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오가 새벽에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여행 가방도, 마차 시간표도 아니었다.
기록방 서랍이 제대로 잠겼는지였다.
“네 번이나 확인했어요.” 뒤에서 리네아가 말했다.
“세 번입니다.”
“첫 번째는 제가 봤고, 두 번째는 토른 씨가 봤고, 세 번째는 당신이 봤고, 방금 네 번째였어요.”
태오는 잠금쇠에서 손을 뗐다. 검은 비늘 47-B는 보관함 안에 있었다. 그 비늘이 금고를 여는 열쇠가 아니라 단지 조회를 요청하는 표식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뒤에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좋습니다. 이제 갑시다.”
“바다보다 서랍이 더 보고 싶으시면 혼자 돌아오셔도 돼요.”
“바다가 보고 싶습니다.”
“정말요?”
“당신이 바다에 있는 모습이요.”
리네아의 귀 끝이 붉어졌다. 그녀는 작은 여행 가방으로 그의 허리를 툭 쳤다.
“출발 전부터 그런 말을 하면 돌아오는 길에는 뭘 하려고요?”
“그건 현장에 가서 생각하겠습니다.”
파벨 동쪽 역참에는 이미 바닷바람을 맞으러 가는 여행객들이 모여 있었다. 태오는 제일 저렴한 좌석 두 장을 예약해 두었고, 리네아는 창가 자리를 하나 골라 그에게 양보했다. 태오가 사양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이세계에 와서 산이랑 창고랑 드래곤만 봤잖아요. 바다는 제가 먼저 여러 번 봤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제 관광 목록이 심각하군요.”
“명소 첫째, 돌려주지 않는 집주인.”
“둘째, 왕실 접수 창구.”
“셋째, 폐업한 환전소.”
둘은 서로를 보고 웃었다. 마차가 움직이자 도시의 회색 지붕이 뒤로 밀려났다. 채소밭과 낮은 언덕, 햇빛에 반짝이는 얕은 강을 지나며 태오는 한동안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리네아는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변하는 것을 도와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매번 변했다고 칭찬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
밀물항에 도착했을 때, 태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푸른 빛이 도시의 어떤 광장보다 넓었다. 바람은 짠 냄새를 실어 왔고, 갈매기를 닮은 흰 날개 달린 마수들이 부둣가에서 어부의 간식을 노렸다.
“생각보다 훨씬 크네요.”
“바다를요?”
“사람들이 이렇게 큰 물을 보면서도 땅값 이야기를 안 하는 게 신기합니다.”
“조금 전에 부두 사용료 내는 사람 봤잖아요.”
“그건 시설 사용료죠. 물의 주인은 아닙니다.”
리네아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태오는 그 손을 잡았다. 익숙한 손이었지만 풍경이 달라지니 느낌도 조금 달랐다.
숙소는 항구 뒷골목의 '파도와 빵'이라는 작은 여관이었다. 여관 주인은 턱수염을 땋아 묶은 중년 여성이었다. 리네아가 예약 확인표를 내밀자 주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침대는 하나인데 괜찮겠어요?”
태오가 마른기침을 했다. 리네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예약할 때 확인했습니다.”
“저도 예약 내역을 읽었습니다.” 태오가 서둘러 덧붙였다.
주인이 피식 웃었다.
“읽으셨다면 왜 그렇게 놀라죠?”
리네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게요. 서류 전문가가.”
태오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방은 깨끗했다. 창문을 열면 먼바다의 하얀 포말이 보였다. 한쪽에는 여벌 이불이 두껍게 접혀 있었다. 리네아가 이불을 꺼내려는 태오의 손을 잡았다.
“아직 낮이에요.”
“그러니까 정리해 두려고요.”
“정말 당신답네요.”
그녀는 웃으며 그를 창가로 데려갔다.
“오늘은 저기부터 봅시다.”
어깨 너머로 바다가 펼쳐졌다. 태오는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풍경 앞에서는 숫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
해변 시장은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소금에 절인 생선과 푸른 조개, 반짝이는 유리병에 담긴 작은 바람 정령이 진열대에 놓여 있었다. 어느 노인은 여행객에게 모래사장 한 줌이 든 병을 팔면서 '용의 눈물'이라고 외쳤다.
태오는 병을 들여다봤다.
“이건 그냥 모래 아닙니까?”
“용이 울면 모래가 되는 법이지!” 노인이 우겼다.
