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오는 장부를 세 번 펼쳤다가 세 번 덮었다.
[보증금 원금 300금화. 반환 300금화. 미반환 0금화.]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굳이 세 번째까지 펼쳐 볼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침 햇살이 창틀에 닿을 때까지 그 줄을 보고 있었다. 몇 달 동안 거의 모든 아침에 마지막 칸에 숫자를 적어야 했던 사람에게, 영이라는 숫자는 의외로 낯설었다.
“새벽부터 왜 그렇게 엄숙한 표정이에요?”
리네아가 기록방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녀는 빵을 담은 바구니와 파란색 리본이 달린 작은 봉투를 들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피로가 조금 남은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밝았다.
“오늘은 누구를 고소하려고요?”
“고소할 사람 없습니다.”
“그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이네요.”
“뭡니까?”
“당신이 심심해지는 거요.”
태오는 장부를 내밀었다.
“정확히 0금화입니다. 저는 이제 저 집주인에게 반환받을 보증금 원금이 없어요.”
“축하해요. 그렇다고 발카스 님과 점심 약속을 잡을 필요는 없어요.”
“어떻게 아셨죠?”
리네아가 바구니를 내려놓다 말고 그를 노려보았다.
“설마요.”
“농담입니다.”
그녀는 안심하면서도 웃었다. 태오는 그제야 바구니 아래 깔린 여행 안내서를 발견했다. 북부 호수의 유람선 시간표였다.
“이번 주 둘째 쉬는 날에 출발해요.” 리네아가 말했다. “고객 상담은 다른 중개인에게 인계했고, 당신 작업장에도 예약을 비워 두라고 부탁했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가방에서 왕실 기록국 서식이 보여요?”
태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여행 준비물 목록 맨 위에 ‘필요 시 기록국 민원 접수’를 적어 둔 것이 들킨 것이다.
“그건 비상 상황을 대비한…”
“호수에서 거대 문어가 보증금을 떼먹으면 그때 쓰세요.”
“거대 문어도 임대업을 합니까?”
“당신 곁에선 무슨 일이든 가능해 보여요.”
***
여유로운 아침은 문밖에서 들려온 두 번의 노크로 끝났다. 소피였다. 그녀는 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 곧바로 달려온 듯 숨이 약간 찼다. 손에는 왕실 제6기록실의 봉함 통지서가 들려 있었다.
“태오 씨, 당신 돈 다 받았다는 얘기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축하하러 온 건 맞는데,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소피는 앉기 전에 창가 커튼이 닫혔는지부터 살폈다. 태오는 그녀가 아이와 현재 주소를 공개하지 않길 원한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는 상담용 가림막을 닫고 기록방의 손님 출입 표지를 ‘상담 중’으로 돌렸다.
“제 이름이 아닌 번호로 제 이야기가 기록돼 있대요. 그런데 어디에 이의를 제기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내민 서류에는 긴 목록번호가 적혀 있었다. 제6기록실이 과거 BG-17 감시 결과를 별도 서고에서 찾기 위한 보존 위치를 확인했고, 해당 자료의 공개 범위 심사를 받는다는 통지였다.
“이 문서는 돈을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오가 말했다.
“알아요. 이제 그런 말에 기대하지 않기로 했어요.”
소피는 웃으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에 제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말이 정말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그걸 제 이름으로 확인하고 싶어요.”
태오는 자신의 영수증을 바라봤다. 그가 결국 돈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계약 당사자로서 직접 말하고, 직접 확인한 시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피에게 필요한 것은 대신 싸워 줄 영웅이 아니라 그 절차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신청서 정리와 필요한 문서 목록 작성입니다. 소피 씨의 서명과 공개 범위 결정은 소피 씨가 직접 하셔야 해요.”
“그게 좋아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제가 적고 싶어요.”
리네아는 한 발 뒤에서 상담을 지켜봤다. 중개사로서 필요한 주거 계약 검토가 생기면 별도로 맡되, 태오의 작업장 수임과 섞지 않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연인이었지만 업무에서는 다른 책상, 다른 계약서, 다른 수수료표를 사용했다.
소피가 문서의 맨 아래를 가리켰다.
“이 숫자가 새로운 거예요?”
[공익감시 결과 별도 보관 예정자료 / 서고 6-H / 목록 확인 완료.]
태오는 잠시 말을 멈췄다. 150화 마지막에 확인된 것은 막연한 목록이었다. 오늘은 해당 목록의 관할 서고 표기가 공식 안내에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렇다고 실제 봉함자료가 존재한다거나 소피의 발언이 담겼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제 적어도 담당 기관을 찾았습니다. 다만 실물과 내용은 허가 후에 확인해야 해요.”
