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 금고상회의 간판은 황금색이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글자 아래 작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당신의 내일을 오늘의 현금으로.]
김태오는 그 문구를 읽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리네아가 물었다.
“어디가요?”
“제 내일은 집주인이 가져갔는데 여긴 오늘을 돈으로 준대요.”
“금고상회는 채권을 사들이는 곳이에요.”
“그럼 제 내일도 이미 저당 잡혔다는 뜻이겠군요.”
그들은 브라운에게 초대받아 상회를 찾았다. 며칠 전부터 집으로 제안서가 두 번이나 왔다. 처음에는 보증금 채권을 싸게 사겠다는 내용이었지만, 발카스가 준 검은 비늘의 번호가 47-B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금액이 달라졌다.
제안 금액은 금화 오백 닢이었다.
태오는 미지급 보증금 270금화보다 훨씬 큰 숫자를 보고 오히려 불안해졌다. 상인은 손해를 보기 위해 상인이 된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낡은 비늘 하나에 그런 돈을 주겠다면 이유가 있어야 했다.
브라운은 넓은 책상 앞에서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오십시오! 파벨에서 가장 유명한 세입자께서 직접 오시다니.”
“유명하다면 수수료 좀 깎아 주시죠.”
“하하!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농담 아니었는데.”
브라운의 웃음이 살짝 줄었다.
그는 은빛 쟁반에 작은 과자를 내놓았다. 리네아는 과자 하나를 집었지만 태오는 손대지 않았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당신이 가진 임대차 보증금 청구권과 증표 일체입니다. 저희가 책임지고 해결해 드리죠.”
“오백 닢을 지금 지급합니까?”
“계약 체결 후 영업일 기준 사흘 안에.”
“계약서부터 보겠습니다.”
브라운은 손짓했다. 비서가 두루마리 셋을 가져왔다. 태오는 첫 장을 펼친 뒤 속으로 탄식했다. 한 줄짜리 질문에 대답이 열두 페이지였다.
“여기 보시면 권리 양도 범위가 넓네요.”
태오가 한 조항을 가리켰다.
[양도인은 해당 계정과 연결된 모든 부수적 이익, 관리권 주장 및 장래 발생할 수 있는 확인 청구권을 포괄 양도한다.]
“장래 발생할 수 있는 확인 청구권이 뭡니까?”
“구매자의 안전을 위한 통상적 문구지요.”
“그럼 왜 제 미지급 보증금만 사지 않습니까?”
“증표가 함께 있어야 회수 절차가 원활합니다.”
“그 증표가 어떤 권리를 주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브라운은 잠깐 웃음을 멈췄다.
“시장에서 통용되는 접근 표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느 시장입니까?”
“계약상의 세부사항은…….”
“시장 이름을 알려 달라는 겁니다.”
브라운은 찻잔을 들었다. 태오는 차를 마시는 사람의 속도를 보면 그 사람이 시간을 벌고 있는지 조금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물론 자신도 회의에서 그 기술을 쓸 때가 많았다.
리네아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고객이 계약 대상을 특정하려는 건 자연스러운 절차예요. 증표를 사는 이유를 설명해 주셔야 하죠.”
브라운은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엘프 중개인께서는 요즘 길드에서 어려운 일을 겪으신다던데.”
리네아의 손끝이 멈췄다.
“제 자격 심사와 이 계약은 별개입니다.”
“물론이지요. 저는 단지 유능한 분의 장래가 걱정될 뿐입니다.”
태오는 접힌 계약서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제안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금화 오백 닢을요? 현금으로?”
“예. 아직 무엇을 파는지 모르니까요.”
브라운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이 이미 받아 간 삼십 닢과 이번 계약의 관계도 정리해야 할 겁니다.”
“미지급 금액은 270닢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500닢의 차액이 왜 생기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기회라는 것은 이유를 따지다 보면 사라집니다.”
태오는 웃었다.
“제 보증금도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이번에는 이유를 따져 보려고요.”
브라운은 계약서 한 장을 더 꺼냈다.
“자, 이렇게 하시면 어떻습니까? 현금 오백 닢 전액을 드리고, 이후 계정에서 얼마가 나오든 저희 책임으로 하죠.”
“그렇다면 이익도 상회에서 가져가겠군요.”
“사업은 원래 그런 겁니다.”
“그건 이해합니다. 다만 제가 무엇을 넘겨야 그만큼 이익이 생기는지 모르겠네요.”
