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계약?”
수현이 되물었다.
세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 회복 관리국의 답변은 그 말뿐이다.”
“그 상위 계약을 누가 체결했는데요?”
“승인권자는 왕립용사길드 상층부로 되어 있다.”
“계약 당사자는요?”
“그건 기록에 없다.”
수현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계약 당사자도 모르는 상위 계약이라니. 서류는 점점 고급스러워지는데 중요한 내용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럼 일단 그 기록은 보류합시다.”
세드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 파헤치겠다고?”
“파헤치긴 할 건데요. 지금 당장 열람 권한도 없는 문서를 들쑤셔 봐야 저만 쫓겨날 거예요.”
“현명하군.”
“칭찬받는 기분이네요.”
세드나가 짧게 웃었다.
“그럴 때도 있어야지.”
수현은 종이를 접었다. 당장 확인할 수 없는 일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먼저 고쳐야 했다. 카이렌의 출정 기록, 메이의 치료비, 보급품 지급 절차. 아직 제대로 끝난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바깥에서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짧게 셋.
젠이 허둥지둥 천막으로 들어왔다.
“긴급 출정 명령입니다!”
카이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현도 따라 일어났다.
“이번엔 어디예요?”
“남쪽 폐광이요. 괴물 소굴이 발견됐대요.”
“주민 피해가 있습니까?”
“그게…….”
젠이 머뭇거렸다.
“아직 없어요.”
“그럼 긴급 출정인 이유가 뭔가요?”
“왕립길드에서 오늘 안에 반드시 진입하래요.”
수현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 말을 들으니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
상황실 게시판에는 새로운 명령서가 붙어 있었다.
[제7원정대, 남쪽 폐광 진입.]
[목표: 폐광 내부의 봉인 물품 회수.]
[기한: 오늘 자정.]
수현은 세 번째 줄에서 한 번, 두 번째 줄에서 한 번 더 멈췄다.
봉인 물품?
마물 토벌도 아니고 주민 구조도 아니었다. 물건을 가져오라는 일이었다.
“이 물품이 뭔데요?”
상황실 서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안 적혀 있어요.”
“위험 등급은요?”
“비밀 임무라서…….”
“출정 인원은 누가 정했어요?”
“본부요.”
“현장 조사 보고서는?”
“없습니다.”
수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느 회사나 '급한 일'이란 건 많이 생긴다. 그런데 급하다는 이유로 정보가 없어지는 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위험한 일을 시킬수록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할 텐데.
카이렌이 명령서를 살폈다.
“남쪽 폐광이면 마물 소굴이 맞습니다. 예전에 한 번 지나간 적이 있어요.”
“안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깊은 곳에 오래된 성역 유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유적에서 물건을 가져오라는 겁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원정대가 뭘 가져와야 하는지 모르고 들어가야 한다는 거네요.”
카이렌은 잠시 침묵했다.
“명령이니까요.”
수현은 그를 바라봤다.
카이렌이 또 죄송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책임이 있으니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수현은 한숨을 쉬었다.
“일단 본부에 세 가지만 물어봅시다. 물품의 모양, 위험 요소, 철수 기준.”
“철수 기준이요?”
“무슨 일이 생기면 그만두고 나와야 하는지요. 그게 없으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쓰러져도 계속 들어가야 하잖아요.”
데런이 입을 열었다.
“그런 기준은 처음 듣는데.”
“그럼 오늘부터 만듭시다.”
***
브레그는 예상대로 화를 냈다.
“상부 명령은 토 달지 말고 수행하면 된다!”
“수행할 거예요. 다만 뭘 가져와야 하는지 알아야 찾죠.”
“봉인 물품이다!”
“그건 명령서에도 적혀 있어요.”
“그럼 됐잖아!”
“봉인 물품이 검인지 책인지 상자인지는 알아야 하잖아요.”
브레그가 숨을 멈췄다.
정말 몰랐던 걸까.
수현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브레그는 화를 낼 때마다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눈가에 불안이 묻어 있었다.
“감독관님도 모르시는군요.”
그가 벌컥 소리쳤다.
“모른다고 누가 그래!”
수현은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러면 확인해 주세요.”
“…….”
“그리고 후퇴 기준도 필요해요.”
브레그가 마침내 의자에 주저앉았다.
“너는 어쩌면 그렇게 간단한 말로 일을 어렵게 만드는 거냐.”
“원래 어려운 일을 간단하게 보지 말자는 거예요.”
그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상부에 한 번 문의하겠다. 하지만 기한은 바뀌지 않는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의했다는 기록도 남겨 주세요.”
브레그가 천장을 바라봤다.
뭔가 신에게 구원을 구하는 표정이었다.
수현은 괜히 미안해졌다. 아주 조금.