“그럼 오늘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요.”
그 말이 태오를 움직였다.
***
정오에 태오는 제6기록실로 향했다. 리네아는 다른 고객의 계약 점검이 있어서 먼저 사무실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오늘 저녁에 함께 식사하기로 약속했다. 예전 같으면 서류가 생겼다는 이유로 저녁을 미뤘겠지만, 이제 태오는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먼저 계산했다.
기록실에서는 세딘과 새 서고 담당관 이르마 솔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르마는 짧게 자른 은빛 머리에 작은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서고 열쇠를 세 개나 차고 다녔지만, 열쇠를 흔들며 권위를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6-H는 기록실의 여섯 번째 방이 아닙니다.” 이르마가 말했다.
태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사실 그는 여섯 번째 방을 찾으러 왔다.
“그러면요?”
“감시 결과가 확정되기 전에 전달처를 확인해야 하는 문서 묶음을 모아 두는 분류 서고입니다. H는 현물 보관 방식의 표식이고 숫자는 관리 계열입니다.”
“그곳에 BG-17 기록이 있습니까?”
“목록은 있습니다. 어떤 실물이 있는지는 보관 점검표를 더 확인해야 합니다.”
세딘이 한 장의 지도를 꺼냈다. 동그란 도형 옆에 ‘표목 보존’, ‘임시 봉함’, ‘타 기관 보관’이라는 세 상태가 각각 다른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것들을 합쳐서 전부 수령했다고 기록하면 문제가 생기겠군요.” 태오가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 새 대조를 하는 겁니다.” 이르마가 답했다.
태오는 서고의 구조를 보며 놀랐다. 원래의 문제가 수취인에게 도착했는지 알 수 없는 통지서였는데, 그 결과를 확인하는 자료마저 어디에 있는지 불분명했다. 하지만 이제는 미확인 상태가 그냥 구두 설명이 아니라 분류표에 따로 표시되어 있었다.
“열람을 신청할 수 있나요?”
“관련성이 입증된 이해관계자별로 제한됩니다. 공동 신청은 가능해도 타인의 신원과 건강 정보까지 보는 것은 안 됩니다.”
“저는 보증금 원금은 전액 반환받았습니다. 그게 오히려 제 신청 자격에 영향을 줄까요?”
이르마는 태오를 바라봤다.
“당신 개인 원금이 끝났다고 해서 과거에 제출한 본인 자료 확인까지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권리를 대표하는 건 또 다른 문제지요.”
그녀는 소피가 직접 제출할 수 있는 별도 신청서와 태오가 작성한 표목 검색 보조 신청을 구분해 주었다. 태오는 오랜만에 누군가의 설명을 듣는 편이 훨씬 편하다고 느꼈다.
***
기록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태오는 발카스를 만났다. 드래곤은 인간 모습으로 과일가게 앞에 서 있었다. 커다란 몸집 대신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있다는 사실이 유난히 낯설었다.
“수금하러 왔느냐?” 발카스가 물었다.
“이제 받을 원금은 없습니다.”
“그럼 왜 나를 보자마자 장부를 꺼내는 것이냐?”
“습관입니다.”
발카스는 아주 조금 웃었다.
“인간은 돈을 다 받고도 원망할 수 있느냐?”
태오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원망과 돈은 꼭 같은 날 끝나지 않겠죠. 다만 저는 이제 제 시간을 어디에 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을 다른 세입자에게 쓰려는가?”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요. 소피 씨가 직접 하려는 일을 돕는 겁니다.”
발카스가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안에는 작은 배와 붉은 과실이 가득했다.
“나도 그 사람의 개별 반환 계획을 바렌에게 다시 살펴보라고 했다.”
“실제 돈이 준비되면 알려 주세요. 약속은 지급이 아니니까요.”
“이제는 네가 그 말을 하지 않아도 안다.”
“드래곤 님이 아시는 건 알겠습니다. 그래도 기록은 해야죠.”
“네 입은 보증금을 돌려준 후에도 닫히질 않는군.”
“제 사업이 기록방이라서요.”
두 사람은 짧게 웃었다. 발카스가 과일 하나를 건넸지만 태오는 그것이 반환액으로 기록되지 않는다는 농담을 하지 않았다. 이미 끝난 농담은 적당한 자리에서 놓아줄 필요가 있었다.
***
***
기록방에는 그날 오후 새 고객도 찾아왔다. 동문 거리에서 의자를 만드는 작은 목공소 주인 키렌이었다. 그는 손에 종이 두 장을 들고 왔다. 한 장에는 배송을 마쳤다는 기록이 있었고 다른 한 장에는 아직 받지 못한 대금이 적혀 있었다.
