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회신함을 열기 위한 회의는 오전 여덟 시에 열렸다. 참석자 명단에는 사람보다 직책이 먼저 적혀 있었다. 보존실장, 봉인 감정관, 기록 보호 심사관, 당사자, 입회인. 수현은 자신이 마지막 칸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당사자 다음에 저를 또 쓰셨네요.”
모라는 종이를 확인했다.
“당사자와 입회인을 같은 사람으로 적으면 안 된다는 규정입니다. 외부 신청인이 입회인까지 해야 할 사정이면 별도 사유가 필요해요.”
“그럼 전 당사자만 할게요. 책임을 두 사람 몫으로 맡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요.”
세드나가 입회인 칸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나머지 입회인은 감독청에서 파견된 할드였다. 할드는 84화 때 오래된 봉인 수신판을 다룬 감정관이었다. 수현은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이번에도 비파괴 검사죠?”
“당연합니다. 보존된 사실을 확인하려다가 보존 대상을 없애면 제 직업도 사라지죠.”
“저희 세계에도 그런 말이 필요할 것 같아요.”
할드는 무슨 뜻인지 모른 채 어깨를 으쓱했다. 루세는 기계 장치 담당으로 바깥에서 대기했다. 봉인함이 장치인지 문서 보관함인지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모든 열쇠를 맡길 수 없었다.
***
열쇠가 세 개라는 설명부터가 문제였다. 가장 큰 열쇠는 외피를 여는 것이었다. 두 번째 열쇠는 내함의 기계식 걸쇠를 잠그는 데 쓰였다. 세 번째는 실제 쇳덩이가 아니라 밀랍 인장의 파손 여부를 확인하는 등록표였다.
메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 번째는 열쇠가 아니잖아요?”
“열쇠처럼 기능하는 확인 절차입니다.” 모라가 대답했다.
“그럼 아무도 모르게 내함을 열 수는 없다는 뜻이군요.”
“원래 설계가 그랬을 겁니다. 지금도 그대로 작동하는지는 검사해야 하고요.”
수현은 열쇠 각각의 담당자가 달라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문을 열 수 있다는 사실과, 누군가 문을 열었다는 기록을 남기는 일은 서로 달랐다. 그녀는 여기서도 현실의 회사 금고를 떠올렸다. 열쇠가 두 개라고 해서 금고 안의 돈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법은 없다. 누가 언제 왜 열었는지 알 수 없다면 열쇠는 그저 비싼 장식이었다.
“인장 등록표가 없다면 어떻게 하죠?”
“파손 상태 확인 후 '초기 봉인 여부 미확정'이라고 기록하고 외피만 검사합니다.”
“그 문구 마음에 드네요.”
모라는 이상하다는 듯 수현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신청인은 그렇게 쓰는 걸 싫어하는데요.”
“모르는데 안다고 쓰는 건 더 싫어요.”
***
보존 신청서 뒷장에는 '사본 제공 시 원문의 순서를 임의로 재배열하지 말 것'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수현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사건을 조사할 때도 자료를 보기 편하다는 이유로 시간순으로 다시 배열했다가 원래 문서가 만들어진 맥락을 놓치는 일이 있었다.
“안쪽 봉투가 먼저 만들어졌는지, 바깥 봉투가 먼저 만들어졌는지도 확인할 수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잉크와 종이의 연도는 대강 비교할 수 있어요. 다만 글을 쓴 정확한 순서를 알아내기는 어렵습니다.” 할드가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럼 서로의 앞뒤에 있었다는 이유로 같은 사람이 작성했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네요.”
메이가 종이 한 장을 가리켰다. 오래된 필체가 지금의 왕국 공문서와 매우 달랐다. 그녀는 처음엔 글자를 제대로 읽지 못해 자신이 공부를 부족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세드나는 옛 서체를 읽을 수 있는 사서를 부르자고 했다.
“독해가 안 된다고 해서 당사자를 탓할 일이 아니죠. 옛 양식을 만든 쪽에서 설명을 해 줘야 해요.” 수현이 덧붙였다.
그 말에 메이는 미소 지었다. “제가 처음 치료비 계약서를 받았을 때도 이런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랬다면 적어도 무슨 비용을 부담하는지 알았겠죠.”
두 사람은 잠깐 말이 없었다. 종이 위의 오래된 글씨와 메이 손목의 금속 문양은 너무 다른 것처럼 보였지만, 둘 다 누군가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는 점에선 닮아 있었다.
할드는 유리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다 말했다.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존의 의미가 있다면, 좋은 보존이 아니겠군요.”
수현은 그 말이 이 부서의 새 원칙이 되길 바랐다.
***
외피가 열리자 새 천에 싸인 좁은 서류함이 나타났다. 누군가 이관 당시 먼지와 습기를 막기 위해 덧씌운 것이었다. 그 위에 붙은 종이 표지는 최근 왕도 양식이었다.
