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 노윈은 생각보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김태오 씨라고 했죠? 저는 환전원은 아니었어요.”
태오는 의자를 조금 뒤로 빼며 앉았다.
“알고 있습니다. 당시 서류 분류 담당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기억하는 건 일부뿐입니다. 그리고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어요.”
“그 점도 기록하겠습니다.”
면담은 서부 정산지의 작은 상담실에서 진행됐다. 세딘과 디아나가 있었고, 에마가 원한 대로 질문과 대답을 함께 읽어 확인하는 서기가 배석했다. 리네아는 자신의 고객 면담이 겹쳐 참석하지 않았다. 태오는 혼자서도 필요한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에마는 회색 머리를 단정히 묶고 오래된 천 가방에서 작은 공책을 꺼냈다.
“이건 그 시절 개인 메모예요. 공문 원본은 아니고, 제가 일감을 잊지 않으려고 적은 목록이죠.”
공책 속에는 날씨, 동료 휴가, 문서 이관 수량 같은 일상적인 글씨가 빼곡했다. 태오는 그 평범함에 오히려 마음이 움직였다. 사람들은 역사의 진실을 거대한 비밀 금고 안에서만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날의 진실은 누군가 점심을 거르고 서류를 옮겼다는 메모에 남을 수도 있었다.
“푸른 끈을 기억하십니까?” 디아나가 물었다.
“미결 건을 묶던 끈이었어요. 지급이 됐는지 확인할 서류가 아직 없을 때 썼죠. 하지만 그게 영원히 미지급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나중에 도착하면 다시 풀었으니까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E-47/4를 기억하십니까?”
에마가 잠시 눈을 감았다.
“번호는 낯설어요. 하지만 폐업한 동문 환전소에서 넘어온 서류들은 기억합니다. 회신 주소가 여러 번 바뀌었죠.”
“그중 한 문서가 돈을 받은 증거였습니까?”
“저는 돈을 세지 않았어요. 그건 제 일이 아니었거든요.”
태오는 그 말을 그대로 적었다. 몇 달 동안 자신이 가장 듣고 싶던 대답과는 달랐지만, 틀리지 않은 대답이었다.
***
에마는 열아홉째 날 확인 도장에 관한 질문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업 뒤에도 인장은 남아요. 담당자가 마지막 장부의 목록을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누구였는지는 제 공책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그때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한 번은 결제 관련 서류가 반송됐는데 누군가 목록에 ‘처리 끝’이라고 적어 보냈어요. 제가 상대 원부의 수령 확인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죠.”
디아나가 즉시 질문을 바꾸었다.
“그 사건이 E-47/4와 같은 건이라는 기억이 확실합니까?”
에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때 그런 사례가 있었던 건 생각납니다. 지금 보여 주신 번호와 연결되는지는 원본을 봐야 해요.”
그녀의 솔직함 때문에 태오는 더 믿고 싶어졌다. 하지만 믿는 감정과 입증 자료는 서로 다른 것이다.
“왜 반송된 서류를 지급 완료로 적었을까요?”
“대체로 일을 끝냈다는 뜻으로 쓰던 말이었어요. 우리 사무실에 남은 일을 끝냈다는 것과 바깥에서 돈을 실제 받았다는 건 다르죠. 다만 그걸 잘못 적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어요.”
태오는 수첩에 아주 크게 적었다.
[우리 일이 끝남 ≠ 상대의 돈 받음.]
***
면담 중간에 에마는 태오의 손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왜 이렇게 오래된 일을 찾고 있나요?”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거든요.”
“집주인이 누구인데 그렇게 오래 걸리죠?”
“고대 드래곤입니다.”
에마는 한참 침묵했다.
“그렇다면 보통 세입자분들보다 힘들겠네요.”
“어째 그 반응이 가장 정상적이군요.”
“저도 젊을 때 보증금을 떼인 적이 있어요. 집주인이 드래곤은 아니었지만요.”
태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웃었다. 마르셀과 법률 자문들은 사건을 업무 번호로 불렀고, 발카스는 오래된 자산의 문제로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와 비슷한 사연을 겪었던 누군가에게 이 일은 먼저 살 집의 문제였다.
“제가 바라는 건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는 게 아닙니다. 제 돈을 돌려받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름이 잘못 쓰였으면 바로잡는 겁니다.”
에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쓸게요.”
“그렇게 해 주세요.”
***
면담 후 태오는 발카스와 짧게 만났다. 그는 오래된 환전소 직원에게서 뜻밖의 사연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분도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늦게 받았답니다.”
