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회신함에서 발견된 옛 질문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수현은 그 내용보다 그 문서가 어떻게 접수됐는지에 더 마음이 쏠렸다. 루세는 이번에는 장비를 켜지 않고도 원문의 전송 경로를 확인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원문의 겉봉투에 두 개의 경로 도장이 찍혀 있어. 하나는 관측소, 하나는 보관소. 그 둘의 표기 순서를 확인하면 적어도 언제 어떤 물건을 옮겼는지 볼 수 있지.”
“그럼 다른 세계에서 왔는지도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니야. 기록 경로는 보존 이동 경로를 뜻할 수 있으니까.”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모든 표시가 귀환의 문처럼 보였다. 이제는 표시 하나가 뜻하는 범위를 하나씩 줄여 가는 것이 오히려 앞으로 가는 방법이었다.
공동보존실로 향하는 길에 메이가 빵 두 개를 샀다. 하나는 수현에게 내밀고 하나는 자기가 먹었다. 수현이 돈을 내려고 하자 메이가 막았다.
“제 돈으로 사는 빵이에요.”
“그럼 다음엔 제가 살게요.”
“좋아요. 단, 다음 빵집은 제가 고르겠어요.”
둘은 웃었다. 지극히 작은 약속이 오늘도 하루를 견디게 했다.
***
두 도장의 연도는 서로 달랐다. 원문 입력이 먼저 만들어졌고, 보존함에 들어간 것은 한참 뒤였다. 그 사이에 임시 중계장치가 여러 번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루세는 그 내용을 시간표로 정리했다.
“원문이 다른 시설에서 왔다는 뜻은 맞아. 하지만 그 시설이 다른 세계라는 뜻은 아니야.”
“그렇다면 이 기록에서 중요한 건 뭐죠?”
“이동 과정에 서류가 한 번 더 포장됐다는 거야. 안쪽 봉투의 원문과 바깥 봉투의 안내문은 작성자가 달라.”
세드나가 안내문 사본을 펼쳤다.
[회신 대상이 확인되지 않은 입력은 보존하되, 현장 확인인 의사가 확인될 때까지 종결하지 말 것.]
수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것은 그동안 다른 서류에서 본 문장들과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원문 질문에 대한 직접 답변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최소한 당시 누군가는 동의 확인이 필요하다고 적었군요.”
“그렇습니다.” 세드나가 답했다. “하지만 그 지시가 당시 어떤 사건에 적용됐는지 별도 확인해야 해요.”
모든 희망 뒤에 붙는 단서가 이제는 조금 익숙했다.
***
루세가 정리한 도장 대조표에는 같은 이름의 기술자 둘이 나왔다. 한 사람은 관측소에서 일했던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기술자의 장비를 수리한 후배였다. 둘 다 장비 서명에 같은 문양을 썼다. 수현은 이름만 보고 동일한 사람이라고 단정했다면 얼마나 위험했을지 생각했다.
“그럼 이 두 사람이 같은 표식을 쓴 이유는 뭔가요?”
“직책을 나타내는 공용 표식이기 때문이야. 개인 서명과는 달라.” 루세가 말했다.
“에린이라는 이름도 그런 식으로 잘못 묶였을 수 있겠네요.”
“가능하지. 하지만 아직은 각각의 문서를 확인해야 해.”
세드나는 에린 소렐이 옛 공동심사반의 기록 담당으로 나타나는 반면, 응급 보호 신고의 에린은 직책이 완전히 다르게 적혀 있다는 사실을 정리했다. 시대 차이도 적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오래 살기도 했고 기록이 후대에 복사되기도 했으므로 시대가 다르다고 반드시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근거로 같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수현은 가설 목록을 수정했다. '에린의 음모' 같은 자극적인 제목 대신 '에린 표기 두 문서의 관련성 검증'이라고 적었다. 메이가 그 문장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렇게 쓰니 범인을 잡는 이야기 같지 않아요.”
“범인을 먼저 정해 놓으면 나중에 틀린 증거를 가져다 붙일 수 있거든요.”
“그럼 실제로 나쁜 일을 한 사람을 찾을 수 있나요?”
“찾아야죠. 다만 사람이 아니라 행위와 권한을 먼저 확인하는 편이 더 공정하겠죠.”
그 대화는 예상보다 오래 이어졌다.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 누군가를 미워할 이름 하나 찾는 일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수현은 이제 더 분명히 알았다.
