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째 날의 별첨에는 놀랍게도 금액이 없었다.
김태오는 그 사실부터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며칠 동안 쫓아다닌 끝에 받은 문서가 도장 보관 표였다니, 세상이 자신을 아주 정교하게 놀리는 기분이었다.
[인계 확인표 19-나. 인장 보관책임 교대. 대상: 종료 원부, 인계 목록, 반송 대조표.]
“금화 한 닢도 안 적혀 있군요.”
“그러니까 인장 인계 기록이겠지요.” 동부 상업문서보관소의 노엘이 말했다.
“제 입장에선 금화가 많이 적혀 있을수록 좋았을 텐데요.”
“그건 환전소 손님의 입장이군요.”
“정확합니다. 저는 다른 환전소의 손님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노엘은 웃음을 삼키며 뒤쪽 표를 펼쳤다. 사용 목적에는 완료, 반송, 목록 정리의 세 항목이 따로 있었다. 문제의 열아홉째 날에는 ‘목록 정리’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E-47/4 번호를 직접 적은 칸은 검은 얼룩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디아나는 먼저 원본에 더 손을 대지 말자고 했다. 잉크를 지우고 새 글씨를 쓰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잉크를 지우지 않은 채 과거를 알아내는 일은 그보다 어렵고 귀했다.
“표제만 보면 인장은 결제 실행을 승인하려고 사용된 게 아니라 기록을 넘기는 데 쓰였을 가능성이 커요.”
“그러면 E-47/4는 지급 완료가 아니겠군요.”
“아직 그렇게 확정할 수 없습니다. 같은 날 다른 문서가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태오는 수첩을 탁 덮고 싶어졌다. 대신 조용히 페이지를 넘겼다.
“그럼 지금 확인된 건 열아홉째 날의 이 도장 사용 내역 하나입니다.”
“맞습니다.”
“저, 언젠가는 맞습니다 말고 해결됐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디아나가 웃었다.
“보증금 반환에서는 그럴 수 있겠지요. 제 업무에서는 좀처럼 없습니다.”
***
기록국 정원에서는 발카스가 작은 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고대 드래곤은 사람으로 변신한 상태였지만, 분수 안쪽에 비친 그림자는 날개처럼 길었다. 그는 태오가 다가오자 먼저 물었다.
“새 기록에 내 이름이 있느냐?”
“없습니다. 기록에 찍힌 도장 사용 목적이 정리 업무였다는 것까지만 확인했습니다.”
“그럼 나는 무엇을 책임져야 하지?”
“제가 빌린 집의 보증금이요.”
발카스의 눈썹이 움직였다.
“넌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결국 그 이야기로 돌아오는구나.”
“현재 남은 여든다섯 닢은 질문이 아니라 원금 잔액이라서요.”
드래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예전보다 믿을 만했다. 그는 자신의 호통으로 채무의 종류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 알고 있었다.
바렌이 작은 통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과거 자산관리실 직원의 근무 구역과 직책을 익명화한 목록이 있었다.
“영업 말소 뒤 열아홉째 날, 환전소 인장 인계 담당이 우리 쪽 직원과 접촉한 사실은 목록에 있습니다.”
태오가 물었다.
“만남의 내용은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문서를 전달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 있습니다. 돈을 전달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면 근거가 부족합니다.” 바렌이 대답했다.
발카스가 바렌을 바라봤다.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신중해졌느냐?”
“금화 215닢을 지급하면서부터입니다.”
“내 돈인데.”
“임차인의 원금 반환에 쓰인 돈입니다.”
태오는 기침으로 웃음을 가렸다.
***
그날 오후 태오는 서쪽 선착장 보관소에 갔다. 그곳에서는 전날 밤 내린 비로 창고 바닥에 습기가 올랐고, 토른이 목재 받침의 높이를 재고 있었다.
“너희 인간들은 왜 물 옆에 종이를 쌓아 두나?”
“선착장이어서요.”
“물 옆에 배를 두는 것과 물에 종이를 맡기는 건 다르지.”
“그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도 됩니까?”
“남겨라. 내가 백 년 뒤에도 똑같은 말을 하게 생겼으니.”