“내가 왜 그 말을 들어야 하지?”
“사람에게는 기록 밖의 생활도 있다는 뜻이라서요.”
발카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태오는 그가 남의 사정을 진지하게 듣는 일이 아직 낯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직원이 뭔가를 확정했느냐?”
“아니요. 돈을 세는 업무는 맡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다만 '서류 업무 종료'와 '실제 지급 완료'가 달랐다는 일반적인 기억을 증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원부가 더 필요하겠군.”
“맞습니다.”
“내 돈을 세는 사람은 많았다. 그런데 아무도 내게 그 차이를 먼저 말해 주지 않았다.”
“누군가는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듣지 않으신 건 아닐까요?”
드래곤은 잠시 생각했다.
“그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군.”
태오는 그의 솔직함에 놀랐다. 발카스가 바뀌었다고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대의 힘이 실수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는 일에는 묘한 감동이 있었다.
***
오후에 기록방에 돌아오자 첫 고객 중 하나였던 로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옛 운송일지의 사본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됐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불안해했다.
“허락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노선표가 갔다면 어쩌지?”
태오는 계약 범위를 보여 주었다. 원본은 보관함에 있고, 복사본은 고객 허가 없이는 제삼자에게 주지 않는다는 조항이었다. 열람 이력도 함께 내밀었다. 로벤과 태오 외에는 기록방 직원이 없었으니 이력은 단순했다.
“그럼 소문이 틀린 걸 수도 있겠군.”
“현재 기록방에서 외부 제공한 내역은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오래된 노선표를 구했을 수도 있으니 더 확인해야 합니다.”
로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게 정확히 대답해야 하나?”
“저도 가끔은 시원하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
에마와의 면담이 끝난 뒤 디아나는 공책의 잉크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에마는 동의했지만 소중한 개인 기록이므로 원본을 보관소에 맡기는 기간을 짧게 해 달라고 했다.
“이것은 제 남편이 생전에 사 준 공책이거든요.”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허가된 부분만 보존대에서 대조하고 원본은 바로 돌려드릴 방법을 찾아 보겠습니다.”
세딘은 공책의 외형 사진과 해당 줄에 대한 비파괴 검사를 진행하는 제한된 방안을 제시했다. 에마는 그 설명을 천천히 듣고 서명했다. 그녀가 허락한 건 그 범위뿐이었다.
검사 결과는 극적이지 않았다. 공책에 적힌 필기들이 어느 해에 쓰인 것인지 정확하게 특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쓰던 잉크와 종이 형식과 어긋나는 뚜렷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디아나는 그것이 ‘진짜다’라는 판정과 같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럼 사본에 어떻게 적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당시 사용됐을 가능성과 문서 출처에 관한 참고자료. 개별 사건을 직접 증명하지 않는 개인 메모라고 적으면 되겠습니다.”
에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제가 모든 답을 아는 사람으로 불리는 건 싫어요.”
태오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한 사람의 기억이 큰 사건의 열쇠라고 알려지는 순간, 누구든 그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답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는 에마에게 자기 질문으로 부담을 줬다면 미안하다고 말했다.
“괜찮아요. 질문을 알아들을 수 있었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
그날 밤 문해교실의 아델 마린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이들에게 장부 작성법을 소개할 수 있겠냐는 예전 초대에 대한 답을 아직 못 들었다고 했다. 태오는 일정을 확인하고 짧은 수업을 잡았다.
“어떤 걸 알려 주면 좋겠습니까?”
“가게에서 외상 장부를 쓰는 법도 좋고, 자기 이름이 적힌 영수증을 어떻게 확인하는지도 좋아요.”
태오는 오래된 자기 계약서를 떠올렸다. 처음 이세계로 왔을 때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했던 날들 말이다. 이제는 글자를 읽는 것만큼 그 글자의 뜻을 질문하는 법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아이들에게 너무 무서운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드래곤하고 싸운 이야기도 해 주실 건가요?”
“저는 싸운 게 아니라 돈을 받으러 갔는데요.”
“아이들은 그쪽이 더 재미있을 거예요.”
태오는 웃었다.
그날 밤 그는 종이 세 장을 준비했다. 첫 장에는 ‘약속한 돈’, 둘째에는 ‘받은 돈’, 셋째에는 ‘아직 받을 돈’이라고 적었다. 수학이 어려운 아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작은 동전 그림을 그렸다. 금화 삼백 닢을 전부 그릴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하루가 다 갈 수도 있었다.
