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카스는 태오를 검은 산맥으로 불렀다.
드래곤이 직접 보냈다는 연락을 받은 태오는 먼저 서류를 확인했다. 이번에는 퇴거 요구도, 금고 반환 조건도 없었다. 초대장의 내용은 의외로 소박했다.
[서쪽 선착장 문서 상자 보존비용 협의. 참석 가능 시간 회신 요망.]
태오는 초대장 아래 붙은 항목을 보고 웃었다.
[간식 제공.]
“드래곤도 회의를 여러 번 하면 배가 고픈 걸 배우는군요.”
리네아가 말했다.
“당신은 설마 간식 때문에 가는 거예요?”
“왕국에서 무료로 주는 것 가운데 믿을 만한 건 간식뿐이라서요.”
“계약서 없는 간식은요?”
“그건 성분 표시를 확인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웃었다. 이번 만남에 리네아는 함께 가지 않기로 했다. 오전에 별도 임대 상담이 있었고, 태오도 동행을 당연히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태오의 넥타이처럼 매듭지어진 목끈을 고쳐 매 주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드래곤이 차를 권하면 마시는 척만 하지 말고요. 지난번에 혼자 입술 데였잖아요.”
“그건 화염 마법으로 데운 차였습니다.”
“그러니까요.”
그녀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태오는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 손을 잡았다.
“저녁에 돌아오겠습니다.”
“그건 계약이 아니라 약속이죠.”
“이제 그 차이도 압니다.”
***
검은 산맥의 동굴에는 서류를 펼친 긴 탁자가 놓여 있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 그곳에는 뼈처럼 날카로운 보석과 커다란 금화 더미가 있었다. 오늘은 장부와 잉크병, 그리고 누군가 직접 만든 작은 종이 추까지 있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바렌이 말했다.
발카스는 인간형으로 탁자 끝에 앉아 있었다. 그는 태오를 보자마자 작은 은쟁반을 가리켰다.
“먹어라.”
“무엇입니까?”
“산딸기 과자다.”
“독은 없습니까?”
“인간, 내가 굳이 과자에 독을 넣을 이유가 무엇이냐?”
“제 보증금 백 닢 때문에요.”
“……아직 그 백 닢을 기억하느냐?”
“매일 아침 확인합니다.”
바렌이 옆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발카스는 과자를 하나 집어 먹는 것으로 답했다. 태오도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은 좋았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집주인이 제공한 간식치고는 놀랍게 평범했다.
“이 자리에 부른 이유는 기록 보존 비용이다.”
발카스가 말했다.
“서쪽 선착장 창고의 구조 보강과 이동 중 봉인 확인에 돈이 필요하다더군. 내가 내겠다.”
태오는 바로 펜을 들지 않았다.
“어떤 돈에서 나옵니까?”
“내 개인 광산 수익이다.”
“장부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바렌이 두꺼운 문서를 내밀었다. 광산의 이번 분기 배당과 세금을 정리한 자료였다. 태오는 그것이 실제 지급 가능한 돈인지 자신이 이 자리에서 확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왜 또 그러느냐.” 발카스가 물었다.
“제 채권을 갚을 돈인지, 창고에 필요한 보전비인지 구분해야 해서요. 그리고 창고 소유자에게 청구할 금액을 드래곤 님이 먼저 냈다고 해서 세입자 원금에서 그 돈을 뺄 수는 없습니다.”
발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회의록에 그 의도를 적어 주세요.”
“정말 지독한 인간이다.”
“몇 달 전에는 계약서를 펼치지도 않으셨잖아요.”
드래곤이 입을 다물었다. 바렌이 급히 고개를 숙여 웃음을 감췄다.
***
회의에는 토른도 참석했다. 그는 석조 보강의 범위를 계산하고, 일단 필요한 물적 안전 조치와 기록 열람 허가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창고가 무너질 가능성을 조사했지, 누구의 장부를 열 권리를 판 적이 없소.”
발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에는 동의한다.”
“아주 드문 장면을 보는군.” 토른이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짐승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드래곤이잖소.”
태오는 결국 웃고 말았다.
바렌이 제출한 보전 계획안은 세 단계였다. 첫째, 기둥과 선반의 위험을 제거한다. 둘째, 상자의 외형과 봉인 상태를 독립적으로 기록한다. 셋째, 권한이 확인된 담당자만 제한 열람한다. 발카스가 비용을 지원하는 것은 첫째와 둘째까지였다.
“셋째는 왜 빠졌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내가 비용을 낸다고 남의 기록을 마음대로 볼 권리가 생기면 곤란하겠지.” 발카스가 말했다.
