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오는 리네아와 크게 다퉜다.
정확히는 말 한마디 때문에 둘 다 입을 다물게 되었다. 다툼이라고 하기에는 소리가 작았지만, 그 뒤에 남은 침묵은 웬만한 고함보다 무거웠다.
발단은 기록방에 찾아온 한 상단주의 제안이었다. 그는 태오의 기록 검토 서비스와 리네아의 임대 중개 업무를 하나의 상품처럼 판매하면 좋겠다고 했다.
“두 분이 연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고객도 믿기 쉽지 않겠습니까?”
태오는 제안서를 읽다가 무심코 말했다.
“리네아 씨가 동의한다면 검토할 수 있겠네요. 계약 상담도 어느 정도 같이 해 왔으니까요.”
그 순간 리네아의 표정이 바뀌었다.
“내 상담 내용을 같이 해 왔다고요?”
태오는 그녀가 왜 불편해졌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제가 도움받은 부분이 있으니까요.”
“당신 일에 내가 도움을 준 것과 내 일을 당신 사업의 일부로 넣는 건 다르죠.”
상단주는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제안서를 두고 돌아갔다. 태오는 사과하려 했지만 리네아는 먼저 말했다.
“나중에 이야기해요. 오전 고객이 기다려요.”
문이 닫힌 뒤 태오는 손에 들고 있던 제안서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자신이 그녀를 이용하려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결정하지 않은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너무 쉽게 꺼낸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계약서에 적힌 두 사람의 이름을 바라봤다. 어느 칸에도 리네아의 서명은 없었다.
***
그날 계정 47 사건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제3 대리 통지의 첨부 서식이 옛 동문 환전소가 사용하던 일반 문서와 닮았다는 비교 결과가 나온 것이다.
디아나 벨크는 두 종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닮았습니다. 하지만 양식이 유통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같은 작성자가 만들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환전소가 폐업하면서 빈 서식이 다른 곳으로 넘어갔을 수 있겠네요.” 태오가 말했다.
“맞습니다. 브라운 상회가 일부 설비를 인수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양식이 여러 기관에 남았을 수 있어요. 누가 어떤 것을 가졌는지는 별도 대조해야 합니다.”
태오는 자료를 메모하다가 문득 리네아의 말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이름을 함께 적어 놓으면 실제 권한까지 함께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그는 자기 연인에게도 같은 실수를 할 뻔했다.
세딘은 옛 보완 요청서의 진위 감정 중간 결과를 설명했다. 종이의 제조 시기와 문서에 쓰인 공식 문구는 당시 관행과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다만 그 문서가 최초 발행된 상태 그대로 보존됐는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했다.
“결국 아직 답이 없네요.” 태오가 말했다.
“없는 답을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디아나가 답했다.
태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 원칙을 자신의 생활에도 적용해야 할 것 같았다.
***
오후에 기록방으로 돌아오니 상단주가 남긴 제안서를 다시 보자는 연락이 와 있었다. 태오는 짧게 답했다.
[제안받은 공동상품은 두 사업자의 독립적인 동의가 확인되기 전까지 검토하지 않습니다. 현재 어떤 공동 서비스도 판매하지 않습니다.]
그는 문장을 보내고 나서 리네아에게도 같은 사실을 알렸다. 사과의 조건으로 무언가를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제안 자체를 거절할지도 몰랐다. 그럴 권리가 있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리네아가 돌아왔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서류함을 잠갔다. 태오는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제가 잘못 말했어요.”
“어느 부분이요?”
“당신이 해 온 일을 제 기록방이랑 같이 해 온 일처럼 들리게 했습니다. 상단주 앞에서 동의도 안 받고요.”
리네아는 열쇠를 내려놓았다.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 제안은 보류했습니다. 당신이 싫다면 더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싫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물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맞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태오는 그 침묵을 없애려고 쓸데없는 농담을 꺼내지 않았다. 리네아는 창밖으로 시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당신을 돕는 건 좋아요. 당신이 내 일을 존중해 주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엘프 중개인이 아니라 '드래곤과 싸우는 남자의 여자'라고만 부를 때가 있어요.”
태오는 가슴 한쪽이 무거워졌다.
“그런 말을 들었군요.”