보관담당자는 태오에게 이관 상자 7-D의 겉목록을 보여 주었다. 상자 내부의 모든 자료를 펼칠 권한은 아직 없었지만, 표제와 이관 시점만으로도 한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폐업 열아홉째 날의 인장 인계 기록은 상자 7-D가 도착하기 전의 정리 작업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관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그 연결을 확정하는 일은 위험했다. 태오는 필요한 범위만 다시 신청했다.
“E-47/4 종료 사유와 반송 대조를 확인할 수 있는 목록 부분만 먼저요.”
보관담당자는 신청 사유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 권리와 관련된 기록이니, 다른 고객의 개인정보는 가리고 검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토른이 옆에서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네가 상자를 통째로 열자고 했을 텐데.”
“예전에는 기록이 귀하다는 것만 알았고, 그 기록 안에 다른 사람의 인생도 들어 있다는 건 잘 몰랐죠.”
드워프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 집도 함부로 벽을 부수면 안 되고 장부도 함부로 봉인을 뜯으면 안 돼.”
***
저녁에 리네아가 기록방으로 찾아왔을 때 태오는 한 장의 빈 서식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었다.
[인장 대여 및 반납.]
[업무 종료 사유.]
[실제 지급·수취.]
“새 서비스예요?” 그녀가 물었다.
“손님들이 서류에서 세 가지를 헷갈리지 않도록 만드는 안내문입니다.”
“그런데 당신도 제가 보낸 편지에 답장이 없으면 바쁘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제 마음이 식었다고 생각해요?”
태오가 펜을 들고 멈췄다.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데요?”
“대답이 궁금해서요.”
“바쁘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걱정되면 물어볼 겁니다.”
“그럼 제 대신 마음을 정하지는 않겠네요.”
“그건 제가 할 일이 아니니까요.”
그녀는 슬쩍 그의 옆에 앉아 어깨를 붙였다.
“그런데 제가 일부러 답장을 늦게 하면요?”
“그건 곤란합니다.”
“왜요?”
“그때는 제가 하루 종일 답장을 기다릴 테니까요.”
리네아가 웃으며 그의 턱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진작 그렇게 말하면 될 걸.”
“말 대신 영수증을 드릴까요?”
“사랑에 수령증을 끊겠다고 하면 오늘은 집에 혼자 가셔야겠는데요?”
태오는 곧장 펜을 내려놓았다.
“그 분야는 구두 계약으로 하겠습니다.”
***
노엘은 태오에게 인장 관리의 간단한 실습을 보여 주었다. 물론 실제 역사적 인장을 꺼내 주지는 않았다. 대신 아무 뜻도 없는 연습용 돌을 놓고 잉크판과 인계표를 준비했다.
“인장 하나가 있다고 합시다. 담당자에게 맡겼다고 적습니다. 이제 이 인장으로 찍힌 확인표가 발견되면 누가 찍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날 인장을 빌린 사람이 찍었을 가능성이 높겠죠.”
“가능성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건네줬을 수도 있고, 기계가 눌렀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대여 기록뿐 아니라 사용 목적과 반환 검수 기록이 필요합니다.”
그는 연습용 인장을 종이에 눌렀다. 똑같은 무늬가 두 번 찍혔지만 한쪽은 가장자리가 조금 번져 있었다.
“이 두 개가 다른 인장입니까?”
“아니요. 찍는 힘이 달랐을 수 있습니다.”
태오는 감탄했다. 도장 자국의 모양은 중요한 단서였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한순간에 위조범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이세계의 법은 마법 같은 추리 한 번으로 사람의 권리를 바꾸게 두지 않았다.
“비슷한 도장 두 개가 있으면요?”
“제작소 기록과 재료의 미세 흔적을 검증해야겠죠. 그래서 디아나가 감정을 맡는 겁니다.”
태오는 연습용 인장을 내려놓았다.
“그럼 결론은, 오늘도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처음부터 범인을 잡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노엘의 말이 맞았다. 확인 도장을 찍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무엇을 구분해야 하는지 배운 날이었다.
***
선착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태오는 로벤의 낡은 마차를 발견했다. 로벤은 바퀴살을 만지며 수리공과 다투고 있었다. 수리공은 교체 부품의 가격을 이야기했고, 로벤은 이미 지불한 값에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계약서가 있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로벤이 머리를 긁적였다.
“계약서까지는 아니고 수리 표가 있지.”
표에는 ‘바퀴 상태 점검’이라고 적혀 있었다. 부품 교체에 관한 항목은 없었다.
