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화 삼십 닢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김태오는 주머니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금속끼리 부딪히며 맑은 소리가 났다. 그가 이세계에 온 뒤 처음으로 벌었던 금화 한 닢보다 조금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돈의 무게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돌려받기까지 걸린 시간이 그만큼 길었을 뿐이었다.
“정말 받으셨네요.”
리네아가 신기하다는 듯 주머니를 바라봤다.
“삼백 중 삼십입니다.”
“그래도 발카스 님이 현금을 돌려주신 건 처음 봐요.”
“그럼 평소에는 뭘 주시는데요?”
“대개 기다리라는 말을 주시죠.”
태오는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그건 돈이 아니잖아요.”
“맞아요.”
두 사람은 결국 함께 웃었다.
회의실에서 나오는 길에 태오는 세입자 대표들을 만났다. 열두 해를 기다린 마부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아이를 업고 왔던 여자는 눈물을 글썽였다.
“이제 우리도 받을 수 있을까요?”
태오는 쉽게 답하지 않았다.
“오늘 제 돈 일부를 돌려준 걸 보면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만 각자 계약을 다시 확인해야 해요.”
“같이해 주실 거죠?”
그는 잠시 생각했다.
새 작업장으로 이사할 계획은 이미 늦어졌다. 남은 돈을 받기 전에는 이동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손을 놓으면 다른 사람들은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몰랐다.
“제가 아는 만큼은 돕겠습니다. 대신 결정은 본인이 하셔야 해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
조사 결과가 담긴 공문을 받기 전날에는 예상 밖의 일이 있었다. 파벨의 작은 신문사에서 기자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낡은 가죽 가방과 뭉툭한 펜을 들고 있었다.
“드래곤과 싸우는 세입자 이야기를 기사로 쓰고 싶습니다.”
태오는 문 앞에서 기자를 한참 바라봤다.
“싸우는 건 아닙니다.”
“동굴까지 찾아가셨잖습니까.”
“돈 받으러 간 겁니다.”
“공동 진정까지 내셨다고요.”
“그건 당사자들이 직접 신청했습니다.”
기자는 웃으며 수첩을 펼쳤다.
“그렇다면 ‘용의 횡포에 맞선 영웅’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쓰면 안 됩니다.”
태오의 대답은 단호했다.
“왜요? 독자들이 좋아할 텐데요.”
“제가 영웅도 아니고, 횡포인지 여부도 조사 중이니까요.”
기자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기사 제목을 정하기가 어렵네요.”
“그럼 ‘계약이 끝났는데 보증금을 못 받았습니다’라고 쓰세요.”
“너무 평범한데요.”
“문제가 평범하니까요.”
태오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하지만 겪는 사람한테는 정말 큰일입니다.”
기자는 펜을 멈췄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써도 되겠습니까?”
“그건 괜찮습니다.”
태오는 대신 다른 세입자들의 이름과 개인 사정은 당사자 동의 없이는 기사에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기자는 처음에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내 수첩에 적었다.
“알겠습니다. 당사자 인터뷰가 필요하면 따로 동의를 받겠습니다.”
그는 떠나기 전 한 가지를 물었다.
“발카스가 정말 무섭습니까?”
태오는 망설이지 않았다.
“엄청 무섭습니다.”
“그런데 왜 계속합니까?”
“돈이 제 거니까요.”
기자가 웃었다.
그날 저녁 작은 신문에 기사가 실렸다.
[세입자들, 계약에 따른 보증금 반환 요구. 파벨 등록소 공동 조사 진행.]
태오는 그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 사건을 부풀리지 않고 이해할 수 있었다.
***
리네아는 중개업 길드에서 돌아왔다. 얼굴에는 피곤이 묻어 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정지 처분은 일단 보류됐어요. 고객 동의서가 있어서요.”
“다행이네요.”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에요. 추가 심사가 남았어요.”
리네아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상한 걸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죠?”
“길드의 오래된 임대 계약 일부가 최근에 다시 봉인됐대요.”
태오는 고개를 들었다.
“누가요?”
“왕국 감사실에서요.”
“왕국이 왜 민간 임대 계약을 봉인합니까?”
“저도 모르겠어요. 길드 사람들은 세무 점검 때문이라고 하지만…….”
리네아가 말을 멈췄다.
태오는 그다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중개인도 아직 확실히 아는 사실이 아니었다.