리네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발카스 님이 들으면 반박하겠네요.”
“그분은 울기 전에 세금을 계산할 겁니다.”
노인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씩 웃었다. 태오는 병을 내려놓고 대신 진짜 조개 목걸이 하나를 골랐다. 반짝이는 푸른 조각이 들어간 단순한 물건이었다.
“리네아, 이거 괜찮습니까?”
“어머. 저 주는 거예요?”
“네. 큰 의미는 없습니다. 바다가 생각날 것 같아서요.”
“큰 의미가 없는데 왜 귀까지 빨개졌어요?”
태오는 대답 대신 값을 치렀다. 리네아는 목걸이를 목에 대 보고 거울을 보더니 잠깐 조용해졌다.
“좋아요.”
“마음에 듭니까?”
“당신이 오늘 처음 산 게 계약서가 아니라 이거라서.”
그녀는 태오에게 살짝 입을 맞췄다. 시장 상인이 박수를 치자 태오는 그제야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경료 받으실 건 아니죠?”
상인은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
오후에는 파도가 밀려오는 낮은 암초 지대로 걸어갔다. 리네아가 신발을 벗자 태오도 따라 했다. 젖은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어딘가에서 아이들이 모래성을 짓고 있었고, 수평선 근처에는 조그마한 어선들이 점처럼 떠 있었다.
“여기에서는 아무 서류도 안 쓰나요?” 태오가 물었다.
“서류가 필요 없는 것까지 억지로 안 쓰면 돼요.”
리네아는 얕은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손짓했다.
“와 봐요.”
태오는 한 발을 들여놓았다. 물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그녀는 두 걸음 물러났다가 갑자기 손으로 물을 튀겼다.
“아!”
“방어해 봐요, 세입자 씨.”
“그건 불공정 공격입니다.”
“어느 규칙에요?”
“지금 만들겠습니다.”
그는 양손으로 물을 떠서 조심스럽게 되돌려 보냈다. 리네아는 깔깔 웃으며 물러나다가 돌에 발이 걸렸다. 태오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괜찮아요?”
그녀는 그의 팔을 붙잡고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괜찮아요. 그런데…”
“그런데요?”
“놓아 달라고 하기 전엔 조금만 더 안고 있어요.”
태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를 안았다.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 순간 어디선가 갈매기 마수가 크게 울었고,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
해가 낮아질 무렵 바닷물이 예정보다 빨리 들어왔다. 작은 암초 뒤에서 놀던 아이 둘이 물길 때문에 돌아오지 못했다. 태오는 아이들이 당황해 서 있는 모습을 먼저 발견했다.
“리네아!”
그녀가 돌아보자 그는 낮은 지대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을 가리켰다. 리네아는 높은 곳에서 길을 살폈고, 근처의 어부가 얕은 수로를 건너는 작은 배를 몰고 왔다.
태오는 무턱대고 물로 뛰어들지 않았다. 낯선 바다에서 수영 실력을 과신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아이들이 겁먹지 않도록 말을 건넸다.
“저기 큰 바위 보이니? 그 위에서 잠깐 기다려. 배가 가고 있어!”
큰아이가 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리네아는 엘프 특유의 밝은 소리로 아이들이 알아들을 만한 짧은 노래를 불렀다. 밀물에 밀린 바닷물 사이로 어부의 배가 다가가 아이들을 태웠다.
아이들 부모가 달려와 품에 안았다. 태오는 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네요.”
“뛰어들 생각하지 않아서 다행이었어요.” 리네아가 말했다.
“이젠 위험할 때 뭘 모르는지도 조금은 압니다.”
근처 어부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치며 위치 알려 준 덕에 길을 빨리 찾았소.”
“제가 한 건 그뿐입니다.”
“그게 필요했지.”
태오는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일을 해결하는 사람이 꼭 배를 직접 몰거나 용을 물리쳐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
저녁 식당에서는 생선 구이와 따뜻한 조개 수프가 나왔다. 태오는 기록방에서 오는 긴급 연락을 받아 줄 대리 담당자에게 미리 상황을 맡겨 두었고, 실제로 그날 연락은 한 통도 없었다.
“신기하네요.” 태오가 중얼거렸다.
“뭐가요?”
“제가 자리를 비워도 세상이 안 무너지는군요.”
“가끔은 그렇게 살아야죠.”
리네아는 수프를 한 숟갈 떠 먹었다.
