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렌이 왕도로 올라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현은 서류를 떨어뜨릴 뻔했다. 제7원정대의 현장 운영이 바쁜 데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걸 스스로 허락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렌은 멀쩡한 걸음으로 여관에 들어왔다. 몸은 많이 회복됐고 얼굴에는 피곤함보다 어색한 기대가 있었다.
“휴가를 냈습니다.”
“누가 승인했어요?” 수현이 물었다.
“브레그 감독관이요. 젠이 이틀간 야간 대체를 맡습니다. 메이가 대신 돌봐 줄 부상자도 다른 치유사에게 인계했고요.”
수현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 웃었다.
“정말 휴가를 쓰는 용사가 됐군요.”
“하지만 놀러 온 것은 아닙니다. 제 의료 기록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휴가에 병원 방문만 넣는 건 한국에서도 흔한 일이긴 해요.”
카이렌은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웃었다. 메이가 옆에서 팔짱을 끼었다.
“의료 기록을 보는 건 좋아요. 다만 몸 상태도 확인받으세요. 쉬라고 나온 휴가에 무리해서 다시 쓰러지면 제가 화낼 겁니다.”
카이렌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처음 이 세계에 온 날 그가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억지로 출정하려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은 진료실에 가는 일을 스스로 정할 만큼 달라졌다.
***
진료 기록 보존실에는 창문이 없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에서 기록관이 환자 본인의 확인을 먼저 받았다. 카이렌은 자신이 읽을 부분을 직접 선택했다. 세드나는 수현이 조사에 동행할 권한을 별도로 확인했다.
“다 공개해도 괜찮습니까?” 기록관이 물었다.
“제 몸에 관한 기록은 제가 알고 싶습니다. 다만 다른 환자의 이름이 나온다면 가려 주세요.” 카이렌이 답했다.
수현은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그의 결정을 대신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기록관은 K형 안정 장치의 보급 출고표, 반납표, 진료용 사용 기록을 나누어 보여 주었다. 장치가 한 번 반납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용자 식별 칸에는 이름 대신 응급 보존 침상 코드가 적혀 있었다.
“그 코드가 제 이름일 수도 있나요?” 카이렌이 물었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서류만으로는 일치 여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수현은 그 말을 받아 적었다. 궁금한 마음이 클수록 단정은 더 위험해졌다.
***
의료 기록에는 숫자와 약어가 많았다. 수현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를 고개를 끄덕이며 넘기지 않았다. 담당 의사는 각 용어의 뜻을 차례로 설명했다. 의식 확인 불가능이라는 표시는 환자가 사망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시간에 의식을 평가할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일정 시간이 지나 진료 담당자가 바뀌면 같은 표시가 다시 쓰이기도 했다.
카이렌은 설명을 듣다가 물었다. “그럼 저는 사흘 동안 누구와 말했는지 알 수 없습니까?”
“당신의 개인 진료 기록과 해당 침상 코드가 일치하는지 확인되면 더 구체적인 경과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 단계가 아니에요.”
수현은 카이렌의 손이 무릎 위에서 살짝 떨리는 것을 보았다. 자신이 아는 용사는 괴물 앞에서도 검을 놓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기록 앞에서는 당황한 젊은 청년이었다.
“여기서 더 볼지, 잠깐 쉬었다 볼지도 카이렌 씨가 결정해요.” 수현이 말했다.
카이렌은 잠깐 창밖을 보았다. “조금 쉬고 싶습니다.”
“좋아요. 담당자님, 쉬는 시간도 기록에 적어 주실 수 있나요?”
의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겠습니다. 오늘 진료를 포기한 것으로 처리되지는 않습니다.”
그제야 카이렌의 어깨가 내려갔다. 그는 물 한 잔을 마셨다. 수현은 과거의 빈 사흘을 찾으러 온 사람이 현재의 한 시간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더 소중하게 느꼈다.
***
기록 중에는 유난히 차가운 문장 하나가 있었다.
[체온 유지 불안정, 사흘간 의식 확인 불가능. 원인 미확정.]
카이렌은 그 줄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흘과 날짜가 일부 겹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기간에 여러 사람의 응급 기록이 겹칠 수 있었다.
“저에게 이런 일이 있었나요?”
의사가 대답했다.