[제0회신 내함. 취급 시 부록 확인.]
“부록은요?” 수현이 물었다.
모라가 서류철을 펼쳤다. 제목만 있는 한 장이 나왔다. '제0회신 관련 부록'이라 적혀 있을 뿐 목차가 비어 있었다.
“목차가 비어 있다고요?” 메이가 물었다.
“정확하게는 목차 작성이 중단된 겁니다. 이전 담당자가 항목을 만들기 전에 이관 작업이 멈춘 모양이에요.”
“빈 목차를 근거로 빈 문서라고 할 순 없겠네요.” 수현이 말했다.
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실물 확인을 하려는 거죠.”
할드는 내함의 무게와 표면을 먼저 기록했다. 뚜껑에는 오래된 칠이 벗겨져 있었고 걸쇠 옆에는 작은 홈이 여러 개 있었다. 루세가 멀리서 보는 것만 허락받은 채 말했다.
“통신 장치 자체라기보다는 기록을 보관하던 보호 케이스에 가까워 보여. 장비 접속 단자는 없지만 예전 모델에는 안쪽에 얇은 인쇄판이 들어갔거든.”
“그러면 위험한 마력을 흘려보내는 장치일 가능성은 낮은 건가요?”
“겉으로만 보면 그렇지만, 검사 없이 안전하다고 말하진 않겠어.”
그 말에 수현은 만족했다.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기술자는 과장된 희망을 파는 사람보다 훨씬 믿음직했다.
***
점심 무렵, 검사 전에 잠깐 바깥 공기를 쐬던 메이가 수현을 불렀다. 그녀는 손목 고리에 난 흐릿한 긁힘을 보여 주었다.
“이거 제가 잘못해서 생긴 줄 알았는데, 지난달부터 같은 위치가 갈라지고 있어요.”
“통증은요?”
“차가울 때 쑤셔요. 치유술을 쓰고 나면 조금 더 심해지고요.”
수현은 고리를 함부로 만지지 않았다. 원래 계약 장치를 열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피부에 상처를 내고 있다면 치료가 먼저였다.
“오늘 돌아가면 메이 씨가 직접 진료 기록을 남겨 주세요. 치료비 이의와 별개의 건강 문제로요.”
“그렇게 분리하면 또 서류가 늘겠죠.”
“서류가 늘어도 상처는 줄어야죠.”
메이는 피식 웃었다. “노무사는 원래 그렇게 말장난을 잘하나요?”
“사무실에서 오래 버티려면 조금요.”
사실 수현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세계에서 한 사람에게 붙는 빚이 손목에 물리적으로 달라붙는다는 건 너무 잔인했다. 그런데 자신이 잘 모르는 마법 장치를 억지로 풀어 주겠다고 약속할 수도 없었다. 먼저 열람권을 얻고, 비용 산정이 바뀌고, 건강 피해를 기록하고, 그 뒤에서야 누군가 정당한 권한을 가지고 고리를 처리해야 했다.
메이가 말했다.
“수현 씨는 집에 가야 해요. 제 문제까지 끝내고 가려면 너무 늦을지도 몰라요.”
수현은 잠깐 침묵했다.
“제가 다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렸어요. 메이 씨가 직접 따지는 모습 봤으니까요. 그게 끝까지 남는 변화일 거예요.”
***
내함을 검사하는 직원 중 한 명은 오늘 야간 근무까지 연장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얼굴이 굳었다. 그는 전날에도 늦게 퇴근했다. 수현은 서류에 적힌 근무표를 보지 않고 그에게 직접 물었다.
“오늘 연장근무에 동의하셨나요?”
“관람객이 오면 해야 하죠.”
“제가 관람객은 아닌 것 같은데요.”
직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모라가 근무표를 확인했다. 보존 작업은 급박한 재난이 아니었고, 장갑과 도구를 교대자에게 넘길 수 있었다. 야간에 무리해서 원본을 다루면 실수가 생길 위험도 더 높았다.
“오늘 밤에 끝낼 필요 없습니다.” 모라가 말했다. “절차를 연기하겠습니다.”
직원이 놀라 물었다. “그럼 신청인이 화내지 않을까요?”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원하는 건 서둘러 열린 빈 상자가 아니라, 제대로 보존된 원본이에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메이는 수현을 옆에서 툭 건드렸다.
“수현 씨 또 휴게 시간 이야기해요.”
“그걸 잊으면 제가 여기서 한 일이 없잖아요.”
처음에는 이런 대화가 이상했을 것이다. 이제는 직원 몇 명이 스스로 퇴근 시간을 확인했다. 근무를 멈추는 기준이 생기면 누구도 약하다는 이유로 일에서 밀려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할드는 봉인의 상태를 정리해 서명했다. 서명 아래에는 작업 중단 이유가 자세히 적혔다. 수현은 그 문장을 좋아했다. 중단도 실패로만 기록되지 않아야 했다. 때로는 멈췄기 때문에 다음 날까지 원본이 살아남았다.