태오는 그를 잠시 바라봤다. 아주 오랜 세월 타인의 허락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드래곤이 스스로 그런 선을 그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맞습니다.”
“나를 칭찬하는 것이냐?”
“계획안의 한 부분을요.”
“꼭 한 부분만?”
“아직 나머지 백 닢이 있어서요.”
발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다음 날 보전 계약의 초안이 파벨 등록소에 접수됐다. 그러나 뜻밖에도 계약은 바로 체결되지 않았다. 창고 소유 기관이 보전비 부담을 나누어 검토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발카스는 조급해졌다.
“내가 돈을 내겠다는데 왜 말이 많느냐?”
태오는 그의 대리인에게 설명했다.
“기록의 보관 책임자가 바뀌거나, 지원이 후대에 부당한 열람권으로 오해되지 않게 하려는 겁니다.”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까지 의심하는군.”
“돈을 받으면 무슨 조건이 생기는지 확인하는 절차겠죠.”
발카스는 한참 침묵하다 결국 수정안에 서명했다. 서명은 제법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종이는 찢어지지 않았다. 태오는 순간 박수를 치고 싶었다.
“서명 실력이 좋아지셨군요.”
“인간. 내 손은 성벽도 부술 수 있다.”
“그래서 펜을 안 부수신 게 더욱 대단하죠.”
드래곤의 콧김에서 작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바렌은 서명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태오는 그 과정에서 발카스가 가지고 온 또 다른 자료를 보았다. 옛 개인 재무관 명부였다. 일곱 해 전, 발카스 자산관리실의 회계 담당자가 세 번 교체됐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는 그 이름을 무턱대고 적지 않았다. 누가 계정 47과 관련됐는지는 조사 범위가 허가된 뒤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명부도 제출하실 겁니까?”
“관련된 기간과 직책에 한해서.”
“알겠습니다.”
“왜 놀라지 않느냐?”
“드래곤 님이 안 보여 주실 줄 알았는데, 요즘에는 예상이 자꾸 틀립니다.”
“내가 돈을 갚는 것도 예상에서 빼지 마라.”
태오는 대답 대신 계산 장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실지급 200. 잔액 100.]
발카스는 그 숫자를 보더니 가볍게 눈을 감았다.
“알고 있다.”
***
오후에는 새 기록방에 손님이 몰렸다. 로벤이 데려온 마부 둘, 세탁소 주인 하나, 가게 임대계약 갱신을 앞둔 목수 한 명이었다. 태오는 모든 상담을 혼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신중하게 일정을 나누어 일부는 다음 날로 예약했다.
리네아가 기록방에 들러 말했다.
“드래곤과 싸워서 유명해진 사장님이 이제 손님이 많아서 곤란해졌네요.”
“싸워서 유명해진 건 아닙니다.”
“그럼 뭐라고 소개할까요?”
“계약서 때문에 망할 뻔했지만 살아남은 사람.”
“너무 길어요.”
“한 줄로 줄이면요?”
“서류를 끝까지 읽는 남자.”
태오는 그 표현을 생각해 보았다.
“조금 괜찮은데요?”
“그럼 간판에 새겨 볼까요?”
“그건 마케팅 비용을 따로 검토해야 합니다.”
리네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태오는 그녀의 머리카락 한 가닥이 목깃에 걸린 것을 조심스럽게 떼어 주었다. 리네아는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그렇게 다정할 거면 오늘 밤 일찍 끝내요.”
“이유가 있습니까?”
“같이 저녁 먹을 이유로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합니다.”
리네아는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가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먼저 돌아섰다.
“손님이 기다려요, 사장님.”
그녀가 떠난 뒤 태오는 한동안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
보전 계약이 조정 중인 사이, 파벨 기록방에는 익명의 선물 상자가 도착했다. 겉에는 검은 산맥에서 보냈다는 표기가 있었다. 태오는 이 상자를 열지 않고 바렌에게 확인했다.
[작은 돌 서류추 한 개. 발카스 님이 작업장 개업 축하 의미로 보냄. 채권 변제와 무관.]
태오는 답장을 썼다.
[축하 선물의 성격을 확인했습니다. 보증금 잔액은 별도로 관리합니다. 고맙습니다.]
상자에는 매끈한 검은 돌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한쪽 면에는 용의 눈을 닮은 금빛 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마법이 있는지는 감정하지 않았다. 태오는 그저 바람에 날리는 문서를 눌러 두는 용도로 쓰기로 했다.