“본인 진료 기록과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당신의 현재 상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손등의 흰 고리가 과거 화상 또는 보호 장치에 의해 생길 수 있다는 정도입니다. 특정 장치를 착용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카이렌은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수현도 눈길이 갔다. 흰 자국은 여전히 둥글었다. 처음에는 마법의 비밀이 새겨진 증거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다친 사람에게 남은 흔적처럼 느껴졌다.
“죽었다가 살아난 게 아니라는 뜻입니까?” 카이렌이 물었다.
“그 여부를 지금 기록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카이렌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수현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모른다고 말해 주는 의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그래야 다음에 뭘 확인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으니까요.”
***
카이렌은 진료실 밖에서 뜻밖의 고백을 했다.
“저는 저 사흘 사이에 제가 누군가를 버렸을까 봐 무서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기억이 없으니 제가 어떤 명령을 어겼을 수도 있잖습니까. 모두가 저를 영웅이라고 부를 때마다 혹시 거짓 이름을 듣는 것 같았어요.”
수현은 가슴이 아팠다. 사람들은 영웅이라는 말을 칭찬으로 쓰지만, 정작 그 호칭을 받는 청년에게는 한 번도 도망치지 않았다는 증명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그 기간의 모든 책임을 다 지라고 할 수는 없어요. 사실도 확인하지 않은 채 죄책감부터 가질 필요는 없고요.”
“그런데 누군가 다쳤다면요?”
“그럼 실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하죠. 막연한 벌을 스스로 주는 건 아무도 낫게 하지 못해요.”
카이렌은 그 말을 곱씹었다. 오래전 계약에 서명하던 순간의 순진함은 여전히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미래를 다른 사람의 설명에만 맡기지 않으려 했다.
***
시장에서 카이렌은 어떤 장갑을 고를지 한참 망설였다. 가장 비싼 장갑에는 금빛 장식이 있었고, 가장 싼 장갑은 손가락을 구부릴 때 솔기가 당겼다. 수현은 고르는 모습을 구경하다 말했다.
“장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손이 중요하죠.”
“전투에서 손을 다치면 위험하니까요.”
“그렇다면 편하게 움직이는 게 좋겠네요.”
카이렌은 중간 가격의 가죽 장갑을 골랐다. 손등의 흰 흔적을 덮는 모양이었다. 수현은 그가 흔적을 부끄러워하는 줄 알았지만 카이렌은 다른 이유를 말했다.
“이건 상처를 숨기려는 게 아닙니다. 겨울에 이 부분이 유난히 시려서요.”
“그럼 진료할 때도 말씀하셨나요?”
“아까 말했습니다. 의사가 보온을 권했습니다.”
수현은 미소 지었다. 그의 선택에는 이제 의사의 설명과 자신의 몸 상태가 들어 있었다.
빵집 앞에서 어린아이가 다가와 카이렌에게 영웅이라며 검을 보여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카이렌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쪼그려 앉았다.
“검은 위험해서 보여 줄 수 없단다. 대신 오늘 내가 산 빵을 보여 줄까?”
아이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카이렌은 빵을 하나 나눠 주고, 모험을 시작하기 전 밥을 잘 먹으라고 말했다. 수현은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영웅이 모든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에게 안전하게 거절하는 방법을 보여 줄 수도 있었다.
카이렌은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휴가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요.”
“그렇죠? 내일부터 또 쉬고 싶어질 거예요.”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다음 휴가는 한 달 뒤로 적어 두었습니다.”
수현은 크게 웃었다.
***
저녁에는 오르카가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북방 회복소에 머무는 라비엔이 다리 치료를 조금씩 받아 가며 기록 정산 절차를 진행 중이고, 원정대에는 당장 복귀하지 않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카이렌은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라비엔이 살아 있다는 걸 처음 들었을 때는 당장 데려오고 싶었습니다.”
“지금은요?” 수현이 물었다.
“본인이 어디에 있을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걸 압니다. 다만 돌아오면 함께 밥을 먹고 싶어요.”
“그 정도 약속이면 충분하겠네요.”
메이가 웃었다. “그때까지 밥값은 누가 내죠?”
“제가 내겠습니다.” 카이렌이 대답했다.
“개인 보수 받기 시작했으니 그 돈에서 내는 거죠?”
카이렌은 귀를 붉혔다. “그렇습니다.”
