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호수로 가는 마차는 이른 아침부터 만원이었다.
김태오는 창가 자리에 앉아 길가의 은빛 자작나무를 바라봤다. 예전에 검은 산맥으로 올라갈 때 그는 나무마다 숨은 도적이 있을지 걱정했다. 오늘은 잎사귀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좋았다. 여행이라는 말을 아예 다른 감각으로 이해하는 날이었다.
“저기요, 옆자리 손님.”
리네아가 모르는 사람처럼 그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이 마차가 어디로 가는지 아세요?”
“북부 호수로 갑니다.”
“그곳이 아름답다고 하던데, 같이 구경하실래요?”
태오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저는 이미 함께 오기로 한 분이 있습니다.”
리네아의 미소가 굳었다.
“그분이 누군데요?”
“저보다 훨씬 똑똑하고 아름다운 엘프 중개인입니다.”
“이 마차 안에 계시나요?”
“바로 제 옆에 앉아 계시죠.”
리네아는 웃음을 참다가 결국 그의 어깨를 밀었다.
“반칙이에요. 처음 만난 척하기로 했잖아요.”
“처음 만났다고 가정해도 같은 분을 선택할 것 같은데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더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오는 그 작은 승리에 기분이 좋았다. 몇 달 전에는 리네아가 농담을 시작하면 대답도 제대로 못 했다. 사람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상대가 어떤 말에 기뻐하는지 조금씩 알아 가는 일이었다.
마차가 언덕을 넘자 호수가 보였다. 물은 거울처럼 잔잔하지 않았다. 북부 산맥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표면에 잔물결을 만들고, 그 위로 아침 햇살이 길게 부서졌다. 물가에는 붉은 지붕의 작은 집들이 모여 있었다.
리네아는 태오의 손을 잡았다.
“기록방 생각 안 나요?”
“조금 납니다.”
“얼마나요?”
“가게 잠금장치를 제대로 확인했나 정도요.”
“그건 저도 걱정했어요.”
“그럼 우리 둘 다 좋은 여행 동료네요.”
***
호숫가 여관 주인은 키가 작은 반인족 노파였다. 그녀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커다란 장부를 펼쳤다.
“하룻밤 숙박과 작은 보트 대여를 예약하셨죠?”
태오가 대답하려는 순간 리네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번엔 제가 확인할게요.”
“네.”
“침구 추가 요금은 없고, 조식은 따로 선택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바람이 세서 보트를 못 타면 대여료는 어떻게 처리되나요?”
여관 주인이 웃었다.
“계약서 읽는 커플은 처음 보네요. 두 분 다 상인이세요?”
“저는 부동산 중개인이고, 이 사람은 기록방을 운영해요.”
“그럼 놀러 온 게 아니라 감사를 나왔겠구먼.”
태오는 부끄러워 웃었다. 그러나 리네아는 태연했다.
“놀러 와서 불필요한 다툼을 만들지 않으려고요.”
그 말에 노파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좋은 손님들이네. 그럼 여기 바람 경고문도 꼭 읽어 보세요.”
태오는 그 종이를 읽으면서 휴가에까지 종이가 따라온다는 사실이 재미있어졌다. 이번에는 억울해서 읽는 게 아니었다. 안전하게 놀기 위해 필요한 내용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짐을 놓고 밖으로 나오자 물가에서는 작은 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말린 물고기, 은빛 조개껍데기, 산딸기 파이, 나무를 깎은 장난감이 늘어섰다.
리네아가 조개 모양 목걸이를 들었다.
“어때요?”
“잘 어울려요.”
“그냥 모든 걸 잘 어울린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저것보다 이쪽이요.”
태오는 푸른 돌이 박힌 작은 펜던트를 골랐다. 리네아의 귀와 눈빛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상인이 가격을 말하자 태오는 잠시 계산했다. 기록방 수익으로 충분히 살 수 있는 물건이었다. 예전이라면 보증금으로 돌려받은 금화를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
“이건 제가 선물해도 됩니까?”
“왜 허락을 받아요?”
“당신이 고르는 물건이니까요.”
리네아가 작은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태오에게 건넸다.
“그럼 직접 걸어 줘요.”
태오는 그녀의 뒤로 돌아갔다.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걷자 뾰족한 귀 끝이 햇빛 속에서 붉어졌다. 작은 걸쇠가 생각보다 미끄러웠다.
“떨려요?” 리네아가 물었다.
“손이요?”
“네.”
