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선착장 보관창고의 경보가 울린 것은 새벽 다섯 시였다.
김태오는 잠결에 전달석을 붙잡았다. 흰 글씨가 붉게 번져 있었다.
[창고 북측 벽 수분 침투. 이관 상자 7-D 보전 위험.]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신발을 찾았다. 리네아가 눈을 떴다.
“지금 가야 해요?”
“사람이 다쳤다는 소식은 아니에요. 그런데 기록 상자가 젖을 수 있답니다.”
“현장 책임자부터 확인하고 가요. 당신이 가서 상자를 만질 권한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태오는 멈칫했다. 잠이 덜 깬 머릿속에서 가장 중요한 구분을 놓칠 뻔했다.
“맞아요.”
그는 보관담당자에게 연락해 안전 구역과 필요 인력을 먼저 확인했다. 현장에는 토른과 보존 전문가들이 이미 출동해 있었다. 태오는 자료를 가져오는 대신 필요한 목록과 대조용 사본만 챙겼다.
***
창고 북측 벽은 차가운 물로 젖어 있었다. 벽 안쪽에서 오래된 배수관이 갈라졌다고 했다. 목재 바닥에는 물이 얇게 퍼져 있었고, 창고지기들이 보존 상자를 높은 선반으로 옮기고 있었다.
“거기 들어가지 마라!” 토른이 소리쳤다.
태오는 문턱에서 멈췄다.
“제가 할 일이 있습니까?”
“명단이나 세어라. 누가 상자를 옮겼는지, 어떤 봉인이 손상됐는지 정확히 기록해.”
그 일이라면 할 수 있었다. 그는 작업 장갑을 끼고 출입자를 기록했다. 보관담당자가 상자를 옮길 때마다 번호를 확인했고, 젖은 자리와 봉인 상태를 따로 표시했다. 상자 7-D는 아직 선반에 있었지만 근처에 물기가 접근하고 있었다.
잠시 뒤 발카스가 도착했다. 태오는 거대한 그림자가 창고 문을 덮는 것을 보고 몸이 굳었다. 그러나 드래곤은 창고 안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불로 말려 주면 되느냐?”
토른이 소리쳤다.
“여기서 불을 뿜으면 네가 자료를 전부 태워 버릴 거다!”
“내 불은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
“문제는 온도만이 아니다. 종이가 한쪽만 빨리 마르면 뒤틀려!”
발카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무엇을 하라는 것이냐?”
“밖에서 지붕 위로 들어오는 비바람을 막아라. 창고 안에는 손대지 마.”
드래곤은 대답 대신 인간형을 풀었다. 검은 비늘이 거대한 날개로 펼쳐졌다. 그는 지붕 위에 서서 바람이 북쪽 벽으로 직접 몰아치지 않도록 몸을 비틀었다. 날개의 그림자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한동안 넋을 잃었다.
태오는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방수 차양이었다.
***
창고 안에서는 토른의 지시 아래 부러진 배수관을 임시로 막았다. 전문 보존 직원이 습도 마법석을 배치하고, 세딘은 기록 보존 절차에 따라 상자 상태를 촬영했다. 태오는 모든 사람의 작업 시작 시각을 적었다.
“상자 7-D 외봉함 이상 없음. 인계 위치 변경, 고단 선반 셋.”
세딘이 확인했다.
“좋습니다. 다만 내부 자료의 손상 여부는 개봉 허가 뒤에만 확인합니다.”
“알겠습니다.”
한 직원이 발카스의 그림자를 보고 말했다.
“드래곤이 도와주는데 비용은 누가 냅니까?”
태오는 한숨을 쉬었다.
“이전 집주인과는 달리 이번엔 작업 비용을 먼저 계약해야겠습니다.”
그는 발카스에게 소리쳤다.
“지붕 보호는 무상 지원 맞습니까?”
거대한 머리가 돌아왔다.
“내가 지금 이 비를 막고 있는데, 너는 돈을 따지느냐!”
“나중에 방화 비용이나 천막 유지비 청구하실까 봐요!”
드래곤이 길게 포효했다. 바람이 한순간 흔들렸다.
토른이 소리쳤다.
“말싸움은 작업 끝나고 해!”
태오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드래곤도 그랬다.
***
두 시간 뒤 물길이 잡혔다. 상자 7-D를 포함한 주요 이관 자료는 외관상 침수되지 않았다. 그러나 보관소는 내부 결로 여부를 별도로 점검하기로 했다. 발카스가 날개를 접고 사람으로 돌아오자 모두가 한동안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세딘이 말했다.
“나는 내 돈의 기록을 지켰다.” 발카스가 대답했다.