***
오후 회의에서는 '회신 대상'이라는 표현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직원은 그것이 현장 확인인이라고 주장했고, 일부는 최초 질문 작성자를 뜻한다고 했다. 수현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원문에서 누가 질문했고, 누구에게 답을 돌려줘야 하는지 먼저 구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심사 기간이 늘어납니다.”
“틀린 사람에게 답장을 보냈다고 해 놓고 끝내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루세가 기술 자료를 가리켰다. 구형 중계함은 자동 경고와 실제 입력을 서로 다른 칸에 기록했지만, 후기 이관표에선 두 칸이 합쳐졌다. 따라서 안내문이 보존함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질문 작성자에게 도착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장치는 왕도와 동부 관측소 사이에서 실제로 작동했었어. 같은 세계 안의 연결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하지. 그러나 서울로 건너갈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야.”
수현은 자신이 생각했던 고향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무실 창문에서 보이던 건물과 편의점의 형광등, 귀가길 지하철의 소음. 지금 설명 중인 작은 금속판 하나가 그곳까지 닿는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믿고 싶은 것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달랐다.
***
루세는 수현에게 작은 실험 계획서를 보여 주었다. 비밀 주소나 사람을 보내는 대신 이 세계 안에 있는 두 시설에 서로 다른 확인 구절을 남기는 시험이었다. 과거 보존 경로에서 자동 복제된 메시지와 실제 전달된 메시지를 구별하려는 목적이었다.
“이건 안전한가요?”
“기계 자체를 재가동하는 시험이 아니야. 이미 보존된 종이와 현재 연결 가능한 구형 기록들을 대조하는 작업이야. 실제 마력 전달은 없어.”
수현은 천천히 설명을 읽었다. 계획에는 담당자, 자료 원본의 이동 금지, 촬영본의 열람 범위, 오류 시 기록 폐기 금지 등이 적혀 있었다.
“제 서울 주소는 안 쓰는 거죠?”
“절대 안 써. 필요하다면 본인이 정한 무의미한 확인 구절만 써.”
수현은 머릿속에서 몇 단어를 떠올렸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단어 하나를 고르면 될 텐데 이상하게 쉽지 않았다. 고향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과 고향의 정보를 이곳에 너무 많이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했다.
“지금은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루세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선택하지 않는 것도 유효한 선택이야.”
***
비공식 기술 제안을 받은 뒤 수현은 귀환 조사 비용을 정리했다. 이 세계로 끌려와 수입이 없어진 지 오래였고, 처음 받은 자문 보수도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교통비와 복사비가 조금씩 쌓였다. 세드나는 공적 심사에서 필요한 자료 발급은 사건 비용으로 청구할 수 있는지 확인해 주겠다고 했다.
“귀환하려는 사람이 돈을 모두 써 버리면 돌아갈 기술을 찾기도 전에 굶을 수 있으니까요.” 수현이 농담했다.
“농담처럼 말하지만 중요한 문제죠.” 세드나가 답했다.
수현은 자신이 제7원정대의 공식 자문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현장 비용과 개인 귀환 조사의 비용은 분리돼야 했다. 오르카나 데런의 돈을 빌리면 편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불필요한 책임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메이는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빵값 정도는 제가 낼 수 있어요.”
“그건 얼마든지 좋죠. 제가 다음 빵을 사기로 한 것도 잊지 않았어요.”
“그럼 돈을 낸 사람이 누구인지도 기록해야 해요?”
“모든 빵에 영수증을 붙이자는 건 아니에요.”
두 사람은 웃었다. 수현은 빵을 받아 먹으면서도 어디까지 공적인 비용이고 어디부터 친구 사이의 호의인지 생각했다. 명확한 경계는 사람 사이를 차갑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담을 줄이기도 했다.
그날 수현은 세드나와 함께 정식 귀환 지원 청구의 비용 보조 신청을 작성했다. 승인될지는 몰랐다. 그래도 자신의 삶을 다시 세우는 일이 왕국의 거대한 기록보다 하찮은 문제로 취급되지는 않았으면 했다.
***
그날 저녁 작은 문제가 생겼다. 시험 계획서를 읽었던 다른 직원이 수현에게 몰래 접근했다.
“정말 다른 세계에서 왔다면 거기에 돈이 되는 물건이 많겠죠? 새로운 계약 하나만 쓰면 제 쪽 기술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수현은 눈썹을 올렸다.
“무슨 기술인가요?”
“위험을 감수하면 인간 이동의 문을 여는 방법입니다.”
“실험 기록이 있나요?”
