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문을 받은 다음 날 아침, 김태오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밤새 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계정 47을 더 이상 조사하지 마시오.]
[그 문은 왕국이 잠근 것이다.]
글자는 두 줄뿐인데 자꾸 머릿속에서 늘어났다. 왕국이 잠갔다면 왜 드래곤이 돈을 돌려주지 않는지, 드래곤이 관련됐다면 왜 왕국 이름을 들먹이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왜 항상 자기 이름을 안 쓰는지.
태오는 세 번째 질문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협박은 익명으로 하고 보증금은 실명으로 받으라니, 세상 참 편리하네.”
그는 봉투를 두꺼운 종이 사이에 넣었다. 어젯밤에는 놀라서 맨손으로 만졌지만 이제부터라도 조심해야 했다. 종이 가장자리에는 검은 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 봉인에는 세 개의 고리가 맞물린 문양이 찍혀 있었다.
현관 밖에는 우유병 대신 길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고양이는 태오를 보자 하품을 했다.
“너라도 목격한 거 없냐?”
고양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이 동네에서는 네가 제일 신중하구나.”
잠시 뒤 리네아가 찾아왔다. 그는 문을 열어주자마자 방문 시간을 적었다. 리네아는 그것을 보더니 이마를 짚었다.
“태오 씨, 이제 손님이 올 때마다 장부를 쓰실 거예요?”
“나중에 누가 언제 왔냐고 물으면요?”
“제가 날짜와 시간을 증명해 드릴게요.”
“리네아 씨도 조사 대상이 되면요?”
“그럼 제가 태오 씨 장부를 증명하죠. 완벽하네요.”
그녀가 웃었다. 태오도 웃으려다가 봉투를 보여주었다.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리네아는 인장에 손대지 않고 몸을 숙였다.
“세 고리…… 검은 산맥에서 본 장부 문양과 비슷하긴 해요.”
“같은 겁니까?”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은 다르죠. 제가 중개업 자격을 걸고 배운 첫 번째 원칙이에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움의 성과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둘은 마르셀 등록관을 만나러 갔다. 등록소는 아침부터 사람으로 가득했다. 새 집을 사려는 귀족, 집을 잃었다는 상인, 그리고 자기 이름으로 등록된 오두막이 사실은 돼지우리였다고 따지는 노인까지 있었다.
“파벨시는 평화롭군요.”
“태오 씨가 보기엔요?”
“다들 서류로 싸우잖아요. 칼보다 낫죠.”
“어떤 서류는 칼보다 깊게 찔러요.”
리네아의 말에 태오는 답하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런 건 겁주려고 하는 말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마르셀은 두 사람의 설명을 듣고 접수 용지를 꺼냈다.
“협박성 전달물의 존재는 기록하겠습니다. 다만 발신인을 추정해 적을 수는 없습니다.”
“인장이라도 감정할 수 없습니까?”
“가능합니다. 그러나 인장 문양과 사용자가 일대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오래된 상업 조합의 표식은 여러 곳에서 복제됩니다.”
마르셀은 종이를 가리켰다.
“원본은 접수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봉투와 문구를 모사하겠습니다. 원본은 당신이 보관하세요. 수령 시각, 전달석의 반응, 봉투를 만진 사람을 따로 적으십시오.”
태오는 이미 써 온 장부를 내밀었다.
마르셀이 잠깐 눈을 들었다.
“……준비가 빠르군요.”
“돈 받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길어서요.”
그는 뿌듯했다. 이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공무원에게 칭찬을 받았다. 물론 서류를 잘 만들어 왔다는 칭찬이었지만, 보증금이 270금화 남은 사람에게는 그것도 큰일이었다.
등록관은 봉투를 돌려주며 말했다.
“왕국이 계정 47을 봉인했다는 주장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음 단계는 봉인 명령의 기록이 실제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국왕에게 편지라도 써야 합니까?”
“그 전에 시청의 구문서 열람실을 가시죠.”
“다행이네요. 폐하께 인사말을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했는데.”
“인사말보다 첨부 서류를 먼저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마르셀은 미소도 짓지 않았다. 태오는 이 사람이 천직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리네아는 봉투를 접지 말자고 했다. 태오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고대 인장은 접힌 자리가 훼손되면 찍힌 순서를 확인하기 어려워질 수 있어요. 무엇보다 저희가 문양을 잘못 기억하면 안 되잖아요.”
“저는 어제 이미 세 번 접었는데요.”
“그럼 이제부터라도 조심하죠.”