“확인해 봐야겠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물을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리네아는 두 손으로 잔을 감쌌다.
“태오 씨.”
“네.”
“당장 돈만 받고 떠나셔도 돼요.”
태오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럴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요?”
“아직 잔액이 이백칠십 닢이나 남았잖아요.”
리네아가 웃었다.
“그렇죠.”
“그리고 왜 그 돈이 잠겨 있는지 궁금해졌어요.”
“호기심 때문에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알아요. 그래서 혼자 움직이지 않으려고요.”
그는 창가에 놓인 계약서 묶음을 바라봤다. 방 한쪽에는 아직도 이사 상자가 쌓여 있었다. 언젠가 이 집을 떠나게 된다면 저 상자를 들고 평범하게 새집 문을 열고 싶었다.
남의 돈이 묶여 있다는 걸 알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떠나는 건 이제 조금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왕국의 비밀을 들추는 일을 자신의 새로운 직업으로 삼을 생각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태오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는 그냥 세입자인데, 왜 이렇게 일이 커지는 걸까요.”
리네아는 대답 대신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안도와 걱정이 함께 섞여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태오는 파벨시 시장에서 작은 나무판을 샀다. 그리고 손수 글씨를 썼다.
[임대 보증금 계약 확인. 서류 정리 도움. 상담 무료.]
판자를 집 앞에 세우자 리네아가 기겁했다.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요?”
“돈 받으러 가기 전에 계약서 확인하려고요.”
“태오 씨, 여기서 그런 상담을 하면 길드 허가가 필요할 수도 있어요.”
“돈 안 받는데도요?”
“규정에 따라서는요.”
태오는 나무판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럼 ‘우리 집 보증금 돌려받기 모임’이라고 적을까요?”
리네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더 수상한데요.”
둘은 결국 등록소의 공동 조사 안내문을 붙이는 것으로 합의했다. 정식 상담업을 시작하는 건 아니었다. 서류를 정리하고, 각자의 권리를 확인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건 어때요?”
태오가 새로 쓴 문구를 보여 줬다.
[발카스 임대주택 공동 분쟁 기록 모임. 본인 계약서 지참.]
리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괜찮겠네요.”
그날 오후, 새로운 사람이 셋 찾아왔다. 그중에는 아직 계약 기간이 끝나지 않은 젊은 부부도 있었다. 그들은 집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계약했다고 했다.
태오는 처음 계약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엘프 중개인이 웃으며 건네던 서류. 임대인이 엄청난 부자라는 말. 계약서 끝의 화려한 인장.
“그때 설명을 자세히 들으셨어요?”
젊은 부부가 고개를 저었다.
“금화만 맡기면 걱정 없다고 했어요.”
태오는 그 말을 듣고 리네아를 흘끗 봤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저희 길드가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부부가 놀랐다.
“중개인인데 그런 말씀을 해도 괜찮아요?”
“안 괜찮을 수도 있죠.”
리네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해야 하니까요.”
태오는 그녀에게 따뜻한 차를 건넸다.
그녀는 최근 며칠 사이 부쩍 피곤해 보였다. 중개 자격 정지에 대한 이의 신청도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발카스의 영향력은 컸고, 길드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격 문제는 어떻게 됐습니까?”
“심사 중이에요.”
“자료는 충분하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기다리는 수밖에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기다리라는 말이 아니라, 기다림에 끝이 있다는 증거였다.
***
토른은 집의 계단 수리를 마쳤다. 태오는 그가 새로 설치한 지지대를 살펴봤다. 낡은 나무 아래에 튼튼한 금속 보강재가 들어갔다. 표면에는 드워프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제 오래 버티겠네요.”
“네가 죽을 때까지는 충분하겠지.”
“격려가 묘하네요.”
토른이 웃었다.
“드워프식 칭찬이다.”
태오는 약속한 잔금을 지급했다.
토른은 금화를 세고 바로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혹시 발카스에게서 일부 받았다는 게 사실이냐?”
“삼십 닢이요.”
“하. 그 늙은 용이 지갑을 열다니.”
“못 열었는데요.”
“뭐?”
“제 말은, 회의실에서 지급 확인서를 작성하고 그날 저녁 집사가 전달했다는 겁니다. 발카스가 직접 금고를 연 건 아니었어요.”
토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렇겠지.”
“왜요?”
“그놈이 금고를 열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을 만들지 않았을 거야.”
태오는 토른을 바라봤다.