“기록은 없지만 전설이 있습니다.”
“그럼 일단 기록부터 만드세요. 사람 대상으로는 하지 말고요.”
상대는 그녀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수현은 웃지 않았다. 귀환을 바라는 사람은 가장 쉽게 속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이용해 누군가 안전을 포기하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어떤 시대의 어떤 세계에서도 의심해야 했다.
수현은 세드나에게 이 접근을 알렸다. 세드나는 비공식 거래나 위험 실험 제안은 정식 보존 절차와 무관하다고 확인하고, 관계자가 기록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범위를 다시 점검했다.
“저 때문에 일이 많아지네요.” 수현이 말했다.
“수현 씨 때문이 아니라, 규정을 무시하고 싶어 하는 사람 때문에 일이 많아지는 겁니다.”
수현은 묘하게 위로받았다.
***
다음 날 보존 경로 심사 결과가 나왔다. 외피 안내문과 안쪽 원문은 서로 다른 시점에 작성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다만 안쪽 질문이 원래 누구에게 접수됐는지와 기록판의 '외부 계열' 신호가 그 질문과 동일한지는 입증되지 않았다.
“같은 보존함에 들어 있다고 같은 발신지인 건 아니군요.” 메이가 말했다.
“네. 택배 상자 하나에 다른 사람이 보낸 물건 둘이 들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택배는 또 뭔가요?”
수현은 설명하려다 웃었다.
“거기도 물건 받았다는 서명이 중요하다는 점은 비슷해요.”
세드나는 심사 결과에 한 줄을 추가했다.
[제0회신함의 원문 질문과 회신 안내문은 보존 과정에서 함께 묶였으나 실제 송·수신 행위의 동일성은 미확인.]
이 문장은 실망스러웠지만 틀리지 않았다. 수현이 원한 것은 아름다운 거짓 답장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길이었다.
***
보존실에서 돌아온 수현은 자신의 일지를 펼쳤다. '외부'라는 단어에는 벌써 밑줄이 여러 겹 그어져 있었다. 과거에는 그 단어를 발견할 때마다 서울을 떠올렸지만 이제는 여러 가능성을 옆에 적었다. 관측소 등록망 바깥, 서로 다른 시설의 연결, 구형 장치의 경유지, 그리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원신호.
메이가 물었다. “이렇게 가능성이 많으면 답을 못 찾는 거 아닌가요?”
“반대로 틀린 길을 빨리 지울 수 있죠. 확인되지 않은 길을 실제 길이라고 믿고 들어가는 것보다 나아요.”
루세는 조사표 아래에 새로운 확인 절차를 넣었다. 과거 신호를 원본으로 인용하려면 기록 작성 시점, 자동 삽입 문구, 보존 경로, 별도 독립 경로의 일치 여부를 모두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검사 항목이 많네요.” 메이가 말했다.
“사람을 이동시키는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더 엄격해야 해.” 루세가 대답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잘못된 지름길에 사람을 잃지 않을 방법은 조금씩 보였다.
그녀는 그날의 결론을 짧게 적었다. '외부는 아직 장소 이름이 아니다.' 그 문장이 낯선 세계의 밤에 작은 안전 표지판처럼 느껴졌다.
***
늦은 오후 왕도 기록원에서 작은 연락이 왔다. 봉인된 실행 확인자의 직무 범위를 심사하던 중 오래된 관리자 서식과 현행 대행 절차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에린 소렐이라는 이름은 그 연결의 시작 문서에 등장했지만, 최근 수현을 이동시킨 담당자라는 증거는 없었다.
“에린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메이가 물었다.
“그렇다고 확정할 수는 없어요.” 수현이 답했다. “적어도 이름 하나로 죄를 덮어씌울 수는 없겠죠.”
그들은 다음 심사 일정에 참석하기로 했다. 수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왕도로 향한 옛 답장이 누군가의 손에 제대로 들어갔는지는 아직 몰랐다. 그러나 한 번 보내지 못했던 질문을 이제 다시 확인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녀는 조용히 노트에 적었다.
[진짜 답장이라면 수신인이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거절할 수도 있어야 한다.]
수현은 누군가에게 답장이 도착했다는 기록을 발견해도 먼저 수신인이 실제로 그것을 받았는지 확인하겠다고 다짐했다. 답장을 보냈다고 표시하는 일은 간단하다. 그러나 대답이 필요한 사람에게 진짜로 도착하게 만드는 일에는 더 많은 책임과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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