***
출정 준비는 어수선했지만 전보다 달라졌다.
카이렌은 혼자 검을 메지 않았다. 젠이 지도와 화살을 맡았고, 데런은 마차와 밧줄을 챙겼다. 오르카는 깁스 때문에 전투에서 빠지고 후방 연락을 담당했다. 메이는 자신의 마력 잔량을 종이에 적어 카이렌에게 보여 줬다.
“지금은 세 번밖에 못 써.”
“세 번이면 충분해.”
“그 말 금지.”
카이렌이 입을 다물었다.
“세 번까지만 믿고, 그다음은 철수하자.”
“……알았어.”
수현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가슴이 조금 풀렸다. 사람들이 스스로 한계를 말하기 시작했다. 누가 약해져서가 아니었다. 이제야 서로를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때 젠이 수현에게 물었다.
“수현 씨도 같이 갑니까?”
“제가요?”
“네. 늘 같이 확인하시잖아요.”
수현이 입을 벌렸다.
잠깐.
그건 서류 얘기였지.
마물 소굴 동행을 약속한 적은 없는데.
“전투는 못 합니다.”
“알아요.”
“마법도 못 써요.”
“알죠.”
“그럼 제가 가서 뭐 하죠?”
젠이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가 또 무리하려고 하면 말려 주세요.”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가장 무서운 부탁이었다. 무리하지 말라고 말할 사람이 없어서 낯선 나라의 노무사가 필요한 원정대라니.
“입구까지만 갈게요.”
그녀가 결국 말했다.
“대신 위험하면 제가 먼저 도망갈 겁니다.”
“그건 저희가 지켜 드려야죠.”
카이렌이 웃었다.
수현은 그 미소에 조금 안심했다.
아주 조금.
원정대가 출정하기 전 수현은 브레그의 보좌 서기에게서 작은 종이를 받았다.
[상부 회신: 회수 대상은 은색 봉인함. 개봉 금지.]
[위험: 내부 구조물 붕괴 가능성 있음.]
[철수 기준: 현장 지휘관 판단.]
“이걸 지금 보내 줬다고요?”
서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방금 수정된 명령입니다.”
수현은 첫 번째 항목을 읽고 카이렌에게 보여 줬다.
“은색 상자를 찾으라네요.”
카이렌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군요. 제가 그걸 몰랐다면 안에서 다른 물건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요.”
데런이 종이를 훑어보더니 한마디 했다.
“폐광에 상자가 하나만 있겠습니까?”
수현은 잠시 멈칫했다.
맞네.
명령이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애매했다. 크기도, 보관 장소도 적혀 있지 않았다. 서류 한 장으로 모든 위험을 막을 수 없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가능하면 더 자세한 설명을 받는 게 좋겠는데…… 시간이 없네요.”
“괜찮습니다. 은색 봉인함 정도면 찾을 수 있습니다.”
카이렌이 대답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불안했다. 입구에서 대기하는 일만 해도 심장이 뛰었다. 이런 곳에 매일 들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메이가 수현에게 작은 약초 주머니를 건넸다.
“이거 차고 계세요.”
“뭔데요?”
“위험한 독기가 있으면 색이 변해요.”
수현은 감탄했다.
“이런 좋은 게 있는데 왜 출정할 때 아무도 안 줬어요?”
메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개인 지급 대상이 아니라서요.”
“그럼 이건 메이 씨 거예요?”
“제가 만든 거예요. 공용품은 없거든요.”
수현은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이 세계는 참 이상하다. 마법으로 독기를 감지하는 주머니를 만들 줄 알면서, 그 주머니를 위험한 곳에 가는 사람에게 지급할 생각은 못 한다. 기술과 상식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
폐광 입구까지 가는 길은 바위투성이였다.
수현은 처음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도에선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되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걸어 보니 한 번 미끄러질 때마다 무릎이 흔들렸다.
“잠깐만요.”
그녀가 세 번째로 멈춰 섰다.
“길이 이렇게 험하다고는 안 적혀 있었는데요.”
젠이 뒤에서 웃었다.
“지도는 원래 평평하잖아요.”
“그게 지금 웃을 일입니까?”
“아니요. 저도 처음엔 화났습니다.”
수현은 흙 묻은 손바닥을 털었다.
평소 같았으면 등산은 돈을 받고도 안 갔을 텐데. 노무사 사무실에서 가끔 현장 조사를 나갔다고는 해도 이런 폐광까지 걸어 들어간 적은 없었다.
데런이 작은 물통을 내밀었다.
“물 좀 드세요.”
“고마워요.”
수현은 물을 받아 마셨다.
카이렌이 앞쪽 바위를 살폈다.
“이 길은 발이 미끄러우니까 오른쪽으로 돌아가죠.”
수현은 그의 발을 보았다. 여전히 닳아 있는 장화였다.