그녀는 뒷주머니에서 작은 천을 꺼냈다. 안에는 딱딱한 판 두 장이 들어 있었다. 봉투를 그 사이에 넣으면 구겨지지 않았다.
“언제 이런 걸 준비하셨어요?”
“중개인이 되면 중요한 계약서를 들고 다닐 일이 많거든요.”
“그렇군요. 직업 선택을 잘하셨네요.”
“태오 씨를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죠.”
리네아의 대꾸에 태오는 잠깐 미안해졌다. 자신을 돕는 동안 그녀가 치른 대가를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길드의 자격 심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리네아 씨. 이번 일로 계속 피해를 보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제가 처음에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부분은 제 책임이에요. 그리고 지금 돕는 건 제 선택이고요.”
“그래도.”
“도와주는 사람한테 매번 미안하다고만 하면 그 사람은 정말 곤란해져요.”
“왜요?”
“고맙다는 말도 받고 싶은데 자꾸 미안하다고만 하니까요.”
태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고맙습니다.”
리네아는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말은 접수했어요.”
“접수번호는요?”
“제 마음속에만 있습니다.”
“그건 추후 확인이 어렵겠는데요.”
“그래서 제가 직접 증명할 거예요.”
태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서류에 관한 농담을 던졌는데 리네아는 그 말을 다른 방향으로 받아 돌려줬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와의 대화는 매번 자신이 준비하지 못한 질문으로 끝났다.
두 사람은 경고문 내용을 다시 읽었다. '왕국이 잠갔다'는 표현에는 날짜도, 명령번호도, 봉인의 종류도 없었다. 누가 보냈든 적어도 당사자가 당장 검증할 수 있는 형태로 정보를 주려 하지는 않은 셈이었다.
“이건 정보를 주려는 편지라기보다 행동을 바꾸려는 편지 같군요.”
태오가 말했다.
“무엇을 바꾸려 했을까요?”
“조사를 멈추게 하거나, 반대로 왕국을 찾아가도록 만들거나. 아직 모르죠.”
리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떤 의도인지부터 맞히려 하지 말고, 편지에 적힌 사실만 확인하면 되겠네요.”
“정답입니다.”
“태오 씨에게 정답을 듣는 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웃었다.
태오는 '그것도 기록합니까?'라는 말을 간신히 참았다. 모든 대답에 접수번호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경고문의 재질을 살폈다. 표면은 값싼 종이처럼 보였지만 안쪽에 금속 실이 섞여 있었다. 비싼 재료라면 출처를 추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 상점에 물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좋지만 직접 가서 원본을 여러 사람 손에 돌리지는 말아요. 먼저 재질의 특징만 묘사해서 물어보죠.”
태오는 그녀의 제안에 동의했다. 세상은 넓고 종이는 많았다. 첫날부터 만나는 상점마다 협박장을 펼쳐 보일 이유는 없었다.
***
시청 구문서 열람실에는 먼지가 쌓인 책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창가에 앉은 노서기가 서류를 받고 고개를 저었다.
“계정 사십칠? 너무 넓은 검색이다.”
“파벨 주택조합과 관련된 기록입니다.”
“그럼 너무 오래됐지.”
“좁히면 안 되고 넓히면 안 되면 어떻게 찾습니까?”
“수수료를 내면.”
노서기는 태연했다.
태오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작은 은화를 건넸다. 노서기는 책상 아래에서 두꺼운 색인을 꺼냈다.
“보관 시설과 청산 명령을 따로 봐야 해. 집의 소유권 기록은 지금 등기부에 있지만, 보관금 관리권은 별도야. 사람이 집을 산다고 전 주인의 은행까지 사는 건 아니지 않나.”
태오는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러면 발카스가 집을 샀어도 지하 금고의 관리권은 못 받았을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럴 수 있다는 뜻이지, 그랬다는 뜻은 아니야.”
하루에 두 번이나 같은 대답을 들었다. 오늘의 공식 표어는 '그럴 수 있다'인가 보다.
리네아는 노서기의 색인을 넘겼다. 그녀의 손가락이 어느 항목에서 멈췄다.
“파벨 주택조합 청산…… 잠깐, 여기 보세요.”
기록에는 오래전 주택조합이 청산 심사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아래 낡은 잉크로 추가된 한 줄이 눈에 띄었다.
[연동 보관 시설 관련 자료는 별철. 왕실 구채무 정리령 제57-K호 참조.]
태오는 처음으로 '왕실'이라는 글자를 공식 자료에서 발견했다.
“왕실 구채무 정리령. 그러면 왕국이 잠갔다는 편지가 맞는 겁니까?”
