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9화
PAYLUA ORIGINAL · 제9화

9화. 공작의 인장

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6,457자

오프라인 책장
밧줄 하나가 사람 목숨을 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수현은 그날 처음 알았다. 그런데 그 밧줄이 하필이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이쪽으로 묶으세요!” 오르카가 소리쳤다. “어디에요?” “저기 큰 바위에!” 수현은 밧줄 끝을 들고 달려갔다. 바위는 사람 허리만 했다. 손으로 당겨 봐도 꿈쩍하지 않았다. 튼튼하긴 하겠지. 문제는 매듭이었다. 수현은 서울에서 신발 끈도 자주 풀리는 사람이었다. 사람의 임금 체불을 계산할 줄은 알아도 바위에 밧줄을 묶는 방법까지 배운 건 아니었다. “이렇게요?” “아뇨! 한 번 더 감아요!” “이렇게?” “반대로요!” “아, 진짜!” 둘이 한참 씨름한 끝에 밧줄이 겨우 고정됐다. 안쪽에서 젠이 소리쳤다. “당깁니다!” 밧줄이 팽팽해졌다. 수현은 오르카와 함께 온몸으로 버텼다. 모래가 발밑에서 미끄러졌다. 손바닥이 따끔했다. 그런데 놓을 수가 없었다. “하나, 둘, 셋!” 한 사람이 먼지 속에서 나타났다. 데런이었다. 한쪽 어깨를 다친 채 기침을 하고 있었다. “젠은요?” 수현이 물었다. “안에 있어요. 카이렌하고 메이도!” “왜요?” “안쪽에 사람이 있어요!” 수현이 잠깐 귀를 의심했다. “사람이요?” “유적 관리인이 갇혀 있었어요. 우리보다 먼저 들어왔다가 무너진 모양이에요!” 수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럼 그냥 물건만 가져오면 되는 임무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을 구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런데 현장 조사 보고서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이 없었다. 오르카가 마차에서 새 밧줄을 꺼냈다. “데런, 너는 손을 치료해! 내가 끌어 올린다!” “팔 괜찮아요?” “깁스는 했지만 다리가 부러진 건 아니니까!” 수현은 오르카의 반대편을 잡았다. 그때 안쪽에서 작은 빛이 번쩍였다. 젊은 여자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메이였다. 그녀의 팔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메이 씨!” 수현이 달려갔다. “괜찮아요.” “금지어!” 메이가 힘없이 웃었다. “미안해요. 그럼 안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 수현은 메이의 팔을 붙들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도와주죠.” 젠과 카이렌도 뒤이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나이 든 남자를 부축하고 있었다. 남자의 옷에는 성역 관리국의 문장이 달려 있었다. 카이렌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발걸음은 똑바랐다. 수현은 숨을 내쉬었다. 돌아왔다. 정말 돌아왔다. 그걸 확인하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수현은 그대로 바위 옆에 주저앉았다. “수현 씨?” 카이렌이 다가왔다. “다치셨습니까?” “아뇨.”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냥 심장이 엄청 뛰어요.” 카이렌이 무릎을 굽혔다. “죄송합니다. 또 걱정 끼쳐 드렸네요.”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사과하지 마세요.” “왜요?” “살아서 돌아왔잖아요.” 그 말에 카이렌이 가만히 웃었다. *** 구조된 관리인의 이름은 로한이었다. 그는 폐광 안에 있던 오래된 문서를 회수하러 들어갔다가 바닥이 무너지는 바람에 갇혔다고 했다. 문제의 봉인 물품이 무엇인지는 그도 모르겠다고 했다. 적어도 수현 앞에서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문서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는데요.” 카이렌이 물었다. “나는 안전 점검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소.” 로한이 대답했다. 수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똑같은 폐광에 들어가면서 한쪽은 문서를 회수하라 하고, 다른 쪽은 안전을 점검하라 한다. 명령서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두 명령서를 비교해 볼 수 있을까요?” 로한이 수현을 바라봤다. “당신은 누구요?” “외부 상담인입니다.” “어디 소속?” “그건 설명이 좀 길어요.” 로한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본부에서 나온 감찰관?”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이 다쳤으니까요.” 수현이 먼저 말했다. “이번 일로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확인하려면 명령이 어떻게 내려왔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로한은 한참 침묵했다. 그러고는 품에서 반쯤 찢어진 문서 한 장을 꺼냈다. “이건 내 것의 사본이오.” 수현은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로한의 임무는 ‘폐광 안전 상태 조사 및 출입 제한 조치’였다. 카이렌의 임무는 ‘봉인 물품 회수’였다. 두 문서의 명령 날짜는 같았다. 명령을 발행한 곳도 같았다. [왕립용사길드 특별 회복 관리국.] 