태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누구 돈이 담긴 기록인지 다 밝혀지지 않았죠. 그래도 자료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래곤은 그를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맞다.”
그 한마디가 태오에게는 두 시간 동안 날개로 바람을 막은 일만큼 놀라웠다.
발카스는 보존 지원이 자기 채무를 줄이지 않는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바렌은 자신의 장부와 임차인 원금 장부를 따로 분리했다. 태오가 보고서에 적은 것은 ‘무상 응급 구조 협조’였다. 그것이 정식 비용으로 확정되는 일도, 세입자의 동의 없이 상계되는 일도 없었다.
***
한낮이 되어 태오는 기록방으로 돌아왔다. 문 앞에는 납품 일정을 묻는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태오는 급한 일이 있었다며 변명부터 할 뻔했지만, 약속 시간을 놓친 건 사실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전에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손님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창고에 물이 샜다면서요? 다들 그 얘기를 하던데요.”
“네. 안전이 확인되어 돌아왔습니다. 지금부터 약속한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는 고객의 장부를 펼쳤다. 숨을 고른 뒤 숫자를 하나씩 확인했다. 창고의 마법 경보보다 손님의 주문표가 덜 극적이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리네아는 오후에 따뜻한 빵을 들고 왔다. 그녀는 새벽에 급히 나가던 태오가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은 구조대장님이었어요?”
“아니요. 출입 명부 담당이었습니다.”
“드래곤은요?”
“임시 방수막이었습니다.”
리네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수천 년을 살고도 처음 들어 보는 직책이겠네요.”
태오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식은 몸이 조금씩 풀렸다.
“당신이 새벽에 멈춰 세워 주지 않았으면 제가 먼저 창고에 뛰어들었을지도 몰라요.”
“그랬으면 제가 화냈겠죠.”
“알아요.”
“이상한 일엔 용감하면서 자기 안전에는 가끔 무모해지니까.”
그녀는 빵 접시를 내려놓고 그의 손을 잡았다.
“저는 당신이 멋지게 문제를 푸는 것도 좋지만, 무사히 돌아오는 게 더 좋아요.”
태오는 한동안 말을 못 했다. 그리고 조용히 답했다.
“앞으로는 먼저 연락하겠습니다.”
리네아는 그 약속을 듣고 미소 지었다.
***
응급 구조가 끝난 뒤 창고 직원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서로 다르게 기억했다. 누군가는 상자 7-D를 한 번 옮겼다고 했고, 다른 직원은 선반만 바꿨다고 말했다. 태오는 실수가 생기기 전에 이동표와 원래 위치표를 나란히 놓았다.
“제가 본 건 상자 겉번호가 이동하는 장면입니다. 내부 봉함을 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맞습니다.” 보관담당자가 말했다. “잠시 옮긴 이유와 최종 보관 위치를 따로 적어 주세요.”
서로 다른 기억을 맞추는 일은 처음에는 번거로웠다. 하지만 마지막에 상자 하나가 제대로 돌아왔는지 확인할 때 큰 도움이 됐다. 토른은 젖은 받침목을 들어 내며 말했다.
“가장 아슬아슬했던 건 이 작은 나무 조각이야.”
“왜요?”
“기둥도 아니고 문도 아닌데, 상자 전체 무게를 받치고 있었거든. 물을 먹으면 휘어지기 쉽지.”
태오는 받침목의 휜 자국을 살펴봤다. 오래된 물건이 무너지는 이유가 꼭 거대한 충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은 부품이 맡았던 역할을 아무도 알지 못했을 때도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럼 새 받침을 만들 수 있습니까?”
“만들 수 있다. 다만 보관기관의 재질 기준과 치수를 먼저 확인해야지.”
“드워프도 이제 절차를 지키는군요.”
토른이 그를 흘겨봤다.
“원래 지켰다. 네가 아는 드워프가 망치부터 든다고 다 그런 건 아니야.”
태오는 웃으며 사과했다.
***
창고 밖에서는 발카스의 구조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어떤 사람은 드래곤이 선의로 도왔으니 추가 조사에 우선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사람은 엄청난 존재가 보관소를 지켰다면 그곳을 마음대로 다룰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마르셀은 짧은 공개 설명을 했다.
“긴급 구조 협조와 자료 접근권은 별개의 절차입니다. 오늘 구조한 분은 정식 접근 권한을 새로 부여받지 않았습니다.”
태오는 그 말을 듣고 안도했다. 발카스에게 감사해야 할 일은 감사하되, 다른 사람의 서류를 여는 권한까지 선물해서는 안 됐다.
그때 발카스가 사람들 사이로 걸어 나왔다.