“아까 아이들 무서웠겠어요.”
“네. 저도 처음 이세계에 왔을 때 길을 몰랐거든요.”
“그때는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있었죠. 나중에 그 사람에게도 제대로 인사를 못 했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 파벨 거리에 도착했을 때 밥값을 빌려 준 노점상, 숙소를 소개해 준 여관 직원, 그리고 자신이 살 집을 찾아 준 엘프 중개인이 있었다. 그 가운데 누군가는 잘못된 설명을 했지만, 그것이 사람 전체를 지우지는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가면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할 사람이 있네요.”
리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서 하면 되죠. 오늘은 수프부터 먹고요.”
***
밀물항의 저녁 무렵에는 작은 등불 축제가 열렸다. 먼바다로 나간 배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오래된 풍습이었다. 부둣가에 모인 사람들은 얇은 유리등에 불빛을 넣고, 각자 소중한 사람의 이름을 속삭였다.
“우리도 하나 띄울까요?” 리네아가 물었다.
태오는 등불 판매대를 살폈다. 판매대 앞에는 '바다에 흘려보내지 말고 지정된 수거망에 걸어 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환경을 해치지 않도록 등불을 회수하는 방식이었다.
“의외로 잘 관리되는 축제군요.”
“또 규정부터 보셨어요?”
“바다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되니까요.”
리네아는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작은 등불을 하나 골랐다. 태오는 안에 들어 있는 마법 촛불이 물에 닿아도 꺼지지 않는다는 설명을 듣고 호기심에 들여다봤다.
“이건 소원이 이루어지는 물건입니까?”
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소원을 기억하는 물건이지. 소원을 대신 이루어 주진 않아.”
태오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딱 좋군요.”
리네아가 작은 쪽지에 무엇인가 적었다. 태오는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안 보려고 하는 거예요?”
“당신 소원이니까요.”
“궁금하지 않아요?”
“많이 궁금합니다. 그래도 안 보겠습니다.”
태오는 자기 쪽지에 '함께 건강하게 오래 걷기'라고 썼다. 그가 가장 바랐던 것이 300금화였던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도 돈은 중요했지만, 돈만으로 원하는 삶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등불을 수거망 앞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빛이 잔잔한 파도에 흔들렸다.
“당신은 뭐라고 적었어요?” 리네아가 물었다.
“비밀입니다.”
“어머, 이제 비밀도 생겼어요?”
“고객 정보는 비밀 유지가 원칙입니다.”
“그럼 저는 당신 고객이에요?”
“그보다 훨씬 소중한 사람이죠.”
리네아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녀가 슬쩍 쪽지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누군가의 내일을 대신 결정하지 않기, 그리고 우리 내일은 함께 고르기'라고 적혀 있었다.
태오는 그 문장을 읽고 한참 말이 없었다. 리네아가 그를 올려다봤다.
“너무 진지했어요?”
“아니요. 지금까지 들은 어떤 말보다 좋아요.”
그들은 수거망에 걸린 등불들이 불빛을 모으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봤다. 저 멀리 배 한 척이 등대의 빛을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
여관으로 돌아오자 리네아는 새 목걸이를 풀어 작은 천 위에 놓았다. 태오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바닷바람에 젖은 머리카락을 털었다.
“오늘 정말 좋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저도요.”
“얼마나?”
“마흔 금화랑 비교하면 안 되겠죠?”
리네아는 눈을 크게 뜨더니 베개 하나를 집어 들었다. 태오는 재빨리 두 손을 들었다.
“농담입니다! 아주 좋았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은 금화 이야기를 하면 벌점을 줄 거예요.”
“벌점 누적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일 조개 줍기 담당.”
“그건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녀는 베개를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태오의 손을 잡아 창가로 끌어당겼다.
달빛이 바다 위에 긴 길을 만들고 있었다. 태오는 이 세계에서 보내는 밤이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서류를 읽거나, 돈을 계산하거나, 다음 날 누구에게 질문할지 적어 두는 밤. 그러나 오늘 밤은 달랐다.
“내일은 뭘 할까요?” 태오가 물었다.
“새벽의 등대를 보러 갈 거예요.”
“등대는 왜요?”
“바다에서 길을 잃은 사람에게 불빛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려고요.”
태오는 리네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녀가 기대 왔다. 바깥에서는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그날 그는 단 한 줄의 수납 대조표도 읽지 않았다. 그것이 여행의 첫 번째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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