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소환·회신 공동보존실에는 문이 세 개 있었다.
첫 번째 문에는 '방문자 접수', 두 번째 문에는 '보존품 이관', 세 번째 문에는 '위험 장치 취급'이라고 적혀 있었다. 수현은 왼쪽부터 읽다가 자연스럽게 가운데 문을 향했다. 세드나가 소매를 잡았다.
“우린 첫 번째 문입니다.”
“알아요. 그냥 본능적으로 가운데 문이 더 빨라 보였어요.”
“기록원이 사람을 오래 붙들어 두는 데는 이유가 있답니다.”
“그 이유가 점심시간만은 아니길 바라요.”
세드나는 웃지 않으려다가 실패했다. 메이는 그 뒤에서 손목을 문질렀다. 금속 고리의 붉은 빛이 연해진 날도 있었지만 그것이 풀린 적은 없었다. 수현은 메이가 오늘 쉬는 날을 바꿔 이곳까지 동행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조사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치유사에게 또 다른 무급 업무를 떠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메이 씨, 접수만 확인하고 돌아가셔도 됩니다. 오늘은 제가 알아볼 수 있는 범위가 더 많을 거예요.”
“제가 보낸 첫 민원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요. 확인할 건 확인하겠어요. 대신 오후에는 돌아가서 잠을 잘 겁니다.”
“좋아요. 그게 제일 믿음직한 계획이네요.”
접수 창구의 직원은 신청서를 한 장씩 넘기며 질문했다. 첫 번째는 수현 본인의 귀환 이의 사건 번호, 두 번째는 메이의 최초 민원 정정 접수 번호였다. 세 번째는 왜 두 사건을 하나의 보존함 열람 신청에 적었는지였다. 수현은 미리 준비해 온 도표를 꺼냈다.
“같은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두 사건의 전달 경로에 같은 보존함이 참조돼 있어, 기록의 연결 여부를 확인하려는 겁니다.”
직원이 문장을 따라 적었다. 수현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안심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적는 일보다 이름과 사실을 섣불리 묶지 않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걸 이곳에 와서 여러 번 배웠다.
***
담당 기록관 모라는 키가 작고 말수가 적은 여성이었다. 책상 위에는 잉크병보다 종이를 누르는 돌이 많았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얇은 문서가 날아다니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제0회신 보존함은 현재 전시되지 않습니다.”
“전시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실물 목록과 보존 상태부터 확인하고 싶습니다.”
“목록은 열람할 수 있습니다. 내용은 별도 심사 대상입니다.”
모라는 종이 세 장을 펼쳤다. 첫째 장의 물품 번호는 오래된 양식이었다. 둘째 장은 왕도 이전 당시 작성된 이관표였다. 셋째 장에는 새 보관 위치가 적혀 있었지만, 마지막 칸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이게 폐기 표시는 아니죠?” 수현이 물었다.
“아닙니다. 위치 변경 보류 표시입니다. 예전에 봉인함의 외피가 훼손돼서 내함과 외함을 따로 보관했어요. 둘을 같은 물건으로 다시 합치려면 감독청 확인이 필요합니다.”
“함 하나를 찾으러 왔는데 함이 둘이 됐네요.” 메이가 중얼거렸다.
“원래부터 둘이었습니다. 바깥 상자와 안쪽 보존 케이스죠.” 모라가 대꾸했다.
수현은 사소해 보이는 그 정정을 받아 적었다. 어떤 문서는 겉봉투에 적힌 표제를 내용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어떤 상자는 외피의 번호 때문에 내부 기록까지 같은 날짜에 작성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럼 현재 확인 가능한 것은 제0회신함의 외피와 내함이 각각 보존돼 있다는 목록뿐인가요?”
“정확합니다. 안에 원문이 있는지까지 확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전 담당자가 적어 둔 목록이 남아 있을 뿐이에요.”
수현은 '이관 목록'이라는 글자에 줄을 쳤다. 오래된 목록은 중요한 단서였다. 그러나 목록을 한 번 읽었다고 실제 편지를 손에 넣은 건 아니었다.
***
모라가 찾아온 자료 중에는 외피보다 먼저 도착한 보존 요청서가 한 장 있었다. 같은 연도에 세 기관이 자료를 맡겠다고 주장했다. 수문 조합은 장치 부품이라 했고, 기상 분관은 관측 기록이라고 했으며, 공동보존실은 분쟁 자료라고 적었다. 어느 주장도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 수현은 서로 다른 서류에 같은 원문이 들어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원본이 세 개라는 뜻인가요?” 메이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고, 같은 종이를 세 부서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수도 있어요.” 수현이 대답했다. “이전 번호와 담당자 확인부터 해 봐야죠.”
모라는 그 말에 작은 미소를 보였다. 이전 담당자들에게선 서랍 번호를 바꾸는 일을 굉장히 큰 사건처럼 다뤘다는 기록이 있었다. 보존실의 예산이 줄어드는 해에는 종이를 줄이려고 같은 자료를 합철했고, 이후에는 합철해 놓은 사실을 잊어버렸다.
