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17 묶음의 목록을 읽기 위해 태오는 한 시간 동안 보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람이 앉아 있기에는 편했지만 드래곤에게는 다리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크기였다.
“이렇게 좁은 방에서 세계의 역사가 기록된다고?”
발카스가 문밖에서 물었다.
“문서 크기에 세계가 맞춰지진 않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나는 내 동굴에 서가를 만들겠다.”
“그 전에 습도부터 관리하십시오.”
토른이 그 말에 크게 웃었다. 그가 수리한 서쪽 창고의 침수 사건 이후, 발카스는 보관 안전에 관해 예전보다 더 오래 질문했다.
노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반 표제와 보증 목적 기재란만 제한 대조를 허가받았습니다. 개인 주소와 이름은 아직 공개할 수 없습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지워진 사본 위에는 세 줄이 남아 있었다.
[보증 내용: 수신인 확인 및 송달 과정에서 발생한 책임.]
[보증 대상: 개별 계약에 따른 확인 의무.]
[보증인: 별첨 확인 필요.]
태오는 마지막 줄을 오래 바라봤다. 누군가의 서명이 없다는 의미인지, 별도 종이에 있다는 뜻인지 이 문장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빈칸인 겁니까?”
“아직 별첨을 찾지 못했습니다. 빈칸처럼 보이는 건 복사본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노엘이 대답했다.
“보증서를 찾으면 돈을 줄 사람이 나타날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사람을 찾아야 하네요.”
토른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오늘은 돌벽을 깨지 않아도 되잖아.”
“돌벽에는 빈칸이 없습니다.”
“돌벽 안에는 뭘 숨겼는지 모르지.”
태오는 반박하지 못했다.
***
보증 계약에는 원금 보증과 절차 보증이 있었다. 이벨은 태오에게 두 경우를 비교한 예시를 보여 주었다. 첫 번째는 채무자가 못 갚으면 보증인이 일정한 금액을 지급한다는 약속이었다. 두 번째는 중요한 문서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아 손해가 나면 약정에 따라 책임을 진다는 약속이었다.
“후자의 경우에도 배상금이 나올 수는 있지만, 보증금 300금화를 그대로 대신 갚는다는 뜻은 아니군요.”
“맞습니다. 보증 범위와 한도, 손해와의 관계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럼 BG-17을 제 보증금 65금화의 즉시 지급처로 보면 안 되겠네요.”
“현재 자료로는 그렇습니다.”
태오는 반쯤 접힌 수첩을 펼쳤다. 처음에는 괴상한 종이와 열쇠로 금고를 열면 전세금이 쏟아질 거라 기대했다. 이제는 어느 서류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배우는 사람이 됐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아주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기대를 줄이는 대신 당장 밟을 수 있는 길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발카스는 따로 가져온 옛 장부를 내밀었다.
“내 대리인 기록에는 ‘보증서 확보 시 지급 문제 해결’이라고 쓰여 있다.”
이벨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 표현도 당시 담당자의 기대를 기록한 것인지, 법적 보증 범위를 적은 것인지 분리해야 합니다.”
드래곤은 잠시 침묵했다.
“인간의 기록은 왜 이렇게 말을 아끼느냐?”
“옛날엔 너무 많이 말해서 문제였잖습니까.” 태오가 끼어들었다.
발카스는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아주 작은 연기가 천장으로 올라갔다. 노엘이 곧바로 창문을 열었다.
“보존실에서는 화기 금지입니다.”
“내가 불을 낸 것이 아니다.”
“연기가 나면 저희는 먼저 조치합니다.”
드래곤은 그날 두 번째로 입을 다물었다.
***
늦은 오후에 노엘은 보관 목적란이 기록된 구 관리표를 가져왔다. 열람 가능한 구간에는 세 개의 단계가 있었다. 송달 의뢰, 수신인 확인, 분쟁 발생 시 증거 보전. 그러나 실제 누가 어느 단계에서 책임을 부담하는지는 계약별 별첨에 적혀 있을 가능성이 컸다.
“만약 이름이 없는 보증서가 보관되었다면요?” 태오가 물었다.
“초안일 수도 있고, 원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나중에 이름을 쓸 수도 있고요.”
디아나가 손을 들었다.