노서기는 코웃음을 쳤다.
“정리령을 참조한다는 것과 왕국이 네 돈에 자물쇠를 채웠다는 건 다른 얘기다. 정리령은 세금 정산일 수도 있고 보관금 보호 규정일 수도 있어.”
“제57-K호 원문은요?”
“여긴 색인만 있어. 문서 내용은 왕실 문서 보관소로 청구해야지.”
“그건 어디 있습니까?”
“성문 안쪽. 접수는 이곳에서 대행해 주고.”
“수수료가 또 있겠네요.”
“젊은이가 참 눈치가 빨라.”
태오는 두 번째 은화를 꺼내며 생각했다. 드래곤을 상대로 싸우려면 칼 대신 은화가 필요했다. 문제는 이 칼도 쓸수록 닳는다는 점이었다.
***
열람실에서 나왔을 때는 정오였다. 리네아는 계단에 앉아 빵을 나눠 주었다.
“아침도 안 먹으셨죠?”
“먹었습니다.”
“무얼요?”
“따뜻한 물.”
“그건 식사가 아니에요.”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죠.”
그녀는 빵을 태오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그 마음가짐을 좀 고치세요.”
태오는 빵을 베어 물었다. 안에 달콤한 견과류가 들어 있었다. 고작 음식 하나인데 어젯밤부터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풀렸다.
“리네아 씨도 일이 밀렸을 텐데, 계속 따라다녀도 괜찮습니까?”
“제 고객의 계약에 문제가 생겼잖아요.”
“계약은 끝났습니다.”
“그럼 끝난 계약의 문제가 남았죠.”
태오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짓궂게 웃었다.
“왜요? 다른 뜻을 기대하셨어요?”
“제가 무슨 뜻을요?”
“글쎄요. 얼굴이 조금 빨개지셨는데.”
“빵이 뜨거워서요.”
“이거 식은 빵인데.”
태오는 빵을 한 번 더 베어 물었다. 법적 다툼은 증거로 해결되지만 이 대화는 증거를 대면할수록 불리했다.
그때 시청 앞에서 짐을 정리하던 배달 소년 하나가 다가왔다.
“혹시 김태오 씨?”
태오는 빵을 내렸다.
“왜?”
“어젯밤 검은 봉투 받으셨죠?”
순간 리네아의 표정이 굳었다. 태오는 소년을 빤히 바라봤다.
“그걸 어떻게 아니?”
“전달석이 이상하게 울렸다면서 배달조합에서 오늘 아침에 확인하러 왔어요. 비정상 경로로 들어온 물건은 기록하거든요.”
“그럼 누가 보냈는지도 알 수 있나?”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물건을 보낸 사람은 아니고요. 어디서 처음 조합의 경로를 탄 건지는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봉투는…….”
그는 말을 흐렸다.
“어디서 왔는데?”
“우리 조합 기록에는 도착만 있어요. 출발 기록이 없어요.”
리네아가 물었다.
“누군가 전달석에 직접 놓아도 그런가요?”
“보통은 건물 기록이 남아요. 이건 도착 순간에만 갑자기 생긴 것처럼 돼 있어요. 그래서 조사 중이에요.”
소년은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사실과 모르는 사실을 구분하는 어른보다 그가 더 믿음직해 보였다.
태오는 소년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배달조합 확인서를 신청할 수 있는지 물었고, 소년은 가능하다고 했다.
두 사람이 골목으로 들어설 무렵, 리네아가 입을 열었다.
“왕실 기록에서 정리령 번호가 나온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에요.”
“그렇긴 한데, 이상하네요.”
“뭐가요?”
“누군가는 우리가 그 번호까지 찾아볼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봉투를 다시 살폈다. 세 고리 문양이 오후 햇빛에 잠깐 반짝였다.
경고문은 태오를 겁주려 보낸 것일까.
아니면 그가 왕실 문서까지 도달하도록 유도하는 표지판일까.
둘 중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왕국의 이름이 처음으로 공식 기록에 등장했다. 하지만 그 이름만으로 누가 돈을 잠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날 저녁, 태오는 장부 마지막 줄에 적었다.
[제57-K호 원문 열람 신청. 발신인 미상 경고문은 별도 보관. 원인 추정 금지.]
잠깐 생각한 그는 그 아래 작은 글씨를 덧붙였다.
[빵값은 리네아 씨에게 갚을 것.]
보증금 270금화에 비하면 작은 빚이었다.
그렇다고 기록에서 빼놓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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