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은 없었다. 비도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파벨 기록국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김태오는 계단 위에 늘어선 운송 인부들을 보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인부들은 회색 천으로 덮인 나무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 상자에는 왕실 공익감시부와 동부 보관협회의 문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또 무슨 보관 자료입니까?” 태오가 물었다.
세딘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자료를 옮기는 일정이 문제가 됐습니다.”
“분실됐습니까?”
“아닙니다. 아직은요.”
그 말이 더 불길하게 들렸다.
세딘은 서고 6-H가 오래된 공동 보관계약에 따라 공간을 빌려 쓰고 있었는데, 그 계약의 갱신 협의가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시설 관리자는 이미 다음 달부터 수리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자료를 버리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새 장소로 옮길 때 봉인 상태와 목록을 정확히 대조해야 했다.
“자료가 모두 어디로 가는지 기록돼 있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일부는 그렇고, 일부는 대조 중입니다. 문제가 되는 상자 하나가 있어요.”
세딘이 작은 표찰을 내밀었다.
[임시 감시기록 보관함 / 인수 검토번호 C-47-예비.]
태오는 그 번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47-C’와 순서가 달랐다. 이 표찰이 자신들이 추적하던 진품 감시·통지 표식과 같은 물건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우연히 비슷한 번호가 여러 번 등장하는 일도 이제는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번호가 닮았다고 같은 물건이라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그게 좋습니다.” 세딘이 말했다. “그래도 관련 관리기록은 검증할 가치가 있죠.”
***
임시 감시기록 보관함은 작은 상자가 아니었다. 성인 두 사람이 양팔을 벌려야 겨우 옮길 수 있는 크기였다. 오래된 갈색 나무판에는 푸른색 페인트 자국이 남아 있었다. 토른이 구조를 점검하고 말했다.
“이건 돈을 담는 금고와 다르군. 서류함이야.”
“안에 금화가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나무 이음새와 손잡이 위치를 보면 무게가 큰 물건을 넣도록 만든 구조는 아니야.”
“가능성이 낮다는 거군요.”
“그래. 하지만 실제 내용물은 열어 봐야 알겠지. 오늘 우리에겐 그 권한이 없고.”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관함 뒷면에는 이전에 다른 상자에 붙었다가 떼어진 것 같은 인영이 있었다. 디아나 벨크가 자국을 확대해 살펴봤다. 낡은 페인트 층 아래에 ‘수신 전 대조’라는 말의 일부가 읽혔다.
“이건 언제 적은 겁니까?”
“도장과 페인트의 작성 시기를 감정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디아나가 답했다. “또한 같은 장비를 여러 기관에서 사용했을 수 있습니다.”
태오는 익숙한 대답에 웃었다.
“이제는 저도 그런 말을 먼저 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습관이에요.”
***
그날 오후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베라 퀸이었다. 옛 공익감시부 임시 연락원이자 현재 종이공방을 운영하는 여인이다. 지난번 면담에서 그녀는 자신이 문서를 받았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오늘 보관함 옮긴다는 말을 듣고 왔어요.” 베라가 말했다.
태오는 인사를 건넸다.
“혹시 아시는 물건입니까?”
“똑같은 물건인지는 모르겠어요. 예전에 감시부에서 문서가 늦게 도착하면 임시 보관함에 넣어 두던 일이 있었거든요.”
“그 기록을 남기셨습니까?”
“남겼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가진 건 원본이 아니에요.”
그녀는 종이공방에서 가져온 낡은 수업 공책을 내밀었다. 서류 보조인들을 교육할 때 적었던 예시 문장들이 있었다. 한쪽에는 큼직한 붉은 글씨가 보였다.
[미도착 문서는 수령 완료가 아니다.]
태오는 그 문장을 알고 있었다. 이미 148화의 미도착 목록에 같은 취지의 지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에는 조금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임시 보관함 이관 시: 발송 대상별 통지 이력과 감시 결과 사본을 한꺼번에 폐기하지 말 것.]
“이걸 당시 실제로 교육하셨습니까?” 세딘이 물었다.
“몇 번 했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 가져온 건 나중에 제 공방 수업에서 다시 적은 공책이라, 당시의 공식 규정 원본은 아니에요.”
태오는 베라의 신중함이 반가웠다.
“그럼 참고자료로 보존할 수 있겠네요.”
“네. 그리고 당시 교육 자료가 별도로 있을지도 몰라요.”