“그 가능성은 감정 전까지 가설로 두십시오. 잉크층과 작성 흔적을 확인하면 일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현재 아무도 이름을 바꿨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태오는 '뒤늦게 작성'이라고 쓰려다 '별첨 미확인'으로 고쳤다. 그렇게 한 줄을 고치는 데 몇 달이 걸렸지만, 지금의 그는 그것이 올바른 순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날 저녁 리네아의 사무실에서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젊은 부부였다. 임대인이 계약서에 보증인이 있다는 말을 했다며, 실제 보증인은 누구인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리네아는 그 말에 곧바로 태오를 부르지 않았다. 자신의 고객이고 자신이 책임지고 검토할 일이었다. 그녀는 임대인에게 표시된 보증 조건과 계약의 실제 담보 항목을 별도로 문의한 뒤 설명했다.
“보증인이 있다는 말만으로 보증금 전액이 안전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위험을 얼마나 책임지는지 꼭 확인하세요.”
태오는 문밖에서 그 말을 듣고 미소 지었다. 리네아는 드래곤 사건 덕분에 생긴 경험을 자기 일에 맞게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그 성과를 태오의 사건에 종속시키지 않았다.
손님들이 돌아간 뒤 그녀가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요?”
“제가 알던 중개인은 보증서를 믿기 전에 보증인을 확인하는 사람이었나 싶어서요.”
“아주 옛날부터 그랬죠.”
“그런가요?”
“제가 실수한 일도 있고 배운 일도 있잖아요. 둘 다 제 경력이에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도와주는 것과 그녀의 일을 대신 설명하는 것은 달랐다.
“오늘은 당신이 제 선생님이네요.”
“수강료 비쌉니다.”
“얼마죠?”
“저녁에 업무 이야기 금지.”
태오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굉장히 비싼데요.”
리네아는 웃으며 그를 끌어당겼다.
“싫어요?”
“지불하겠습니다.”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 했다가 그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 눌렀다.
“말로만 말고 행동으로요.”
태오는 곧장 장부를 닫았다. 리네아는 그 모습을 보고 승리한 듯 웃었다.
***
다음 날 아침 보관소에서 새 기록이 발견됐다. BG-17과 연결된 별첨의 제목은 보증인 성명표가 아니라 '보증 의무 수락 확인서'였다. 그러나 아직 실물의 보존 상태가 불확실해 제한 열람 허가가 필요했다.
노엘은 태오에게 안내했다.
“신청서에서 '보증인이 누구냐'만 묻지 마십시오. 그 서식이 실제로 작성·수락되었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태오는 접수 내용에 '서명 여부 및 수락 의사 확인'을 추가했다. 누군가 이름을 적어 놨다고 곧바로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었다.
복도에는 보관서가 손상돼 증명을 못 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이가 많은 여성은 가족에게 맡긴 물건의 분실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며 속상해했다. 태오는 잠시 이야기를 듣고 기록방에서 제공할 수 있는 일반적인 목록 정리 서비스를 설명했다. 그러나 보관기관의 판단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했다.
“선생도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시는군요.” 여성이 말했다.
“그게 제일 빠른 길일 때도 있습니다.”
여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
발카스는 오후에 자기 인장이 찍힌 오래된 거래명세 사본을 제출했다. 정확히 BG-17과 연결된 자료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내 자산관리실은 모든 보증을 내 이름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일부는 조합이 담당했다.”
“그렇다면 당시 조합이 지금도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모른다. 해산된 조합도 있을 테니까.”
“그럼 사람을 찾기 전에 조직이 남아 있는지부터 봐야겠네요.”
발카스는 인간의 재치가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맞는 말이라고 했다.
“그 보증서를 찾으면 네 돈을 빨리 줄 수 있느냐?”
태오는 잠시 발카스를 바라봤다.
“제 돈은 발카스 님이 갚으셔야죠. 보증서는 또 다른 책임의 범위를 밝히는 자료입니다.”
그 대답에 드래곤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래. 네가 옳다.”
“그렇게 쉽게 인정하시면 제가 당황합니다.”
“수천 년 동안 말다툼을 많이 했으니 이제 쉬어야지.”
바렌이 바로 끼어들었다.
“쉬시기 전에 다음 지급 재원을 확인해 주십시오.”
발카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태오는 오늘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
오래된 보관 서식의 이름란을 확인하기 전에 디아나는 한 가지 실험을 제안했다. 실제 사건 자료가 아니라 보존 교육에 사용하는 빈 서식을 가져와, 서로 다른 종류의 서명이 어떤 절차로 남는지 보여 주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신청인이 서명한다고 가정해 보죠.”
태오는 첫 번째 칸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이제 보관 신청이 성립한 겁니까?”