“카이렌 씨 장화부터 바꿔야겠는데요.”
“괜찮습니다.”
“금지어.”
그가 웃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면 신청하겠습니다.”
메이가 옆에서 말했다.
“제가 꼭 확인할 거예요.”
수현은 웃었다.
이런 대화를 나누니 잠깐 소풍에 온 기분도 들었다. 뒤편에서 데런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젠이 박자를 맞췄다. 오르카는 마차를 몰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하지만 폐광의 입구가 보이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검은 동굴은 절벽을 통째로 베어 낸 상처 같았다. 주변 풀은 바싹 말라 있었고 바람은 서늘했다. 안쪽을 들여다보니 어둠뿐이었다.
수현은 목이 바짝 말랐다.
“정말 여기로 들어가야 해요?”
카이렌이 웃지 않고 대답했다.
“명령이 내려왔으니까요. 다만 위험하면 돌아오겠습니다.”
수현은 그 말에 조금 안심했다.
처음 만났을 때였다면 그는 분명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스스로 했다.
“그 약속, 꼭 지켜요.”
수현이 말했다.
카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
원정대가 입구를 지나 사라진 뒤 수현은 오르카 옆에 앉아 작은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이건 왜 가져오셨어요?”
오르카가 물었다.
“시간을 재려고요. 약속한 대로 돌아오는지 확인할 겁니다.”
“모래시계 하나로 되겠습니까?”
“정확한 건 아니어도요. 기다리는 사람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라도 알아야 하잖아요.”
오르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안쪽에서 돌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수현은 벌떡 일어났다.
“지금 들었어요?”
“예. 작은 돌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위험한 건가요?”
“동굴에선 흔한 소리지만, 무너질 징조일 수도 있습니다.”
수현은 다시 앉았다. 손에 쥔 모래시계가 조금 떨렸다.
오르카가 말했다.
“수현 씨는 어쩌다 여기 오셨습니까?”
“그게 설명하려면 아주 길어요.”
“전 시간이 많습니다.”
“다친 팔 때문이군요.”
“그렇죠.”
수현은 잠깐 웃었다.
그리고 서울의 사무실과 이상한 진정서 이야기를 해 줬다. 프린터 대신 봉투에서 빛이 났고, 정신 차려 보니 야전 진료소였다고.
오르카는 끝까지 진지하게 들었다.
“정말 다른 세계가 있군요.”
“저도 여기 오기 전엔 믿지 않았어요.”
“그곳은 좋은 곳입니까?”
수현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요. 사람들 때문에 골치 아픈 건 여기랑 비슷하고요.”
“그럼 집에는 가고 싶으시겠군요.”
“당연하죠.”
“그런데 왜 남아 계십니까?”
수현은 잠깐 말을 잃었다.
돌아갈 방법이 없어서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 걸 보고 그냥 발을 돌리기 어려웠다.
“사람들 걱정이 돼서요.”
수현이 말했다.
“돌아갈 길은 찾아야 하고, 그때까지 할 수 있는 일도 있으니까요.”
오르카가 웃었다.
“용사는 검을 들고, 노무사는 펜을 드는 겁니까?”
“맞아요. 다만 제 펜은 마물을 못 베니까 제발 자주 쓰게 하지 마세요.”
두 사람이 웃었다.
그때 땅이 첫 번째로 작게 흔들렸다.
수현은 모래시계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
남쪽 폐광은 생각보다 깊고 어두웠다.
절벽 사이로 난 좁은 길 끝에 나무문이 있었고, 안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입구에 서서 손바닥에 땀을 닦았다.
마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카이렌이 작은 횃불을 켰다.
“입구에서 기다리세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 말도 불안한데요.”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빨리보다 무사히요.”
카이렌은 잠깐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원정대가 안으로 들어갔다.
수현은 입구 바깥에서 오르카와 함께 기다렸다. 마차에는 응급 물품과 밧줄이 실려 있었다. 물약은 겨우 세 병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그리고 갑자기 땅이 울렸다.
쿵!
오르카가 벌떡 일어났다.
“무너지는 소리입니다!”
폐광 입구에서 검은 먼지가 쏟아져 나왔다.
수현의 심장이 턱 내려앉았다.
“카이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입구로 뛰어가려다가 오르카에게 붙잡혔다.
“지금 들어가면 같이 갇힙니다!”
맞는 말이었다.
너무 맞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수현은 이를 악물었다. 손끝이 떨렸다. 종이에 적은 후퇴 기준이 실제로 사람을 데리고 나오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그때 안쪽에서 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밧줄! 밧줄을 내려 주세요!”
수현은 곧바로 수레 쪽으로 달렸다.
도망갈 생각은 사라졌다.
적어도 밧줄을 묶는 일은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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