“그럴 수밖에 없죠.”
“왜요?”
“당신한테 뭔가 해 주는 일은 잘하고 싶으니까요.”
리네아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목걸이가 걸리자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
낮에는 작은 보트를 탔다. 노를 젓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태오가 오른쪽만 세게 젓자 배가 계속 같은 방향으로 돌았다.
“혹시 지금 제자리를 조사하고 있는 건가요?” 리네아가 물었다.
“물살이 복잡해서요.”
“어째 익숙한 설명인데요.”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리네아가 두 노의 박자를 알려 줬다. 태오는 몇 번 실수한 끝에 가까스로 배를 앞으로 보냈다. 호수 한가운데에 다다르자 마을의 소리가 멀어졌다. 물가의 작은 건물들이 장난감처럼 보였다.
“이렇게 조용한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태오가 말했다.
“당신도 조용히 있는 줄 아는군요.”
“오늘은 아무도 제 명의로 신청서를 안 냈으니까요.”
“또 서류 얘기.”
“죄송합니다.”
그녀는 웃으며 노를 내려놓게 했다. 배가 물 위에서 잠시 떠다녔다. 리네아는 그를 바라봤다.
“태오 씨,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뭐든요.”
“돈을 다 돌려받으면 떠날 수도 있었잖아요. 다른 도시나, 원래 살던 곳을 찾는 길로.”
태오는 물속에 비친 하늘을 바라봤다. 한국에서 살던 시절이 문득 선명해졌다. 편의점 간판, 버스 정류장, 늦은 야근 뒤에 먹던 김치찌개. 여기에 오기 전의 삶은 없어지지 않았다.
“가끔 그리워요. 지금도요.”
리네아는 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여기를 떠나고 싶은 건 아니에요. 돌아갈 길이 있다고 해도, 누구와 무엇을 남겨 둘지 고민할 것 같아요.”
“저 때문이에요?”
“당신도 크죠.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에요. 제 일이 생겼고, 친구들도 생겼으니까.”
그녀는 안도한 듯 미소 지었다.
“다행이네요.”
“왜요?”
“당신이 저 한 사람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한다면 언젠가 후회할까 봐요.”
태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을 만나고 제가 얻은 게 많은데, 그걸 포기라고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리네아는 한참 그를 보았다. 물결 소리만 들렸다. 그녀가 몸을 기울이자 태오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배가 흔들리지 않게 서로 붙잡고 짧게 입을 맞췄다.
그 순간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어, 잠깐!”
배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태오는 반사적으로 노를 잡다가 물을 잔뜩 뒤집어썼다. 리네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호수가 질투했나 봐요.”
“호수도 세입자인가요?”
“그 말은 금지!”
***
***
호수 마을에는 오후마다 한 번씩 작은 종이 울렸다. 태오는 그 소리가 선박 운행을 알리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관 주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이들이 호수의 바람 방향을 배울 시간이라는 뜻이오.”
“바람 방향을요?”
“이 호수에서는 바람을 거스르다 배가 엎어지는 일이 많지. 그래서 어릴 때부터 징표를 보는 법을 가르친다오.”
태오는 낮에 노를 젓다 헤맸던 기억을 떠올렸다. 리네아가 슬쩍 그의 팔을 쳤다.
“당신도 수업을 들으면 좋겠어요.”
“성인 수강생도 받습니까?”
노파는 진지하게 답했다.
“나이를 가리지 않소. 다만 아이보다 못한다고 울지는 마시오.”
태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리네아와 함께 작은 부두로 내려갔다. 학생들은 물 위에 나뭇잎을 띄우고 잎이 움직이는 방향을 살폈다. 한 아이가 태오에게 나뭇잎 한 장을 건넸다.
“이걸 놓아 보세요.”
그는 조심스럽게 물 위에 내려놓았다. 잎은 처음에는 가만히 떠 있더니 서서히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리네아가 손끝으로 바람의 방향을 가리켰다.
“물살만 보는 게 아니라 바람도 봐야 해요. 둘이 다르게 움직일 때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제 제가 원을 그렸군요.”
“그건 노를 한쪽만 저어서 그래요.”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태오도 같이 웃었다. 오랜만에 자신보다 어린 학생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일이 부끄럽지 않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던 노선장은 예전에 호수의 가장자리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당시 무작정 움직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호숫가의 바람표식을 보고 되돌아올 수 있었다.
“길을 찾는다는 건 무조건 앞으로 가는 게 아니오. 지금 어디에 있는지 먼저 알아야 해.”