수현은 그 이름을 보고 시선을 멈췄다. 치유 비용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 바로 그 부서였다. “이 서류, 조금 더 확인해도 될까요?” 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문서 아래쪽을 살폈다. 발행 승인권자에는 작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사자 문양. 그리고 그 아래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벨튼 공작.] 아. 이름이 또 나왔다. 수현은 서류를 접지 않고 그대로 내려놓았다. 한 가지 사건에서 같은 이름이 두 번 나오는 건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부서와 다른 계약에서 계속 같은 승인권자가 나타난다면 확인해 볼 이유는 충분했다. 다만 확인한다는 것과 범인으로 단정한다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야영지로 돌아온 뒤, 회의가 열리기 전 수현은 로한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로한은 오래된 문서를 관리하는 사람답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왜 폐광에 들어갔는지 궁금하겠지.” “네. 안전 점검이라고 하셨는데요.” “그곳 지반이 불안하다는 보고가 세 번 들어왔소. 그런데 출입 제한 명령이 계속 보류됐지.” “누가 보류했나요?” “상부에서.”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부. 이 세계에서도 가장 범위가 넓은 단어였다. 상부가 누구인지 물으면 그 위의 상부가 있고, 그 위엔 더 높은 상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로한 씨는 직접 확인하러 가신 건가요?” “그렇소. 일단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야 하니까.” “위험한 줄 알면서도요?” 로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누군가는 확인해야 하잖소.” 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또 나왔다.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카이렌도 그 말을 했고 메이도 비슷한 말을 했다. 모두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그 좋은 마음이 조직의 빈자리를 떠받치고 있었다. “혼자 들어가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점검을 요청할 수도 있었잖아요.” “요청은 했소.” 로한이 소매를 걷었다. 손목에는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지원 인원이 없다고 했지.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는 없었어.” 수현은 그 상처를 바라봤다. “이번엔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 “무슨 뜻이오?” “같은 부서에 있는 분들하고 정식으로 점검 인력을 요청해 보자는 거예요. 혼자 다치면 또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야 하잖아요.” 로한이 한참 수현을 바라봤다. “젊은 사람이 참 별난 말을 하는군.”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듣기 나쁘진 않아.” 그의 미소에 수현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 회의실 앞 복도에서 수현은 세드나에게 물었다. “벨튼 공작이 그렇게 높은 사람인가요?” “높지. 왕립길드의 후원과 주요 계약 승인에 관여한다.” “그럼 이 임무도 공작이 직접 지시했을까요?” “그건 모른다.” 세드나는 분명하게 답했다. “인장은 공작가의 권한으로 발행됐지만, 실무자가 위임받아 찍었을 수도 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직 공작이 뭘 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네요.” “그렇지.” “좋아요. 추측은 추측으로 적을게요.” 세드나가 수현을 바라봤다. “넌 처음 봤을 땐 무작정 들이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무작정 들이대기는 하더군.” “…….” “그래도 멈춰야 할 때는 멈추는군.” 수현이 피식 웃었다. “그게 제 직업입니다. 안 그러면 남의 인생을 괜히 망칠 수 있거든요.” 세드나는 잠깐 침묵했다. “우리 쪽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군.” 수현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세드나가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조직에 괜찮은 사람이 있다는 증거 같았다. *** 로한이 회의에 내놓은 사진 같은 마법 기록에는 폐광 천장이 갈라진 모습이 담겨 있었다. 작은 수정판 위에 희미한 빛이 떠올랐고, 그 안에서 돌가루가 쏟아지는 장면이 반복됐다. 수현은 처음엔 감탄했다. “이거 동영상이에요?” 세드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이지?” “움직이는 기록이요. 아주 편리하네요.” “현장 영상을 남기는 수정판은 오래전부터 쓰고 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기술이 있으니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더 안전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관리국은 그 영상을 보기 전에 출정을 명령한 모양이었다. “이걸 작전 담당자가 봤습니까?” 