“나도 그걸 안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처음부터 알았다면 좋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안다.”
태오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그럼 오늘 날개 사용료는 청구하지 않으시는 거죠?”
드래곤이 콧김을 뿜었다.
“나를 천막 장수로 생각하느냐?”
“정식 직업 분류는 모르겠는데요. 오늘 하신 일만 보면 방수업에 가깝습니다.”
토른이 옆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발카스는 포효하려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로군.”
“계약은 잘 통합니다.”
***
태오가 기록방으로 돌아왔을 때 고객의 접수표 한 장이 젖어 있었다. 창고에 급히 나가느라 창문을 제대로 닫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그 종이를 살펴보다가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남의 역사적 서류를 보호하러 가면서 자신의 손님 자료를 위험하게 만들다니.
원본의 내용은 읽을 수 있었지만 종이 모서리가 말려 있었다. 그는 즉시 상태를 기록하고 고객에게 연락했다. 종이를 말리는 방법은 보존 규정을 참고했고, 손상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고객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물었다.
“거래 금액은 안 지워졌습니까?”
“네.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문서가 일부 젖어서 상태를 설명드리는 겁니다.”
“그럼 앞으로 같은 일이 없도록 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오는 창문 걸쇠를 수리했다. 그리고 기록방 보관함이 바닥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직접 재었다. 이번에는 토른이 말했던 작은 받침의 중요성을 아주 구체적으로 이해했다. 남에게만 원칙을 요구하지 않고 자기 일터에서 먼저 지켜야 했다.
***
밤에 발카스의 전달문이 도착했다.
[내가 지붕 위에서 날개를 펴고 있는 동안 네가 안으로 뛰어들지 않아 다행이었다.]
태오는 잠시 웃었다. 드래곤은 아직도 말을 돌려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말은 태오가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뜻으로 읽혔다.
그는 답장을 썼다.
[저도 발카스 님이 불을 뿜지 않아 다행입니다. 기록을 보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뒤 회신이 왔다.
[다음에는 날개 아래에서 지휘하지 마라. 소리가 너무 작아 안 들렸다.]
태오는 한참 웃었다. 검은 산맥에서 온 고대의 주인은 비를 막는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못 들었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어쩌면 진짜 변화는 위대한 존재가 아주 평범한 불편을 말할 수 있게 되는 데 있는지도 몰랐다.
***
긴급 보전 보고서를 받아 든 노엘은 발카스의 도움을 기록하면서도 감정적인 표현을 빼 달라고 요청했다. ‘위대한 드래곤의 구원’ 대신 ‘북측 외부 기류 차단을 위한 자발적 협조’라고 적혀 있었다.
“이렇게 쓰면 좀 섭섭해하지 않을까요?” 태오가 물었다.
“역사가 남아야 할 것은 실제 행동입니다.” 노엘이 말했다.
태오는 동의했다. 드래곤이 어떤 생각으로 날개를 펼쳤는지는 발카스가 직접 말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하지만 비바람을 막았다는 행위와 상자의 보존 상태는 확인할 수 있었다.
“발카스 님이 직접 읽으면 자기가 천막으로 기록됐다고 생각하겠네요.”
“천막보다 훨씬 효과적이었죠.”
둘은 웃었다. 태오는 나중에 드래곤에게도 이 보고서를 보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천 년을 살아온 존재가 자신의 공적을 과장하지 않는 기록을 처음 받아 보는 날일지도 몰랐다.
***
저녁에 온 보존 보고서에는 뜻밖의 사소한 항목 하나가 추가되어 있었다.
[상자 7-D 외부 손상 없음. 상자 옆 완충 목재의 안쪽에서 오래된 관리번호 확인.]
관리번호는 상자 번호와 일치하지 않았다. 물기가 닿으며 표면의 먼지가 씻겨 나가 보인 글씨였다.
[반송 분류 C-19.]
태오는 목재의 출처가 상자 7-D와 직접 연결되는지 아직 모르겠다고 적었다. 목재 받침은 다른 상자를 옮기며 재사용됐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새 번호가 존재하는 건 분명했다.
그날 드래곤은 불을 뿜지 않았다. 대신 날개로 바람을 막았다. 태오는 그 사실이 언젠가 동화처럼 전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기록에는 더 간단한 문장을 적었다.
[긴급 보전 성공. 상자 내용물 미개봉. 추가 관리번호 C-19 출처 대조 필요.]
[미환급 원금 85금화 유지.]
일을 마친 뒤 그는 리네아와 늦은 저녁을 먹었다. 창고에 있던 모든 종이보다, 지금 앞에 앉은 한 사람의 안부가 중요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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