수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용사에게 개인 보수가 지급된다는 것 자체가 처음 만났을 때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아직 여러 문제가 남았지만, 이제는 세 명이 함께 웃을 수 있었다.
***
진료 기록 심사관은 카이렌에게 다음 절차를 제안했다. 특정 침상 코드와 개인 병력의 일치 여부를 별도 봉인 심사에 제출하는 것이었다. 관련된 다른 환자 신원이 들어 있을 수 있으므로 공개 열람은 허용되지 않았다. 카이렌은 조용히 동의서를 읽었다.
“이걸 신청하면 제 기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 줘야 하나요?”
“아닙니다. 심사관과 의료 정보 관리자만 필요한 범위를 확인합니다. 결과도 귀하의 일치 여부만 통지됩니다.”
카이렌은 고개를 끄덕인 뒤 서명했다. 수현은 그의 손등 흰 고리보다 펜을 쥔 손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여기는 그의 몸에 관한 정보를 다른 사람이 함부로 대신 결정하지 않는 자리였다.
진료실을 나서며 카이렌이 물었다.
“수현 씨는 이 세계를 떠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까?”
“아직요. 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남긴 사람을 찾는 중이에요.”
“저는 수현 씨가 돌아가길 바랍니다.”
수현은 걸음을 멈췄다.
“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네요.”
“처음엔 여기 남아 도와주길 바랐죠. 하지만 제가 쉬는 법을 배운 것처럼 수현 씨도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수현은 웃으려다가 눈을 깜박였다. 영웅이라는 이름이 그에게 어울리는 이유는 무거운 검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
진료실을 나서기 전 카이렌은 손등의 흉터를 진료 기록에 사진처럼 남기는 마법 복사에 동의했다. 기록관은 확대된 모양과 현재의 피부 상태를 구분해서 적었다. 과거에 어떤 장치를 사용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지금 통증이 있다면 그 통증 자체는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원인을 모르면 아무것도 못 하는 줄 알았습니다.” 카이렌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아픈 증상을 치료하면서 원인을 더 살필 수 있습니다.” 의사가 답했다.
수현은 그 말에 안도했다. 모든 진실을 알아낸 뒤에야 사람을 돌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카이렌은 처방받은 연고를 받아 들고 설명을 다시 확인했다. 하루 두 번, 상처가 붉어지면 사용을 멈추고 다시 방문할 것. 그는 수첩에 그 규칙을 적었다.
“예전이라면 이걸 기록할 시간에 검을 잡았겠죠.”
수현이 웃었다. “지금도 검을 잡으시겠죠. 다만 손이 아프면 쉴 수 있는 용사가 된 거예요.”
카이렌은 연고를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다. 그 모습이 수현에게는 어떤 영웅담보다 오래 남았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오래 지킬 수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봉인 심사 접수증이 발급됐다. 결과를 확인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카이렌은 일정에 맞춰 원정대에 돌아가기로 했다. 수현은 휴가 마지막 날인 만큼 왕도 시장이라도 구경하고 가라고 권했다.
“구경해도 되는 겁니까?”
“휴가는 원래 그런 데 쓰는 거예요.”
카이렌은 한참 고민하다가 빵집으로 향했다. 그는 메이에게 줄 구운 과자와 젠에게 줄 작은 화살깃 장식, 데런에게 줄 말용 솔을 샀다. 자기 것을 고르라는 말에야 장갑 한 켤레를 집어 들었다.
수현은 장갑 계산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의 보수로 그가 스스로 산 물건이었다.
그날 오후 세드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환 실행 심사관이 최종 승인 대장의 제한된 항목만 공개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거기에는 실행자 이름 대신 '보호된 직무대행'이라는 표기와 함께 처리 시각이 남아 있었다.
수현은 날짜를 확인했다. 메이의 원문 진정서가 접수된 직후였다. 당사자 동의를 확인한 기록은 여전히 없었다.
“카이렌의 사흘도, 제 소환도, 아직 답이 없네요.”
세드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답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맞는 질문을 확인 중일 수도 있습니다.”
수현은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이제 그녀는 그 질문을 직접 가져가려 했다.
그는 그날 밤 치료 시간과 휴식 시간을 모두 자신의 일정표에 적었다. 그 작은 표시가 사라진 사흘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의 하루만큼은 스스로 기억하겠다는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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