“사람이 일을 잘하려고 한 것도 원인이 될 수 있겠네요.” 수현이 말했다.
“예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 사정을 확인하는 것과 지금의 누락을 그냥 넘어가는 건 다른 일이죠.”
수현은 세 부서의 인계일을 표로 그렸다. 일부 날짜는 기상 분관의 물시계 기준이어서 왕도 달력으로 정확히 환산되지 않았다. 그녀는 각 칸에 '날짜 추정' 표시를 붙였다. 그 표시가 언젠가 결정적인 오해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메이는 자료를 들여다보다 말했다.
“생각보다 추리가 재미있긴 해요. 그런데 이런 일을 직업으로 하면 허리가 아플 것 같아요.”
“왜요?”
“앉아서 글만 읽잖아요.”
“맞아요. 원래 제 세계에선 그래서 커피가 필요했어요.”
“커피가 뭔데요?”
수현은 커피 향을 설명하려다가 문득 목이 메었다. 서울의 작은 일상이 뜻밖의 순간에 그리움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잠깐 침묵한 뒤 웃으며 말했다.
“엄청 쓴데 자꾸 마시게 되는 음료요. 여기선 제가 안 마셔도 되는 게 하나 늘었네요.”
***
복도 끝에는 낯익은 저울 문장이 있었다. 공동보존실 감독관의 제복에 달린 문장이 세드나의 것과 닮았다. 감독관 마틸은 열람 신청서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외부 세계 출신이라는 말, 기록에 적어도 됩니까?”
“그 사실은 제 진술입니다. 제 국적이나 집 주소를 공개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열람 심사를 하려면 사건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성과 상세 주소는 달라요. 신원 확인이 필요하면 별도의 비공개 절차를 제시해 주세요.”
마틸은 한동안 수현을 살폈다. 이어 필기 담당에게 개인 거주지 기재란을 가리라고 지시했다. 수현은 그 한 번의 가림이 마음에 들었다. 중요한 증거를 얻고 싶다는 초조함이 생겨도 누군가에게 불필요하게 많은 개인정보를 내놓아서는 안 됐다. 서울에 두고 온 삶이 아무리 그립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제0회신함은 옛 질문 기록을 보존하는 데 쓰였습니다.” 마틸이 말했다. “그 안에는 타인의 이름이나 신체 상태가 적혀 있을 수 있습니다. 전체 공개는 어렵습니다.”
“일단 누가 열람을 허용할 권한을 갖는지, 어떤 부분을 가릴 수 있는지부터 알려 주세요.”
“좋습니다. 입회인 두 명, 보존 담당 한 명, 그리고 심사 대상 기록의 사생활 보호가 필요합니다. 함을 여는 자체가 내용 공개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세드나가 옆에서 조용히 적었다. 그 모습을 본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서울의 사무실에 있었다면 규정을 묻는 날에는 보통 커피가 식었을 텐데, 이곳에서는 마법 봉인함의 열람도 결국 사본 발급부터 시작했다.
***
점심에는 여관에서 가져온 빵을 먹었다. 메이는 빵을 반으로 나누다가 고리에 붙어 있던 얇은 숫자가 다시 바뀌는 것을 발견했다.
“또 비용이 붙었나요?” 수현이 물었다.
“아뇨. 어제 제가 쓰지 않은 마석 예비비가 '산정 검토 중'으로 옮겨졌어요. 그건 좋지만, 치료비 전체가 없어진 건 아니에요.”
“정확하게 보신 거예요. 금액 하나가 이동한 이유는 따로 확인해야 해요.”
“그걸 제 입으로 말해야 알아듣는다는 게 좀 지겨워요.”
수현은 대답 대신 물병을 건넸다. 메이는 물을 마신 뒤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죠? 예전엔 제가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걸 죄처럼 느꼈거든요. 이제는 지겹다고 말하면 덜 무서워요.”
“그게 제가 이 세계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뇨. 아직 제 손목은 안 풀렸으니까요.”
“그렇죠. 거기까지는 여전히 숙제죠.”
메이는 수현의 답이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빚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고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빚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그저 빚으로만 남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
외피 검사 전에 모라는 실물 촬영 기록을 담당할 보조 직원들에게 교육했다. 낡은 판을 건드리기 전에 손을 씻고, 물건의 각 면을 순서대로 찍고, 못 알아보는 글자는 추정해서 적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수현은 교육에 참여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모라는 보존 품목을 만지지 않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한 직원이 질문했다. “분명히 숫자 셋인데 왜 '읽기 어려움'이라고 적어야 하죠?”
모라는 그 숫자와 비슷한 예시를 보여 주었다. 종이 한쪽에 묻은 물 때문에 3이 8처럼 보였다. 숫자 하나가 바뀌면 보관 위치가 다른 칸으로 연결됐다.