브라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금고의 가치라는 건 안에 든 금화 수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관리권을 회수할 수 있는 협상 지위가 있겠지요. 특정한 기록에 접근할 수도 있고.”
태오는 그 말을 기억했다. 방금 전까지 브라운은 증표가 시장에서 통용되는 표식 정도라고 했었다. 지금은 관리권 협상까지 언급했다.
“그 협상 지위가 제게 있다고 확인되지는 않았잖아요.”
“가능성을 매입하는 사업입니다.”
“그럼 왜 가능성만 매입하고 결과는 공개하지 않으십니까?”
“전부 공개하면 사업을 할 수 없습니다.”
태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못할 내용은 아니었다. 상인이 자기 비밀을 지키는 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 비밀 때문에 고객이 팔아 버릴 권리를 알 수 없다면 계약은 달라졌다.
리네아가 옆에서 두 번째 두루마리를 넘겼다.
“여기에 양도인의 협조 의무가 있어요. '추가 인증에 필요한 진술과 서명을 제공한다'고 적혀 있네요.”
태오는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제 손으로 금고를 여는 데 협조하라는 겁니까?”
브라운은 손을 내저었다.
“필요할 경우에만요. 법적으로 허용되는 범위에서.”
“그 범위는 누가 판단합니까?”
“관계 기관이 정하겠지요.”
“그렇다면 먼저 기관의 의견을 듣는 게 순서겠네요.”
브라운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당신은 지금 확실한 금화 오백 닢을 불확실한 서류 때문에 미루고 있습니다.”
태오는 창밖을 바라봤다. 지금 그에게 500금화가 생기면 숙소를 구하고 일터를 다시 마련할 수 있었다. 로벤이나 소피를 도울 여유까지 생길지도 몰랐다.
그러나 계약서에는 '장래의 계정 연계 권리'를 모두 넘긴다고 되어 있었다. 그것이 다른 세입자들의 확인 절차와 얽히는 순간, 자신이 값을 매길 수 없는 일을 돈과 바꾸는 셈이 될 수 있었다.
“잠깐만 나가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브라운은 손짓했다.
태오와 리네아는 작은 회랑으로 나왔다. 창가에 장식된 화분마다 금화 모양의 잎이 달려 있었다.
“솔직히 어떻게 할까요?”
태오가 물었다.
리네아는 쉽게 답하지 않았다.
“태오 씨가 돈을 받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계약서가 넓어서 지금은 무엇을 포기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선택해 드릴 문제는 아니죠.”
“오백 닢이 얼마나 큰돈인지도 아시잖아요.”
“알죠. 그래서 더 꼼꼼하게 보고 싶은 거예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리고 돈 때문에 태오 씨가 자기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면, 나중에 많이 속상해할 것 같아요.”
태오는 벽에 기대어 섰다.
“저를 너무 잘 아시는 것 아닙니까?”
“아직 반도 모르는데요.”
리네아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태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지금은 계약서를 두고 머리가 복잡했다. 게다가 그녀의 대답까지 들으면 돌아가서 브라운과 협상할 자신이 사라질 것 같았다.
***
상회를 나오자 리네아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오백 닢을 거절하셨네요.”
“아깝죠.”
“전혀 안 아까운 표정은 아닌데요.”
“솔직히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 안 하셨어요?”
“빚을 해결하려고 집을 팔았는데 알고 보니 집 밑의 땅까지 팔았다는 이야기를 한국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비슷한 일은 많았죠. 사람은 급하면 작은 글씨를 못 봅니다.”
리네아는 잠시 태오를 보더니 말했다.
“작은 글씨를 보는 남자는 생각보다 드물어요.”
“왜요? 요즘 인기 있는 연애 조건입니까?”
“적어도 제가 아는 어떤 인간보다는 나아요.”
“누구요?”
“누구일까요?”
그녀가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태오는 따라가다가 생각했다. 계약서라면 작은 글씨까지 읽을 수 있는데 이런 대화는 아무리 살펴도 숨은 조항이 보이지 않았다.
길모퉁이를 돌자 낡은 모자를 쓴 남자가 기둥에서 몸을 떼었다. 그는 브라운의 상회 앞에서부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오는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남자도 늦췄다.
“혹시 저희를 따라오십니까?”
태오가 돌아서서 물었다.
남자는 잠시 당황했다.
“상회 손님인가 해서.”
“손님이면 상회에서 물어보셔야죠.”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갔다.
리네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붙잡을 증거는 없어요. 지금 할 수 있는 건 생김새와 시간을 기록하는 거겠죠.”