로벤이 돌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래곤한테서 이런 걸 받다니 무섭지 않나?”
“원래는 돈을 받아야 하는데요.”
“그래도 선물이면 기쁘잖아.”
“기쁘긴 하죠. 하지만 선물이 제 돈 대신이면 곤란하고요.”
로벤은 크게 웃었다.
잠시 뒤 작업장에 모인 손님들은 새 기록방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태오는 장부 정리, 증빙 분류, 계약일·송달일 대조, 고객이 허락한 범위의 서류 복사 서비스를 설명했다. 법률판단을 대신하거나 보증금 환급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문장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럼 분쟁을 해결해 주는 사람은 아니군요.” 한 상인이 물었다.
“직접 해결할 수 있도록 기록을 알아보기 쉽게 돕는 사람입니다.”
“돈을 더 받아도 되겠는데?”
“제가 할 수 없는 일까지 약속하면 나중에 더 비싸게 치를 수 있습니다.”
상인은 그 말에 설득된 듯 업무 의뢰서를 적었다.
리네아는 손님이 떠나고 나서 조용히 박수쳤다.
“많이 달라졌네요.”
“또 그 말씀입니까?”
“처음에는 돈을 돌려받는 법만 생각했잖아요. 지금은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기록도 찾고 있어요.”
태오는 책상 위의 검은 돌을 보았다.
“그렇다고 제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래서 더 좋아요.”
태오는 그녀를 돌아봤다. 그녀의 말은 언제나 정확한 칭찬처럼 들렸다. 리네아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봐요?”
“저를 좋아한다는 말에 아직 적응 중이라서요.”
“그럼 천천히 적응하세요.”
태오는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리네아는 한 발 물러나며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손님이 또 오기 전까지만요.”
“시간제한이 있군요.”
“당신이 만든 기록방이잖아요.”
그녀가 웃자 태오도 웃었다. 둘은 가볍게 포옹했다가 손님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곧장 떨어졌다.
그날 밤 태오는 발카스의 선물을 작업장 자산이나 보증금 일부 변제와 구분해 개인 선물로 기록했다. 기록방 매출과도 섞지 않았다. 정확하게 나누는 일은 이전처럼 괴로운 숙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자기 삶을 유지하기 위한 조용한 습관이 되어 가고 있었다.
***
토른은 보전 작업을 맡을 장인들에게 새 조건을 설명했다. “이곳은 내 집 공사가 아니오. 누가 출입할지, 어떤 선반을 건드릴지 기록으로 남기시오.” 젊은 장인 하나가 물었다. “그럼 기록을 볼 권리도 우리가 갖습니까?” 토른이 수염을 흔들었다. “벽을 고치는 권한과 남의 돈을 읽는 권한은 다르다네.” 태오는 그 말을 듣고 만족했다. 처음 지하 금고를 발견했을 때 토른이 무턱대고 봉인을 열지 않은 이유가 새삼 이해됐다.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많았지만, 함부로 손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남아 있는 증거도 있었다.
***
저녁 무렵 바렌에게서 창고 보전비의 조건부 수락 문서가 도착했다. 발카스의 재정 지원과 별개로 독립 감정과 열람권 제한이 명시되어 있었다. 아직 실제 공사가 완료된 것은 아니었지만, 곧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동봉된 쪽지에는 또 다른 제안이 있었다.
[발카스 님은 동문 환전소 관련 옛 개인 재무관의 근무기간만 공개해 대조하도록 동의함.]
태오는 그 문장을 보고 놀랐다. 단순히 기록 보존료를 내는 것을 넘어,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까지 조사할 길을 열어 준 셈이었다.
리네아는 종이를 읽다가 조용히 물었다.
“발카스 님이 정말 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가 하는 행동은 달라졌죠.”
“그게 믿음의 시작일까요?”
“전 믿음과 영수증을 따로 보관하려고요.”
“어머, 낭만 없어요.”
태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에게 쓸 낭만은 따로 남겨 놓았는데요.”
리네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태오는 이번에는 먼저 웃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기록방 매출에서요?”
“제 개인 생활비에서요. 물론 장부에 적을 겁니다.”
엘프의 웃음이 작업장 벽에 부딪혀 퍼졌다.
그날 밤 태오는 보증금 잔액 100금화를 다시 적었다. 한편 서쪽 선착장 창고의 보전 계획은 진전됐다. 드래곤이 돈을 내는 날이라고 해서 모든 장부가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군가 돈을 내더라도 열어서는 안 되는 장부가 있다는 사실을 드래곤 자신이 처음으로 인정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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