“이걸 둘 다 같은 장부에 넣어도 됩니까?”
“같은 거래로 연결할 수는 있지만, 배송 완료와 대금 수령은 분리해서 적는 게 좋겠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키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앉은 의자는 놀랍게도 자기 목공소에서 만든 물건이었다. 태오는 그 사실을 알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의자는 괜찮습니까?” 키렌이 물었다.
“아주 튼튼합니다.”
“발카스 님도 쓸 수 있을까요?”
태오는 잠시 생각했다.
“그분은 좀 더 큰 제품이 필요할 겁니다. 화내실 때는 특히요.”
두 사람은 웃었다. 키렌은 납품 날짜를 표시하다 말고 태오에게 물었다.
“사장님도 처음부터 이렇게 장부를 잘 썼습니까?”
“아닙니다. 제 돈을 돌려받는 방법을 찾느라 배웠죠.”
“그럼 공부한 값은 돌려받았네요.”
“그런 셈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 다른 걸 할 수도 있었겠죠.”
키렌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예전엔 거래처에 돈 달라는 말을 못 했어요. 가구를 만들고 끝내면 되는 줄 알았죠. 그런데 월말이 되면 나무값을 낼 돈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지금부터는 적으시는군요.”
“네. 다음 달 나무값을 미리 생각해야 하니까요.”
태오는 그에게 약속된 납품일과 실제 납품일, 수금 예정일을 구분한 간단한 표를 만들어 주었다. 키렌은 표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복잡한 일을 해결하는 방법이 늘 법정과 금고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태오도 기분이 좋아졌다.
키렌이 수수료를 내자 태오는 사업용 장부를 펼쳤다. 지급받은 자신의 옛 보증금과는 다른 페이지였다. 그는 마침내 이 구분을 의식하지 않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
그 뒤 태오는 기록방의 문 앞에 작은 안내문을 붙였다.
[자료 정리 및 기록 확인은 도와드립니다. 계약 당사자의 의사와 법적 권한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렵게 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문장을 조금 바꿨다.
[서류를 읽고 정리해 드립니다. 결정은 본인이 하세요.]
로벤이 지나가다 안내문을 보고 말했다.
“아주 좋군. 내가 무슨 결정을 했다고 자네가 대신 적지 않겠다는 거지?”
“네.”
“그럼 내 운송일지는 또 가져와도 되겠나?”
“그건 정식 의뢰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로벤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돈 받아야 하는 사장 다 됐구먼.”
태오도 웃었다. 받지 못한 자기 돈을 찾던 사무실에서, 이제 다른 사람의 기록을 정당한 대가로 돌보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그날 저녁 태오는 리네아와 강변 식당에서 만났다. 그는 낮에 확인한 내용을 간단히 설명한 다음 수첩을 덮었다.
“오늘은 일 얘기 여기까지.”
리네아가 눈을 크게 떴다.
“당신 맞아요?”
“네. 남은 일은 내일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가 할 얘기가 있어요.”
그녀는 여행 예약증을 내밀었다. 북부 호수행 작은 배 두 자리와 숙소 한 방이 잡혀 있었다.
“일부러 옆자리로 예약했어요.”
“어차피 같이 가는데요?”
“모르는 척하면서 옆자리 손님에게 말을 걸려고 했죠.”
“그럼 저도 모르는 척할 겁니다.”
“뭐라고요?”
“이렇게 예쁜 분이 옆에 앉아도 됩니까, 하고.”
리네아가 물잔을 들다 말고 웃었다.
“당신, 방금 제게 처음 만난 척한 거예요?”
“연습할 기회가 많지 않잖아요.”
그녀는 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저녁이 끝날 무렵 이르마에게서 답신이 왔다. 소피의 독립 신청은 접수됐고, 태오의 표목 대조 요청에는 ‘제한 범위 검토’ 표시가 붙어 있었다. 그 아래 작은 문장이 더 있었다.
[6-H 보존목록 중 1건에 대해 현물 소재 대조 완료. 문건 제목은 추가 열람 허가 전 공개 보류.]
태오는 휴대용 수첩에 사실만 적었다.
[서고 6-H 실물 하나 존재 확인. 내용 모름. 소피 신청 접수, 승인 아님. 내 원금 잔액 0.]
그리고 리네아가 그를 바라보는 것을 느끼자 수첩을 닫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라면서요.”
“정말 여기까지입니다.”
“좋아요. 그럼 내일 아침엔 여행 짐부터 싸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자기 이름을 대신 사용했던 긴 밤을 지나, 이제는 자신이 정한 일정에 맞춰 사는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제15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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