“정확히 무엇을 아시는 겁니까?”
드워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전부는 몰라.”
“아는 것만 말씀해 주세요.”
토른은 공구함을 닫았다.
“내 할아버지가 파벨 주택조합의 지하 보관소를 만들었어. 계약금을 한곳에 모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시설이었지.”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보관소가 집마다 하나씩 연결됐어. 작은 계정을 열면 큰 금고의 기록이 움직이는 방식이었지.”
태오는 비늘을 꺼냈다.
“이걸로요?”
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야. 다만 네 비늘만으로는 안 돼. 확인이 두 단계 더 필요하다고 했잖아.”
“그럼 나머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는 보관소 관리자의 승인. 다른 하나는 원금 소유자의 증명일 가능성이 커.”
“원금 소유자라면 세입자 말입니까?”
“예전 규칙대로라면.”
태오는 계약서를 펼쳤다.
자신의 이름.
금화 삼백 닢.
서명과 인장.
“그럼 제가 증명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는 거네요.”
토른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가능할지도.”
태오는 마음이 급해졌다. 처음으로 금고를 열 방법이 눈앞에 나타난 듯했다. 하지만 토른은 곧장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잊지 마. 그 금고는 네 보증금만 보관하는 곳이 아닐 수 있어.”
“다른 세입자 돈도 있겠죠.”
“더 큰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토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내 할아버지는 마지막에 이상한 말을 남겼어. 돈을 보호하려고 만든 문이, 누군가의 비밀을 지키는 문으로 변했다고.”
태오는 비늘을 가방에 넣었다.
“그럼 열기 전에 더 알아봐야겠네요.”
“그래. 이번엔 똑똑한 판단이군.”
***
해 질 무렵 등록소에서 연락이 왔다. 마르셀의 인장이 찍힌 공문이었다.
[공동 분쟁 예비조사 1차 결과 통지.]
태오는 손을 씻고 종이를 펼쳤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
확인된 세입자 열한 명.
확인 가능한 보증금 원금 총계 금화 천백여든 닢.
일부 미확인 계약 다섯 건.
그는 숨을 멈췄다.
천백여든.
금화 삼백 닢만으로도 삶이 묶여 있었는데, 그보다 네 배 가까운 돈이 걸려 있었다.
문서 뒷장에는 더 놀라운 내용이 있었다.
[보관 계정의 최초 수령기관 명칭: 파벨 주택조합.]
[현 관리권 이전 기록: 자료 미확인.]
[특이사항: 계정 47은 현행 등기부에서 조회할 수 없음.]
태오는 마지막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보관 계정 47.
발카스가 보낸 비늘에 새겨진 숫자.
그의 집 밑에서 발견된 보관소와 연결된 번호.
같은 숫자가 세 군데에서 나왔다.
그날 밤, 태오는 리네아와 토른을 불렀다.
“이걸 보세요.”
그는 공문을 가운데 펼쳤다.
토른은 문서를 읽다가 얼굴을 굳혔다.
“이게 아직 남아 있었군.”
“무슨 뜻입니까?”
“관리권 이전 기록이 없다는 말.”
토른이 낮게 말했다.
“발카스에게 집은 넘어갔는데, 집 아래 금고의 권한이 누구에게 넘어갔는지는 기록이 없다는 거야.”
리네아가 입을 막았다.
“그럼 발카스 님도 계정을 못 여는 이유가…….”
“그럴 수 있지.”
태오는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둠이 골목에 내려앉았다.
드래곤의 문제는 단순히 욕심이 많아서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돈을 돌려줄 의무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좋습니다.”
태오는 서류를 정리했다.
“집주인 사정도 확인하되, 남의 돈이라는 사실은 끝까지 지키죠.”
그때 현관의 전달석이 울렸다.
태오는 문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놓인 봉투에는 낯선 검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왕국의 문장도, 파벨시의 인장도 아니었다. 마치 세 개의 고리가 맞물린 모습이었다.
봉투를 열자 짧은 문장이 나타났다.
[계정 47을 더 이상 조사하지 마시오.]
그리고 아래에 덧붙은 한 줄.
[그 문은 왕국이 잠근 것이다.]
태오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집주인은 드래곤이었다.
그런데 보증금의 문을 잠근 건 왕국이라고?
그는 웃음이 나려는 걸 참았다.
이세계 부동산 사정은 정말 끝이 없었다.
제1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