“대단한 문제는 아닐 수도 있어요. 다만 나에게는 내 이름이 있잖아요.”
“리네아.”
그가 천천히 말했다.
“미안해요. 앞으로 당신 이름을 먼저 묻겠습니다.”
그녀는 조금 웃었다.
“이름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
“무슨 일을 할지는 묻겠다는 뜻입니다.”
“그 말이면 충분해요.”
태오는 손을 내밀었다. 리네아가 그 손을 잡았다. 화해에는 수령증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그 뒤의 행동까지 저절로 바뀌는 것은 아니므로 태오는 마음속으로 한 번 더 약속했다.
***
두 사람은 오래간만에 함께 시장을 걸었다. 리네아는 작은 유리병 가게 앞에서 멈췄다. 초록빛 유리병 안에는 강에서 뜬 물을 담은 듯한 작은 장식이 들어 있었다.
“바다에 가면 이런 색이겠죠?”
“바다는 더 넓을 겁니다.”
“당연하죠.”
“죄송합니다. 오늘은 농담이 잘 안 나와서요.”
리네아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농담 안 해도 괜찮아요.”
“그래도 웃게 해 드리고 싶은데요.”
“그럼 내가 먼저 할게요.”
그녀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태오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가 벽에 어깨가 닿았다.
“당신은 계약서 읽을 때만 그렇게 자신만만해요?”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지금은요?”
“협상에서 밀리는 것 같은데요.”
“맞아요.”
리네아가 그의 목깃을 살짝 잡았다. 태오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가 먼저 웃자 그는 안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짧은 입맞춤 뒤, 리네아가 낮게 속삭였다.
“오늘은 그거면 됐어요.”
“제가 계약을 제대로 이행했습니까?”
“아뇨. 계약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에요.”
그 말에 태오는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
그날 일은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상단주가 남긴 제안서에는 기록방의 이름과 리네아가 운영하는 중개 업무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않은 상호가 한 장의 종이에 이미 만들어진 셈이었다.
태오는 그 사본을 들고 상단주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연락만 보내도 됐지만, 예전의 자신이 얼마나 오해를 많이 했는지 떠올리자 설명을 직접 하고 싶었다.
상단주는 제안서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시안인데 무엇이 문제요?”
“시안이라고 해도 다른 사업자의 이름을 넣으셨습니다. 공개되기 전에 정정해 주십시오.”
“당신들 둘이 연인이라면서요.”
“연인입니다.”
“그럼 서로의 이름을 써도 되는 것 아니오?”
태오는 잠시 생각했다. 이 말이 왜 불편한지 감정으로만 설명하면 상단주는 알아듣지 못할지도 몰랐다.
“제 집주인은 드래곤입니다. 드래곤에게 금화가 많다고 해서 제 보증금을 다른 계약에 쓸 권리가 생기지는 않죠. 저와 리네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친하다고 사업 의사까지 대신 정할 수는 없습니다.”
상단주는 한참 그를 바라보다 웃었다.
“아주 유명한 사례를 들었군.”
“제게는 평생 잊기 어려운 사례라서요.”
“알겠소. 그럼 두 사람이 각자 승낙하기 전에는 별개 사업으로 적겠소.”
태오는 구두 답변에 만족하지 않고 수정된 제안서를 받았다. 상단주는 수고스럽다고 했지만 곧 두 상호를 모두 지우고 '참여 사업자 미정'으로 바꾸었다.
기록방으로 돌아오니 리네아가 그 소식을 듣고 있었다.
“오늘 가서 직접 말했어요?”
“네. 당신이 불편했던 부분을 설명했습니다.”
“그럼 상단주가 기분 나빠하진 않았어요?”
“처음엔 그랬죠. 그래도 문구를 고쳤습니다.”
리네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오는 여전히 사과할 일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당신이 직접 답할 수 있게 먼저 물어볼게요.”
그녀가 웃었다.
“그것도 좋지만, 어떤 제안은 나에게 말해 주기만 해도 돼요. 다 결정하고 와서 허락해 달라는 방식만 피하면 되는 거죠.”
“알겠습니다.”
리네아가 한 걸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오늘 당신이 든 비유는 너무 재밌네요.”
“어떤 비유요?”
“드래곤의 재산권을 우리의 연애에 끌어온 거요.”