***
오후의 검사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종이가 아니라 종이 가루였다. 내함의 모서리에 오래된 얇은 봉투가 끼어 있었다. 할드는 털어 내지 않고 위치를 촬영했다. 모라가 숫자와 그림을 맞춰 보고 나서야 작은 브러시로 모서리를 정리했다.
그다음에는 밀랍 봉인 하나가 나타났다. 오래된 별 문양과 작게 갈라진 균열이 보였다. 할드는 즉시 손을 멈췄다.
“등록표에 있는 것과 모양이 다릅니다.”
모라가 서류를 내밀었다. 등록표에는 굽은 별 세 개가 있었지만 실제 봉인에는 두 개만 선명했다.
“봉인이 바뀐 건가요?” 누군가 물었다.
“아직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할드가 대답했다. “원래 세 번째 별이 눌리지 않았을 수도 있고, 등록표의 그림이 거칠었을 수도 있죠. 가장자리 균열을 비교해야 해요.”
모라는 일단 내함을 열지 않는 쪽을 제안했다. 그러나 기계식 걸쇠는 봉인과 독립돼 있었고, 그 부분의 열람 조건은 이미 승인됐다. 몇 분간 토론이 이어졌다. 수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말만 했다.
“문서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게 목적입니다. 원본이 손상될 위험이 생기면 오늘은 멈춰도 됩니다.”
할드는 엄지손가락만 한 거울로 걸쇠 안쪽을 살폈다.
“봉인을 깨지 않고 내부 공간을 확인할 수 있겠군요. 내함 본체는 열지 않겠습니다.”
루세는 좁은 홈으로 빛을 비추는 도구를 만들었다. 얇은 유리판에 반사된 내부에는 둥근 금속 원판이 아니라 접힌 종이 뭉치가 보였다.
수현은 숨을 고르며 물었다.
“글자가 보이나요?”
“첫 장의 제목 일부만요.”
모라가 확대 렌즈에 눈을 가져갔다.
“'수신 확인...' 다음이 잘렸습니다. 그리고 별도 포장된 봉투가 하나 더 있습니다.”
기록은 있었다. 그러나 어떤 기록인지는 여전히 몰랐다.
***
수현은 그날 열린 적 없는 함에서 발견한 것들을 차례로 적었다.
[내함 실재. 내부 종이 뭉치와 별도 봉투 확인. 원문 내용 미확인. 봉인 무결성 불확실. 안전상 비파괴 추가 검사 필요.]
그런데 모라가 서류를 정리하던 중 작은 발견을 했다. 비어 있던 목차의 마지막에 잉크가 거의 보이지 않는 한 줄이 있었다. 다른 종이를 덮어 놓았을 때 눌려 생긴 자국 같았다.
“이건 본문이 아니에요. 원래 목차에 무슨 항목을 넣으려 했는지 적어 놓은 메모일 수 있어요.”
루세가 비스듬히 빛을 비추자 글자가 드러났다.
[질문 원문과 회신 미작성 사유를 서로 다른 봉투에 넣을 것.]
메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회신을 안 한 이유도 따로 있었어요?”
“목차 작성자가 그렇게 적어 놨다는 것까지는 확인했죠.” 수현이 말했다.
세드나가 덧붙였다.
“실제로 두 봉투에 어떤 문서가 들어갔는지는 열어 봐야 압니다. 이번에 나온 메모만으로 답장을 일부러 숨겼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그때 마틸에게서 새 통지가 도착했다. 전날의 익명 정정 요청은 접수자 본인 확인이 되지 않아 처리 보류됐다는 내용이었다. 수현은 그 통지가 반가웠다. 누군가 '이미 끝난 일'이라 말한다고 정말 끝나는 건 아니었다.
마틸은 추가 허가 신청서를 내밀었다.
“봉인을 파손하지 않고 본문을 확인할 수 있는 보존 기술 검토를 의뢰하겠습니다. 다만 별도 봉투 중 하나에는 생존자의 사생활이 있을 수 있어 제한적인 내용 열람만 허용될 겁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제한부터 지키죠.”
방문을 나서던 메이가 물었다.
“그런데 수현 씨, 우리가 찾는 질문이 정말 집으로 돌아가는 질문이라면 어떡하죠?”
“그럴 수도 있죠.”
“아니라면요?”
수현은 손에 든 목차 사본을 바라보았다.
“그럼 다른 사람의 질문을 그 사람에게 돌려줘야겠죠. 제 답으로 훔쳐 쓰지 말고요.”
메이는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아직 읽지 못한 문장을 기다리며 보존실을 나왔다. 어느 쪽이든, 이번엔 누군가의 침묵을 동의로 바꾸지 않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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