“서류를 작성한 단계입니다. 기관이 접수하고 수락했는지 여부는 다른 항목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녀는 두 번째 칸을 가리켰다. 수탁기관의 인수 확인란이었다.
“이 칸이 채워졌다면 서류의 물리적 보관이 시작됐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보증인이 지급 책임을 수락했다는 뜻은 아니죠.”
세 번째 칸은 별도의 약정 수락란이었다. 태오는 거기에도 장난삼아 서명하려다가 손을 멈췄다.
“이런 칸에는 아무렇게나 쓰면 안 되겠네요.”
“지금은 교육용입니다만, 실제 계약에서는 그 구별이 매우 중요합니다.”
발카스는 팔짱을 낀 채 지켜봤다.
“그럼 서명 칸이 많아질수록 인간이 더 안전해지는가?”
“그 자체로는 아닙니다. 제대로 설명받고 권한 있는 사람이 어떤 의사로 서명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드래곤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 재무관은 내 이름을 너무 자주 사용했을지도 모르겠군.”
“그 말도 가능성입니다. 실제 서식의 위임 범위를 검증해야 합니다.” 태오가 답했다.
발카스는 못마땅한 듯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돌아왔다.
“좋다. 교육을 계속해라.”
***
점심에는 보존실 문밖에서 작은 언쟁이 있었다. 보증서 한 장을 들고 온 젊은 상인이 자신이 보관료를 냈으니 그 서류에 적힌 상대방의 주소를 전부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직원은 개인정보와 계약상 열람 권한 때문에 제한된다고 설명했다.
“내 돈을 냈잖소!”
“보관료는 문서를 관리하는 비용입니다. 다른 사람의 정보를 무제한 열람하는 값을 뜻하지 않습니다.”
태오는 몇 달 전 자신이 발카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가를 통째로 산다고 해도 남의 권리를 살 수 없었다. 그는 괜히 나서지 않고 상황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상인은 결국 열람권 확인서를 다시 작성하러 갔다. 직원은 태오에게 다가와 물었다.
“왜 돕지 않으셨습니까?”
“당사자도 아닌데 제가 나서서 누구의 주소를 공개할지 결정할 수는 없죠.”
“그렇군요.”
태오는 문득 성장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는 맞는 말을 빨리 해 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자기가 말할 권한이 있는지도 먼저 따져 보게 됐다.
***
발카스의 자료 가운데에는 당시 관리실의 경비 지출 기록도 있었다. 옛 드래곤 문자와 인간의 거래용 문자 두 종류로 적힌 장부였다. 바렌은 이 장부가 일반적인 관리비 지급 목록이지, 개별 BG-17 수락 확인서 자체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보증료'라는 말이 한 번 나옵니다.” 태오가 지적했다.
“네. 다만 어느 계약의 보증료인지 구분된 내역은 이 사본에 없습니다.”
“금액이 적혀 있다고 보증인의 이름이 정해지지는 않겠군요.”
“그렇습니다. 이 내역이 어느 계약에 대응되는지부터 확인해야죠.”
발카스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금화를 냈는데도 아무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태오는 그 말에 조금 웃었다.
“저도 금화를 내고 집을 계약했는데 돌아오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그래. 그 말은 이제 알아듣는다.”
이 짧은 대화가 끝난 뒤 태오는 새로운 질문을 적었다. 보증료를 지급했다는 기록과 보증인이 수락했다는 기록이 모두 있다면 관계를 대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는 두 기록의 연결 자체가 아직 점선이었다.
***
***
밤에 기록방에 돌아온 태오는 별첨 신청 확인서를 정리했다. 보증인의 이름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보증의 대상도 실제 지급된 금전이 아니라 통지 과정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그 구분은 중요한 진전이었다.
장부에는 아직 같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
[보증금 300금화. 누적 실수령 235금화. 잔액 65금화.]
그 옆에 다른 글씨로 적었다.
[BG-17. 보증인 명칭/수락 확인서 실물 미검증. 송달 관련 책임 가능성.]
그는 책장을 덮으려다 마지막 메시지를 읽었다. 노엘이 보낸 것이었다.
[별첨 보존 위치 탐색 중 동일 분류로 묶인 책임 구분표 한 장 발견. 그 표에는 '보증인' 대신 '신청 기관'과 '보호 대상'이 별도로 기재되어 있음.]
태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증인의 이름이 없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누가 신청했고 누구를 보호하기 위한 보증인지 구분해야 하는 종류의 증서였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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