태오는 그 말을 마음속에 담았다. 몇 달 동안 자신도 자료를 찾아 이곳저곳 달려다녔다. 길을 잃지 않은 건 가끔 멈춰서 무엇을 실제로 확인했는지 적었기 때문이었다.
리네아는 그의 표정을 보고 속삭였다.
“또 기록방 생각?”
“조금요.”
“수업 내용에 집중해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
부두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작은 공연을 보았다. 두 명의 거리 마술사가 공중에 물방울을 띄워 여러 모양으로 만들었다. 물방울은 잠시 용의 형상을 하더니 곧 커다란 오리로 변했다.
“용은 저렇게 귀엽지 않아요.” 태오가 말했다.
리네아가 웃었다.
“발카스 님한테 그 말씀 해 볼래요?”
“아니요. 제 돈을 다 받았다고 목숨까지 여유로운 건 아닙니다.”
마술사 중 한 명이 관객을 불렀다. 리네아가 태오를 앞으로 밀었다. 그는 주저하다 손을 내밀었다. 마술사는 그의 손바닥에 작은 물방울을 올리고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물방울은 순식간에 붉은 꽃 모양이 되었다.
“옆에 계신 분에게 드리세요.”
태오는 리네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꽃을 받으려는 순간 물방울은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리네아가 놀라자 태오는 빈 손바닥을 바라봤다.
“사라졌네요.”
“그래도 예뻤어요.”
“물건은 남지 않았는데요.”
“남는 게 꼭 물건뿐은 아니잖아요.”
그녀는 그의 손바닥에 자기 손을 포갰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증금 장부는 정확하게 보존해야 했지만, 오늘의 꽃은 잠깐 있었던 것으로도 충분했다.
저녁에는 여관 마당에서 주민들이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노인은 현악기를 켰고 젊은 어부는 북을 두드렸다. 아이들이 춤을 추는 동안 태오와 리네아는 따뜻한 생선 수프를 나눠 먹었다.
여관 주인이 옆에 앉아 물었다.
“두 분은 결혼할 사이요?”
태오가 수프를 삼키다 기침을 했다.
리네아가 먼저 대답했다.
“아직 그런 이야기를 정식으로 하진 않았어요.”
“아직이라고?” 노파가 눈을 가늘게 떴다.
리네아가 얼굴을 붉혔다.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노파는 흐뭇하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태오는 물잔을 내려놓았다.
“저 질문은 예상 못 했습니다.”
“저도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리네아가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렸다.
“이런 얘기를 갑자기 물으면 제가 뭐라고 해요.”
“답을 지금 당장 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우리가 함께 오래 살아갈 수 있을지, 언젠가 천천히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제 일도 당신 일도 있으니까.”
“좋습니다.”
“그게 끝이에요?”
“진지하게 대답하려면 제대로 생각해야죠.”
리네아는 그 답이 마음에 든 듯 웃었다.
“이번엔 계약서 없이 이야기해요.”
“네. 대신 거짓말도 없이요.”
그들은 손을 맞잡았다. 태오는 오래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세계에서,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사람과 내일을 함께 계획할 수 있다는 게 기적 같다고 생각했다.
***
밤에는 여관 지붕 위로 별이 쏟아졌다. 태오는 창문을 열어 두고 작은 책상에 앉았다. 여행 중에는 기록방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장부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흰 종이 한 장에 오늘 본 풍경을 적었다. 리네아의 목걸이, 물 위의 햇살, 돌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보트, 여관 노파의 직설적인 질문.
“뭐 적어요?”
리네아가 다가와 물었다.
“우리 여행이요.”
“증거 보존?”
“추억 보존.”
그녀는 종이를 읽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노 젓기 실력: 개선 필요. 리네아의 웃음: 예상보다 강력함.]
“이건 너무 주관적인 평가인데요.”
“당사자 의견을 추가하시겠습니까?”
리네아는 펜을 받아 아래에 적었다.
[김태오: 물에는 약하지만 마음에는 강함.]
태오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음에도 또 오고 싶어요.”
“저도요.”
“다음엔 노 젓기 연습하고 오세요.”
“그건 약속드리죠.”
그날 밤 두 사람은 왕실 기록국도, 계정 47도, BG-17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세상은 그들이 잠든 사이에도 복잡하게 돌아가겠지만, 적어도 이틀 동안 그 복잡함이 두 사람의 시간을 모두 가져가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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