***
보관기관에서는 자료 이동을 하루 중단하는 대신, 당사자들의 의견을 듣기 위한 임시 보전 회의를 열었다. 시설 수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건물 천장 일부가 오래되어 흔들리고 있었고, 나무 서가에는 벌레 먹은 흔적도 있었다. 무작정 자료를 그대로 두자고 할 수는 없었다.
“안전하게 옮기는 방법을 먼저 정하겠습니다.” 이르마 솔이 말했다.
토른이 바닥의 기울기와 운송 장치의 하중을 살폈다. 그는 보관함의 겉면에 작은 균열이 있지만 당장 부서질 상태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관에 사용할 받침과 충격 방지대를 새로 만들면 운송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비용을 누가 냅니까?” 한 관리인이 물었다.
그때 발카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늘 그렇듯 커다란 몸집으로 문틈을 채웠지만 이번에는 소리부터 지르지 않았다.
“그 비용은 내가 일부 지원할 수 있다.”
태오가 재빨리 덧붙였다.
“지원과 열람권은 별개입니다.”
“알고 있다!” 발카스가 투덜거렸다.
이르마는 미소 지었다.
“지원 제안은 감사하지만 예산·이해충돌 규정을 거쳐야 합니다. 당장 돈을 내신다고 이동 계획이 확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발카스는 한동안 이르마를 바라보았다.
“인간들은 나한테 돈을 내라고만 하더니, 이제 낸다고 해도 기다리라 하는군.”
“그만큼 진지하게 다루려는 겁니다.” 태오가 말했다.
드래곤이 한숨을 쉬었다.
***
***
보관함을 옮기기 전에 작은 모의 운송이 진행됐다. 토른은 실물 자료 대신 무게가 비슷한 돌과 오래된 목재로 시험용 상자를 만들었다. 인부들이 계단을 내려가자 나무 바닥이 삐걱거렸다.
“여기부터는 각도를 바꿔야 해.” 토른이 말했다.
인부들이 상자를 돌리려 했지만 좁은 복도에서 손잡이가 벽에 닿았다. 태오는 무심코 옆에 있던 오래된 선반을 바라봤다. 선반은 이동식이 아니었고, 그 안에는 다른 기관의 기록물이 보관돼 있었다. 함부로 치울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럼 반대쪽 통로는요?”
“그쪽은 바닥이 약해.” 토른이 대답했다. “보강하지 않고 보내면 진동 때문에 봉함자료가 손상될 수 있어.”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보관함을 어디에 놓느냐는 문제가 누군가의 이해관계로만 보였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실제 구조 문제도 분명히 있었다. 누군가가 자료를 숨기려는 의도가 있는지 추측하기 전에 안전한 이동 경로부터 마련해야 했다.
그때 발카스가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날아서 옮기면 되지 않느냐?”
토른이 손을 내저었다.
“네가 상자 위에 손을 얹는 순간 봉인 관리기록을 새로 만들어야 해. 그리고 상자가 공중에서 흔들리면 누가 책임질 건데?”
발카스가 잠깐 생각했다.
“그럼 내가 바람만 막아 주면?”
“필요하면 그때 부탁하지.”
드래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물러났다. 태오는 웃음을 참았다. 거대한 날개가 있으면서도 작은 상자를 마음대로 옮길 수 없는 날이었다.
***
운송 시험이 끝난 뒤 이르마는 이해관계자에게 설명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상자 안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는 것과 안전하게 장소를 옮기는 일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이동을 위해 봉인 상태를 기록하고, 원래 보관하던 위치와 새 위치를 연결할 수 있어야 했다. 열람과 개봉은 별도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러면 이동 중에 누가 상자에 접근했는지도 기록되나요?” 소피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인수·인계 담당자와 봉인 확인자를 분리할 예정입니다.”
“그럼 마음이 놓이네요.”
“아직 계획 단계입니다. 실제 이동 때도 그대로 지켜지는지 확인해야겠지요.”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오는 그 말을 듣고 자기 기록방을 떠올렸다. 책상 위의 고객 서류도 누가 맡겼는지, 언제 돌려받는지 적어 두고 있었다. 규모는 달라도 같은 원리였다. 기록이 자기 발로 걸어 다니지는 않는다. 결국 사람이 들고 옮기므로 그 행동을 정확히 남겨야 했다.
이르마는 태오에게 물었다.