리네아가 그 그림을 보고 물었다.
“드래곤을 그리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아이들이 드래곤만 기억하면 곤란하잖아요.”
“그럼 작은 드래곤이 영수증을 읽는 그림은요?”
태오는 잠깐 상상했다. 콧김으로 종이를 태워 버리는 어린 드래곤이 떠올랐다.
“그림 속 드래곤에게는 먼저 불조심 약속부터 시켜야겠군요.”
둘은 웃으면서 장부 교재를 함께 만들었다. 태오에게는 오늘 읽은 오래된 공책만큼이나 소중한, 새로 쓰는 작은 종이였다.
***
며칠 전부터 태오를 찾아오던 기자가 다시 기록방 앞에 섰다. 그는 에마 노윈이라는 사람을 만났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태오는 면담 자체의 공개 범위부터 확인해야 한다며 구체적 신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분이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는 말이 돌던데요.” 기자가 말했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의 기억을 법적 증거처럼 취급하지 마십시오.”
“그럼 뭐라고 써야 합니까?”
“현재 공식적으로 확인된 절차와 미확정인 부분을 따로 적으시면 됩니다.”
기자는 수첩을 탁 덮었다.
“당신은 기사를 재미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요.”
“전 제 보증금이 재미있는 사건이 될 줄 몰랐습니다.”
기자는 한참 그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태오를 드래곤을 이긴 인간으로 묘사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다. 이제 그는 주민이 받은 피해와 검증 절차를 별도로 쓰겠다고 했다. 태오는 글이 실제로 어떻게 나올지 본 뒤 판단하기로 했다.
***
저녁에는 에마의 편지와 대조할 수 있는 공개 업무 규정이 한 묶음 도착했다. 태오는 서류의 각 장에 원본 출처를 표시했다. 어떤 장은 당시 원부의 사본이고, 어떤 장은 훗날 작성된 정리 안내였다. 서로 다른 시기의 말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붙어 있지 않도록 줄을 그었다.
리네아가 물었다.
“왜 그렇게 시간을 많이 들여요?”
“누군가 나중에 한 장만 떼어 읽어도 출처를 알 수 있었으면 해서요.”
“좋은 생각이네요.”
그녀는 잠시 종이를 바라보다가 창가로 갔다. 저녁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오늘은 어느 날짜를 확인해요?”
“일곱 해 전 날짜요.”
“그럼 오늘 날짜도 잊지 마요.”
태오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다그치지 않았지만, 그 말 하나에는 그동안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같이 저녁을 먹는 날입니다.”
그가 대답하자 리네아가 웃었다. 오래된 기록을 잘 읽는 사람이 현재의 마음까지 잘 읽는 것은 아니었다. 태오는 그것도 배우는 중이었다.
***
리네아는 저녁 무렵 태오를 찾아왔다. 그녀는 중개 계약 하나를 성사시켰고, 그 대가로 받은 수수료를 자기 장부에 적었다.
“오늘 저는 돈을 벌었어요.”
“축하합니다.”
“당신은요?”
“저도 손님 일 하나를 마쳤습니다.”
“그럼 오늘은 둘 다 일한 날이네요.”
“그렇습니다. 각자 번 돈은 각자 장부에.”
리네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 저녁값은 누가 내요?”
태오는 대답하기 전에 미소 지었다.
“번갈아 내죠.”
“오늘은?”
“제가요.”
“너무 빠르게 결정했네요. 협상할 틈도 안 주고.”
그녀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태오가 잠깐 눈을 내리자 리네아가 속삭였다.
“이럴 때는 계약서 안 봐도 되죠?”
“당신이 싫다면 바로 물러날 겁니다.”
“싫다고 안 했는데요.”
그녀는 웃으며 먼저 가볍게 입을 맞추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태오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오늘은 제가 졌군요.”
“무슨 승부를 했다고요?”
“그러게요.”
밤에 세딘의 보고가 도착했다.
[에마 노윈의 일반 관행 진술을 참고자료로 등록. E-47/4의 개별 종료 사유 확정 자료로 쓰지 않음. 상대 원부 대조 허가 추가 요청.]
태오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펜을 내려놓았다. 그날 아무도 돈이 어디로 갔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 한 명이 자기 몫의 정확한 말을 해 주었다는 사실은 큰 진전이었다.
그는 기록했다.
[돈을 세지 않은 사람에게 돈의 행방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보증금 미환급 85금화.]
제11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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