“점검료와 부품값을 구분해 확인할 필요가 있겠네요.” 태오가 말했다.
수리공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 뜻이었으면 처음부터 더 정확하게 써 줄걸.”
로벤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난 다 된다는 뜻인 줄 알았지.”
“오늘은 두 분 다 오해하신 부분이 있으니, 실제 교체할 부품과 견적을 새로 적어 보세요. 제가 대신 결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세 사람은 나란히 마차 바퀴를 바라봤다. 태오는 대단한 마법 없이도 삶의 작은 분쟁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는지 실감했다. 기록은 먼 옛날 금고에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로벤이 작게 웃었다.
“네가 드래곤을 상대하는 법을 이렇게 배우는 줄은 몰랐다.”
“저도 마차 바퀴에서 배울 줄은 몰랐습니다.”
***
밤에는 태오와 리네아가 작은 시장에서 저녁 재료를 골랐다. 태오는 가격표를 읽다가 저절로 웃었다. 장사를 시작하고 나니 예전처럼 모든 가격이 자신을 겁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금화 한 닢이 여전히 귀했다.
리네아가 채소 바구니를 들고 물었다.
“우리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요?”
“당신이 좋아하는 걸로요.”
“제 취향을 확인했다는 증거 있어요?”
태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지난번에 이 요리를 두 접시 드셨습니다.”
“그건 배가 고파서였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 오늘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리네아는 웃으며 바구니를 흔들었다. 그녀는 장난을 치다가도 태오가 지칠 때에는 말을 멈출 줄 알았다. 그 점이 그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둘은 시장 골목의 따뜻한 불빛 아래에서 천천히 걸었다. 태오는 오늘 읽은 도장 보관표의 숫자를 잠깐 잊었다. 서류의 날짜가 열아홉째 날이라는 사실은 내일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손안에 잡힌 온기는 오늘이 아니면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
다음 날 오전 토른이 태오의 기록방 문을 두드렸다. 그는 오래된 인장 보관함이 습기로 휘어졌다는 문의를 받고 기술 감정을 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도장 자체를 만질 수 있는 겁니까?” 태오가 물었다.
“허가된 건 상자 구조뿐이야. 내부 물건에 손대는 건 보존담당자 일이겠지.”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른은 벽을 부수고 금고를 여는 장인이 아니라 안전한 방법을 먼저 계산하는 장인이었다. 그러니 도장 상자를 조사하더라도 내용을 마음대로 읽지 않을 것이다.
“같이 갈래?”
“오늘은 손님 예약이 있어서요. 대신 구조 검사 결과 중 공개 가능한 내용만 나중에 알려 주세요.”
토른이 씩 웃었다.
“이젠 네가 내게 쉬라고 말하는 대신 일을 하라고 하는군.”
“전 지금 제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토른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태오는 문 앞에서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누군가가 자기 역할을 정확히 지키는 것만으로도 조사 전체가 안전해질 수 있었다.
***
밤에 마르셀에게서 돌아온 회신에는 새로운 번호가 있었다.
[7-D 상자 외부 색인: E-47/4 결제 지시 종료 사유 대조표에 딸린 ‘반송지 교환 확인’ 별첨 존재.]
태오는 창가에 서서 그 문장을 되뇌었다. 반송지 교환 확인. 만약 결제가 완료됐다면 왜 반송과 관련된 별첨이 붙었을까. 취소된 지급 지시서가 돌아왔을 수도 있고, 단지 서류를 보냈던 주소가 틀렸을 수도 있었다.
확인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첫째, 무엇이 반송되었는가.
둘째, 누가 받기로 되어 있었는가.
셋째, 돈이 실제로 움직였는가.
그는 그 질문들 위에 큰 글씨로 써 두었다.
[열아홉째 날은 지급일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작게 덧붙였다.
[오늘의 돈: 기록방 수수료 1건. 보증금 잔액 85금화 변동 없음.]
태오는 늘어나는 문서만큼 자신의 하루를 늘릴 수 없었다. 그래서 등불을 끄고 리네아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거리로 나서자 강바람이 차갑게 불었다. 그녀가 그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추워요?”
“조금요.”
“그럼 제가 바람을 막을게요.”
“드래곤한테 배운 거예요?”
“아니요. 당신한테요.”
리네아가 미소 지었다. 서류에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하루였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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