“기록방 사장님, 이번 자료 보관 위치를 도식으로 정리해 주실 수 있습니까? 다만 외부 공개할 수 있는 범위만요.”
태오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제 작업장 일정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다른 고객의 일도 있어서요.”
이르마가 웃었다.
“좋은 대답입니다. 기록 보존을 돕는다고 자기 사업을 모두 멈출 필요는 없지요.”
태오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한편 소피에게는 재검토 신청의 첫 연락이 도착했다. 이의 진술과 개별 통지 여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한 면담 일정이었다. 그녀는 혼자 갈지, 도움을 받을지 고민했다. 결국 이벨을 법률 조력인으로 지정하고 태오에게는 서류를 정리하는 일만 부탁했다.
“그게 더 편하겠어요.” 소피가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여기까지 오니까 내가 정말 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아요.”
“맞습니다. 소피 씨가 결정하고 계시니까요.”
소피는 밝게 웃었다.
“돌려받은 열두 금화는 아직 다 쓰지 않았어요. 다음 집 계약을 좀 더 알아보고 있어요.”
“리네아 씨와 상담하셨습니까?”
“네. 선택지가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태오는 그 말을 듣고 안도했다. 완벽한 결말은 아직 멀었다. 그러나 소피의 내일은 예전보다 조금 넓어졌다.
***
저녁에는 리네아가 기록방으로 왔다. 그녀는 태오가 또 서고 사건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대신 작은 도시락 두 개를 내밀었다.
“오늘은 작업장 안에서 먹어요.”
“왜요?”
“밖에 나갈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요.”
“저는 괜찮은데요.”
“알아요. 그래서 제가 왔죠.”
태오는 그녀를 바라보다 웃었다. 리네아는 사람을 구한다며 자신을 다 소진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가끔 멈춰 세워 주었다.
“호수 여행 또 가고 싶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그럼 다음에는 제가 보트를 탈게요.”
“제가 노를 저으면 안 됩니까?”
“계약서에 안전 조항부터 넣어야 할 것 같은데요.”
“너무하십니다.”
리네아는 도시락을 열며 웃었다.
“그래도 같이 갈 거예요.”
태오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잡았다.
***
밤이 깊을 무렵 세딘에게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동을 준비하던 보관함의 이전 대조표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열람 조건이 하나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수령 기능군 확인 전까지 봉함자료 개봉 금지.]
그 아래에는 아주 오래된 잉크로 쓴 작은 줄이 있었다.
[감시 결과 사본은 미수령자 통지 재시도 시 우선 대조할 것.]
태오는 천천히 그 문장을 읽었다. 지금까지는 누가 통지를 받았는지 알 수 없어 서류를 찾았다. 그런데 이 보관함이 정말 과거의 미수령자에게 다시 통지를 보내기 위한 자료를 담고 있다면, 지금 진행 중인 재검토와 직접 연결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 두 번째 메시지가 이어졌다.
[봉함자료 이관기록 부속에서 47-C 계열 원본 표식 대조 신청 흔적 발견. 실제 진품 표식, 신청 주체 및 결과는 미확정.]
태오는 몸을 일으켰다. 오래전 ‘47-C 계열’은 단순한 기능 분류로만 확인되었다. 오늘 처음으로 원본 표식의 대조를 요청했다는 다른 기록이 나타난 것이다. 그 기록 자체가 실제 표식이 존재하거나 누군가 권한을 가졌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하지만 조사해야 할 질문은 한층 구체적이 됐다.
그는 메모를 적었다.
[보관함 이동 보전. 미수령자 재통지 대조 자료 가능성. 47-C 원본 대조 요청의 신청인과 결과 확인.]
리네아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또 새로운 문이 열렸어요?”
“네. 다만 이번에는 제가 그 문을 열 필요가 있는지도 먼저 물어보려고요.”
“좋아요. 우리 둘의 집 문을 여는 일도 잊지 말고요.”
태오는 웃으며 일어섰다. 그는 자기 전세금 삼백 금화를 모두 돌려받은 사람이었다. 이제 모든 금고와 서고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강박은 없었다. 그러나 아직 자기 이름으로 말할 기회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가 그들의 편지를 받았다고 적었는가.
누가 실제로 받지 못했는가.
그리고 47-C 원본 대조를 요구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 가지 질문은 다시 한 통의 봉투 앞에서 만났다.
제16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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