“보고 싶은 번호를 본다고 기록하는 순간 그 물건은 길을 잃습니다.” 모라가 말했다.
수현은 속으로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되뇌었다. 보고 싶은 귀환 문장만 찾다 보면 실제 경로를 놓칠지도 몰랐다. 평생 구체적인 사실을 다뤄 온 자신도 그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때 복도에서 두 직원이 언성을 높였다. 한 사람은 점심 교대를 마치기 전 상자를 옮기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 인력 두 명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수현은 끼어들지 않았다. 다만 모라에게 그 작업의 안전 기준을 물었다. 모라는 곧장 복도로 나가 상자 운반은 이인 작업이라고 확인했다. 두 직원은 불만을 숨기지 않았지만 결국 손수레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저 때문에 괜히 늦어진 건 아니죠?” 수현이 물었다.
“아닙니다. 늦어질 걸 늦어지게 했을 뿐이죠.” 모라가 말했다.
그 말이 수현에게는 오늘 가장 믿음직한 설명이었다. 서류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은 억울할 수 있어도,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기다리는 시간까지 잘못된 지연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
오후에는 이관 목록의 원본과 복제본을 대조했다. 가장 이상한 것은 수신 대상 이름란이 비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 밑에 '현장 확인인 미특정'이라는 표기가 추가돼 있었다. 모라는 그 표기가 이관 당시 붙었는지, 원래 붙었는지 아직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현재 확인인의 이름을 적어 넣으면 조회가 빨라집니다.” 한 직원이 말했다.
“그게 저라는 증거가 있나요?” 수현이 물었다.
직원은 당황했다. “신청하신 분이니까요.”
“신청한 사람과 원본의 수신인이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죠. 지금 제 이름을 써 넣으면 나중에는 그게 근거처럼 보일 겁니다.”
모라는 직원에게 새 메모지를 주었다.
“가설은 원본 말고 참고란에 적으세요. 제0회신함의 수신자는 아직 미확인입니다.”
작은 논쟁이 끝나자 마틸이 서류 두 장을 내밀었다. 첫 번째는 외피 확인 허가서였다. 두 번째에는 내함의 비파괴 촬영과 봉인 상태 검사를 허용한다는 조건이 적혀 있었다. 내용 열람은 아직 승인되지 않았다.
수현은 허가서부터 읽었다.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얻지 못했는지를 구분해야 했다. 그녀는 서명란 앞에 멈춰 섰다.
“저는 검사 결과를 받는 당사자로 서명할 수 있겠지만, 함을 여는 결정에는 동의했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게 해 주세요.”
마틸은 작은 수정 문구를 넣었다. 수현은 그제야 펜을 들었다.
***
해가 질 무렵 외피가 운반됐다. 은빛 끈으로 묶인 나무 상자는 생각보다 초라했다. 수현은 무심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이 세계에 데려온 봉투도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종이처럼 보였으니까.
루세가 상자에 손을 뻗으려다가 멈췄다.
“봉인 상태만 확인할 거야. 장치를 켜지 않아.”
“그 말부터 해 주시니 좋네요.” 수현이 답했다.
뚜껑 옆에는 세 줄의 음각이 있었다. 맨 위는 이전 연도, 가운데는 보존 구획, 맨 아래는 다른 곳에서 긁혀 온 듯 흐릿했다. 루세는 빛을 비스듬히 비추고 조용히 말했다.
“아직 글자는 못 읽겠어. 다만 여기에 한 번 이상 인계가 있었다는 표시가 있어.”
모라가 원래 목록과 촬영본을 차례로 기록했다. 외피 자체에 있는 상처와 오래된 수리 흔적이 같은 물건임을 확인하는 데는 도움이 됐다. 그러나 그 안에 있던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때 복도에서 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접수 직원이 봉투를 내밀었다.
“이 함과 관련된 기록 변경 신청이 오늘 접수됐습니다. 누가 보냈는지는 확인 중인데, 내용부터 보셔야겠습니다.”
수현이 펼친 종이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제0회신 보존함의 ‘회신 미작성’ 표기를 ‘처리 종결’로 고쳐 주십시오. 이미 확인인이 배정되었으므로 별도 질문은 불필요합니다.]
서명칸은 비어 있었다.
수현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원본을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질문을 끝났다고 고쳐 달라는 사람이 있네요.”
마틸의 표정이 굳었다.
“이 신청서는 효력이 없습니다. 신청인 신원도 확인되지 않았고, 원본 검토 전에 내용 정정은 할 수 없어요.”
“그럼 우선 변경 신청도 보존해 주세요.”
“왜죠?”
수현은 닫힌 나무 상자를 보았다.
“누군가 이 기록이 끝났다고 생각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확인할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처음으로 수현은 오래된 보존함보다 방금 도착한 통지서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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