 존재라고 생각했느냐?”
“처음 동굴에서 저를 반쯤 구워 드시려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건 경고였지.”
“전세금이 늦게 나온 것도 경고였습니까?”
“그만해라.”
드래곤은 투덜거렸지만 작은 의자를 부수지는 않았다.
***
파벨 기록방으로 돌아왔을 때 태오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시장에서 작은 염료 가게를 운영하는 젊은 상인 데린이었다. 그는 장부를 펼치자마자 실수한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제가 배달 확인을 잘못했나 봅니다. 여기엔 물감이 모두 도착했다고 적혀 있는데 가게에는 상자가 두 개밖에 없어요.”
태오는 장부의 첫 줄부터 살폈다. '발송 완료', '운송 접수', '가게 도착'이라는 칸이 있었다. 마지막 칸에는 숫자가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낡은 양식의 오른쪽 끝에 표준적인 체크 표식 하나가 찍혀 있었다.
“이 표식은 어디서 찍혔습니까?”
“운송소가 준 인수증인데요. 제가 서명하진 않았습니다.”
태오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거래가 자주 일어나면 모든 물건의 이동을 직접 따라가기는 어렵다. 중요한 건 누가 어떤 단계의 일을 맡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일단 물건이 없다는 사실은 가게 재고표로 확인하셨죠?”
“네. 수량을 두 번 세었습니다.”
“그럼 다음은 운송소에 도착 장소와 인계 담당자를 물어볼 차례입니다. 제가 필요한 질문서를 만들어 드릴게요. 대신 운송소의 잘못이라고 쓰지는 않겠습니다. 아직 모르니까요.”
데린은 잠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은 항상 누가 잘못했는지부터 묻지 않네요.”
“그 질문은 대답할 자료가 있을 때 해도 늦지 않습니다.”
태오는 문서의 목적을 명확히 적었다. 운송 물품의 실제 인계 장소와 수량 확인 요청. 소유권 판단이나 손해 배상 청구는 이후의 문제였다. 청구하려는 고객의 권리를 덜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사실부터 쌓아 가려는 일이었다.
데린은 돌아가기 전 잠깐 망설였다.
“혹시 제 가게가 잘못했어도 괜찮을까요?”
“괜찮다고 미리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그래도 잘못된 부분을 정확히 알면 고칠 수는 있겠죠.”
그가 나간 뒤 태오는 작업 수수료를 사업 장부에 적었다. 전세금을 반환받은 계정과 같은 장부에 적지 않았다. 돈을 받았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둘 다 수입처럼 보였지만, 하나는 원래 자기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 일한 대가였다.
리네아가 잠시 들러 서류를 넘겨 봤다.
“오늘은 어디까지 정리했어요?”
“가게에 안 온 물감 두 상자요.”
“관측소보다 가까운 사건이네요.”
“훨씬요. 그런데 중요한 건 비슷합니다. 한 곳에서 받았다고 표시하면 다음 사람이 실제 받았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거죠.”
그녀는 창문 너머의 시장을 바라봤다. 물감 상자가 오지 않아 내일 가게 문을 제대로 열 수 없는 사람에게, 기록은 마법 세계의 오래된 미스터리보다 절실했다.
“당신이 이 일을 시작한 게 좋아요.”
“저도요. 하지만 혼자 다 맡지는 않으려고요.”
“정말 그럴 거예요?”
“제일 어려운 약속이지만요.”
그녀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태오는 그 손가락을 맞잡았다. 오늘도 일을 끝낼 시간에 끝내자는 두 사람만의 작은 약속이었다.
그가 장부를 정리하는 동안 창밖으로 저녁 햇살이 기울었다. 며칠 뒤의 산행 계획보다 지금 찾아온 고객의 물건 두 상자가 더 급한 문제일 수 있었다. 태오는 문의서 한 장을 끝까지 검토하고 나서야 관측소 지도를 다시 펼쳤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맡긴 일을 자기 모험보다 가볍게 취급하지 않았다.
***
밤이 되어 위탁실에서 첫 회신이 도착했다. 구 왕실 고산자료 위탁실은 실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보존 목록에는 같은 제목 아래 두 건이 있었다.
[제0호 관측소 회수 결과 별첨. 목록대조본 1부.]
[제0호 관측소 회수 결과 별첨. 봉함 원자료 1건.]
둘은 봉인번호도, 이관 시기도 달랐다. 목록대조본은 폐쇄 직후 행정 정리를 위해 복사된 자료였고, 봉함 원자료는 더 나중에 들어온 것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태오는 처음엔 반가웠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원자료라는 이름이 정말 최초 원본임을 증명하는 건 아니다. 더 늦게 들어왔다는 사실 역시 그 내용이 조작됐다는 뜻은 아니다.
“일단 둘 다 존재한다고 적힌 건 확인됐네요.” 리네아가 말했다.
“네. 각각 어떤 봉투인지 검증해야겠어요.”
“그럼 내일 집 보러 가는 건 변함없죠?”
태오는 웃었다.
“변함없습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창문을 닫았다.
검은 산맥의 관측소는 멀리 있었지만, 집을 보러 갈 세 동네는 바로 파벨 안에 있었다. 태오는 처음으로 그 거리 차이를 제대로 느꼈다. 오래된 문서가 미래를 결정할 수는 있어도, 오늘 정해 놓은 약속을 마음대로 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수첩 맨 아래에는 딱 두 줄을 남겼다.
[제0호 회수 결과: 두 종류의 보존목록 발견. 현물 진위·내용 미확정.]
[태오 미환급 원금 0. 소피 12금화, 헤스 10금화 각각 일부 실수령.]
제171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