“제가 아는 가장 고통스러운 사례라서요.”
“그럼 제 마음은 고통스럽습니까?”
태오는 순간 말을 잃었다. 리네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잘 대답해 보세요. 이번엔 제가 심사관이에요.”
“고통스럽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주 위험합니다.”
“왜 위험하죠?”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더 좋아져서요.”
리네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녀는 웃다가 그의 팔을 가볍게 때렸다.
“그런 말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아닙니다. 심사관이 질문하셔서 즉석으로 답했습니다.”
리네아는 잠시 태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합격이에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무사히 넘겼네요.”
“아직 최종 심사가 남았는데요.”
“무슨 심사요?”
“오늘 저녁에 늦지 않는지.”
두 사람은 웃었다. 태오는 연애가 행정 절차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그 절차의 결론을 서로 함께 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그날 오후 고객에게 제공할 업무 안내서를 새로 만들었다. '공동 상담은 각 사업자의 명시적 동의 후 진행'이라는 문구가 추가됐다. 그 문장 때문에 오히려 고객들이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관계가 가깝다고 고객의 자료까지 무조건 공유하는 업체는 신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태오는 오늘이 단순한 화해가 아니라, 기록방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지 않을 것인지 결정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심을 지키는 데는 예쁜 말보다 반복되는 행동이 필요할 것이다.
***
사무실의 일정을 다시 정리할 때 리네아는 자신의 이름 아래 다음 주 상담을 직접 적었다. 태오는 일부러 그 내용을 읽지 않았다.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제가 뭘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하죠. 그런데 손님에게 허락받지 않은 내용이면 안 들어도 됩니다.” 리네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제 너무 훌륭한 답만 하네요.” “앞으로는 덜 말하겠습니다.” “그건 싫은데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 웃었다. 궁금함을 참는 것도 사랑의 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태오는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일정을 달력에 적고 빈 저녁 한 칸을 함께 골랐다. 태오는 그 칸에 어떤 계약 번호도 적지 않았다. 함께 보내기로 한 시간은 사업상의 의무가 아니라 둘이 선택한 약속이었다.
***
다음 날 아침, 기록방 문 앞에 두 사람이 찾아왔다. 첫째는 상단주의 대리인이었다. 둘째는 리네아의 개인 고객이었다. 두 사람은 우연히 같은 시간에 도착했다.
“공동상품 상담을 다시 받을 수 있습니까?” 대리인이 물었다.
리네아가 직접 대답했다.
“아직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향후 검토할 경우 각자 업무 범위와 고객 동의, 개인정보 분리 기준부터 정할 예정입니다.”
태오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대리인은 그것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듯 돌아갔다.
이어 리네아는 자신의 고객을 별도 상담실로 안내했다. 태오는 기록방의 다른 업무를 보았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았다.
낮에 디아나에게서 도착한 감정 결과는 더 차분했다. 제3 대리 통지 서식에는 옛 환전소가 썼던 원본 표기의 일부와 닮은 칸이 있었지만, 새로 인쇄한 서류일 가능성도 있었다. '같은 양식'과 '같은 사람'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다.
“또 원점이군요.” 태오가 말했다.
토른이 옆에서 공구를 정리하다 답했다.
“원점은 아니지. 틀린 길 하나는 지웠잖아.”
“그것도 그렇네요.”
토른은 선반의 나사를 조이며 덧붙였다.
“집을 지을 때도 엉뚱한 기둥을 세우지 않는 게 중요해. 기둥 하나 잘못 세우면 나중에 무너질 때 다 같이 깔려.”
태오는 오늘의 생활과 조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타인의 이름이 적혔다고 그가 동의한 것은 아니다. 연인이라는 이유로 서로의 업무를 대신 결정할 수도 없다.
그날 저녁 리네아가 태오에게 작은 유리병 하나를 건넸다. 어제 둘이 보던 강물 색의 장식이었다.
“바다에 갈 때까지 이걸로 참아요.”
“제가 받아도 됩니까?”
“이번에는 제가 직접 선택했어요.”
태오는 웃었다.
[현재 미환급 원금 100금화.]
그 숫자는 그대로였지만, 기록방 안의 공기는 전날과 조금 달랐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돈 말고도 있었다.
제10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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