“태오 씨는 참 이상해요.”
“어느 부분이요?”
“무섭지 않은 척하지 않으면서도 할 일을 하잖아요.”
“무섭죠. 특히 대출이자가 무섭습니다.”
“그것 말고요.”
태오는 대답을 피했다. 사실 검은 산맥의 동굴보다 누군가 자신을 뒤쫓는 듯한 평범한 골목이 더 무서웠다. 동굴에서는 위험이 적어도 어떤 모습인지 보였다. 골목에서는 그조차 알 수 없었다.
***
토른은 상회 계약서를 보고 제일 먼저 화를 냈다.
“포괄 양도라고?”
“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말 그대로 전부 넘긴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뭘 전부 넘기는지 저놈도 정확히 모르거나, 너만 모르게 하려는 거야.”
토른은 낡은 설계도 위에 네모를 그렸다.
“주택조합 시절에는 출입 증표와 돈을 찾을 권리를 구분했어. 열쇠를 가진 사람이 돈의 주인이라는 보장이 없었지.”
“그럼 47-B를 가진 제가 금고에 접근할 수 있어도 돈은 못 찾을 수 있겠네요.”
“그래. 반대로 돈의 주인인데 접근 증표가 없을 수도 있어.”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습니까?”
“너 같은 사람이 납치되어 열쇠를 빼앗겨도 다른 세입자 돈을 함부로 못 가져가게 하려고.”
태오는 그 설명을 듣고 비늘을 더 깊이 가방에 넣었다.
“갑자기 설계자가 존경스러워지네요.”
“내 할아버지다.”
“특히 존경합니다.”
“참 말을 잘하는군.”
토른의 수염이 흔들렸다.
그는 오래된 장부 하나를 꺼냈다.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공방 기록의 사본이었다. 한 페이지에 세 개의 원이 겹친 도장이 있었다.
“이 표식이 그날 경고문에 찍힌 것과 비슷하지?”
태오가 비교하자 정말 닮아 있었다. 그러나 토른은 일부러 둘을 겹쳐 보였다. 바깥 고리의 틈이 서로 달랐다.
“같은 문양 계열이지만 동일한 금형은 아니야. 그러니 경고문 보낸 놈이 금고 관리인이라고 단정하지 마.”
“그럼 이건 누가 쓰던 표식입니까?”
“공동 보관 시설을 설계한 삼자 감시 위원회의 표시였어. 세 주체가 서로 확인한다는 뜻이지.”
“세 주체요?”
“보관 관리자, 원금에 권리가 있는 사람, 그리고 시설 감시를 맡은 제삼자. 다만 시대에 따라 절차가 바뀌었을 수 있어.”
태오는 메모했다. 지난번에 들은 두 단계 인증과 연결될 수 있는 단서였지만, 세 고리가 곧 세 개의 인증이라는 증거는 아직 없었다.
***
저녁 무렵에는 브라운의 편지가 다시 도착했다.
[매입 제안 유효기간을 이틀로 제한합니다. 이후 금액은 재산정됩니다.]
태오는 편지를 읽고 서랍에 넣었다.
리네아가 물었다.
“답장을 보내실 건가요?”
“예. 오백 닢이 왜 필요한지는 더 궁금해졌으니까요.”
그는 짧은 회신을 작성했다.
[제안 대상의 법적 범위와 대금 산정 기준을 서면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증표 원본은 이전하지 않겠습니다.]
리네아가 옆에서 읽었다.
“저라면 맨 아래 한 줄을 더 넣겠어요.”
“뭐라고요?”
“과자 맛있었습니다.”
태오가 그녀를 보았다.
“그걸 왜 넣습니까?”
“브라운 씨 얼굴을 떠올리면 재미있잖아요.”
태오는 한참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쓰지 않았다.
“안 됩니다. 저는 아직 저 사람한테서 답변을 받아야 해요.”
“세상에, 태오 씨도 농담을 참으실 수 있네요.”
“보증금이 달린 농담은 조심해야죠.”
그때 토른이 한 장을 더 내밀었다. 공방 기록의 가장자리를 확대해 옮긴 종이였다.
낡은 세 고리 문양 아래에 작은 번호가 적혀 있었다.
[47-A, 47-B, 47-C.]
태오는 비늘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이 가진 것은 가운데 번호였다.
누군가는 나머지 두 표식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브라운은 그 사실을 자신보다 먼저 알고 있는 듯했다.
제1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