로한이 고개를 저었다. “안전 점검이 끝나기 전이라 공개되지 않았소.” “그렇다면 출정 결정 전에 자료가 없었던 거군요.” “그렇지.” 수현은 기록을 한 줄 더 남겼다. [사고의 원인은 단일인 실수로 확정하지 않음. 위험 정보 전달 절차 확인 필요.] 이제 적어도 누군가를 성급하게 범인으로 몰지 않겠다는 원칙이 필요했다. 현장에서 화를 내기란 쉽다. 하지만 진짜로 바꿔야 할 지점을 잘못 고르면, 다음 사고는 다른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찾아온다. *** 그렇게 자료를 모은 수현은 처음으로 공용 회의에 참석했다. 길드의 작은 회의실에는 브레그와 세드나, 로한, 그리고 제7원정대 대표로 카이렌이 자리했다. 수현은 카이렌 옆에 앉았다. 브레그는 여전히 언짢은 얼굴이었다. “왜 외부인이 이 자리에 있지?” 카이렌이 대답했다. “제가 동의했습니다. 제 원정대의 서류 확인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브레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수현은 속으로 박수를 쳤다. 카이렌이 자기 의견을 말했다. 정말 별일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에게는 큰 변화였다. 세드나가 회의를 시작했다. “남쪽 폐광 진입 명령서와 안전 점검 명령서는 발행 부서가 같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담당자가 처리했습니다.” “그럼 단순 착오 아닙니까?” 브레그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수현이 대답했다. “하지만 같은 장소에 두 팀을 보냈는데도 서로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잖아요. 그건 착오여도 위험한 일입니다.” 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내가 제7원정대가 들어온다는 걸 알았다면 기다렸을 거요.” “그렇죠.” 수현이 종이를 펼쳤다. “제가 확인하고 싶은 건 세 가지입니다. 출정 전 정보 공유가 왜 안 됐는지, 부상자 치료비를 누가 부담하는지, 그리고 두 명령서를 승인한 사람이 정확히 어떤 범위까지 검토했는지요.” 브레그가 한숨을 쉬었다. “또 세 가지군.” “제가 숫자 셋을 좋아하는 편이어서요.”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싫었다.” “저도 첫인상은 별로였어요.” 회의실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로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세드나도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브레그만 표정을 구겼다. “웃지 마!” *** 회의는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문제의 문서에는 벨튼 공작의 인장이 있었지만, 실제 지시를 작성한 사람의 이름이 달랐다. 세드나는 문서가 공작가 명의의 승인 체계를 통해 발행됐다고 설명했다. 최고 책임자가 모든 문장을 직접 읽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수현은 그 부분을 따로 적었다. [승인 명의와 실제 작성자 분리 확인 필요.] 로한은 폐광 안전 점검 결과를 제출했다. 바닥이 무너질 위험이 높아 추가 진입은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럼 봉인 물품 회수 임무는 중단되는 겁니까?” 카이렌이 물었다. 브레그가 입을 벌렸다. “상부 결정이…….” “안전 점검에서 금지라고 했습니다.” 로한이 먼저 말했다. “제 이름으로 책임지고 제출하겠소.” 브레그는 할 말을 잃었다. 수현은 카이렌을 바라봤다. 그는 검 손잡이 대신 회의 서류를 쥐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 갈 무렵, 세드나가 마지막 안건을 꺼냈다. “제7원정대에서 제출한 임시 조정 요청서가 접수됐다.” 수현의 심장이 뛰었다. 임시 조정. 카이렌과 메이의 근무 기록, 치료 물품 지급 문제, 위험 업무 시 중단 기준을 적어 제출한 문서였다. 최소한 그걸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세드나가 말을 이었다. “상부는 회신을 보냈다. 조건부로 열흘간 시험 적용을 허가한다.” 메이가 없다는 게 아쉬웠다. 이 말을 들었으면 눈을 크게 떴을 텐데. “어떤 조건입니까?” 수현이 물었다. “제7원정대가 업무 조정에 따른 성과 저하를 입증하지 않을 것. 그리고 외부 상담인의 신원을 확인할 것.” 수현의 미소가 멈췄다. “잠깐. 제 신원이요?” 세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왕국에 존재하지 않는 직업을 가진, 국적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계속 야영지에 둘 수는 없다는군.” “아니, 그건…….” “단,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세드나가 새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왕립용사길드 제7원정대 임시 외부 자문 계약서.] 수현은 그 제목을 한참 바라봤다. 자문 계약서. 이세계에 떨어진 지 며칠 만에 드디어 계약서를 받았다. 문제는 그 계약서 맨 아래였다. [최종 승인권자: 벨튼 공작.] 수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피해자 서류가 아니라 자기 이름이 들어갈 차례였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9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