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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10화
PAYLUA ORIGINAL · 제10화

10화. 제7원정대의 새 식구

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6,574자

오프라인 책장
“이수현 씨. 서명하시겠습니까?” 세드나가 물었다. 수현은 계약서를 펼친 채 눈을 깜빡였다. 이세계에 와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게 남의 계약서였다. 그런데 정작 본인의 계약서를 받아 들자 이상하게 손이 멈췄다. 이걸 쓰면 정말 여기서 일하게 되는 걸까? 서울의 사무실이 떠올랐다. 반쯤 남은 커피, 책상 위의 파일, 충전기에 꽂아 놓았던 휴대폰. 같이 일하는 사무장은 아직도 그녀를 찾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사라진 자리에 놀라서 경찰부터 불렀을까. 계약서 한 장으로 집에 돌아갈 길이 닫히는 건 아닐지 겁이 났다. “서명하기 전에 질문부터 해도 됩니까?” 세드나가 한숨을 쉬었다. “네가 질문하지 않고 서명할 줄 알았겠나.” “다행이네요. 적응하셨어요.” “아니, 체념한 거다.” 수현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문서 첫 줄부터 읽었다. [계약 당사자: 이수현.] [직무: 제7원정대 임시 외부 자문.] [기간: 열흘. 필요 시 상호 합의에 따라 연장.] [보수: 일당 은화 두 닢. 숙식 별도 제공.] [업무 범위: 계약 서류 정리, 원정대 운영 관련 의견 제시.]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대한민국 노무사가 직업란에 이름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세계에 와서 이력서 하나 없이 취업이라니. 급하게 생각하면 꽤 괜찮은 기회 같기도 했다. 그런데 아래쪽에 위험한 문장이 있었다. [기타 길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업무.] 아. 나왔다. 어디에서나 반드시 만나는 그 문장. 수현은 펜을 내려놓았다. “이 문장 빼 주세요.” 세드나가 그 부분을 보더니 웃음을 참았다. “첫 번째 수정 요청이군.” “다른 세계에서까지 이걸 볼 줄은 몰랐어요.” “뭐가 문제인가?” “직무가 계약 정리와 운영 자문이라고 돼 있잖아요.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모든 일을 시킬 수 있다고 읽혀요.” “왕립길드가 그렇게까지 하겠나?” 수현이 세드나를 바라봤다. 세드나도 수현을 바라봤다. 둘 다 잠깐 침묵했다. “……하겠군.” 세드나가 먼저 말했다. “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 계약서를 검토하는 동안 카이렌은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그는 처음엔 그저 수현이 글씨를 잘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른 표정이었다. “수현 씨.” “네?” “이걸 왜 꼭 본인이 수정하셔야 합니까?” “제 계약이니까요.” “길드에서 주는 걸 그냥 받으면 안 되는 겁니까?” 수현은 펜을 내려놓았다. “받아도 되죠. 내용이 마음에 들면요.” “근데 마음에 안 들면요?” “바꿀 수 있는지 물어봐야죠.” 카이렌은 잠시 생각했다. “저는 서약서를 받을 때 그런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땐 물어볼 사람이 없었을 수도 있죠.” “있어도 못 물었을 겁니다.” 카이렌이 말했다. “다들 제가 선택받았다고 축하해 줬거든요. 그때 혼자 조건을 따지면 겁쟁이처럼 보일 것 같았어요.” 수현은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서워서 묻지 못한 건가요?” “네.” “그럼 이제라도 물어보면 되죠.” 카이렌이 작게 웃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합니까?” “간단하진 않죠. 저도 계약서 고치자고 할 때마다 떨려요.” “수현 씨도요?” “그럼요. 상대가 화낼지 모르고, 거절할 수도 있고, 나중에 불이익이 생길까 봐 걱정도 되죠.” 카이렌은 놀란 얼굴이었다. 수현은 웃었다. “용기라는 게 안 무서워하는 건 아니잖아요. 무서워도 필요한 말을 해 보는 거죠.” 카이렌은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제가 용사인데도 수현 씨한테 배울 게 많네요.” “전 검을 못 쓰니까요. 서로 배우면 되죠.” 둘은 조용히 웃었다. *** 보수 조항을 최종 확인할 때 세드나는 뜻밖의 자료를 보여 줬다. “지난 며칠간 네가 실제로 한 일을 적어 봤다.” 수현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가 한 일을요?” “임시 자문 계약을 신청하려면 활동 내역이 있어야 하니까.” 세드나가 종이를 펼쳤다. 출정 지연 협의. 보급 지급 누락 사실 확인. 근무 기록 작성 지원. 치유 비용 정산 재검토 신청. 폐광 위험 정보 전달 문제 제기. 수현은 그 목록을 한참 바라봤다. “생각보다 많이 했네요.” “많이 했지.” 세드나가 한숨을 쉬었다. “네가 온 뒤로 내 서류가 세 배는 늘었다.” “죄송해요.” “그래도…….” 세드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 “묻혀 있던 문제가 보이긴 했어.” 수현은 가만히 웃었다. 평소 칭찬에 후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인정한다면 꽤 의미 있는 말이었다. “그럼 세드나 씨도 오늘은 일찍 퇴근하세요.” “퇴근?” “일 끝나고 쉬는 거요.” 세드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서류가 이렇게 쌓였는데?” 수현은 그녀의 책상을 바라봤다. 정말 종이 탑이 세 개나 있었다. “그럼 그거부터 문제네요.” “……설마.” 세드나가 서둘러 말을 막았다. “내 근무조건까지는 조사하지 마라.” 수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은요.” 세드나도 결국 웃었다. *** *** 계약서 수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모든 업무’를 삭제하자는 말에 문서 담당자는 법적 효력을 걱정했고, ‘업무 관련 협조’로 바꾸자는 제안에는 세드나가 너무 넓다고 반대했다. 수현은 결국 세 문장으로 구체적인 범위를 적었다. 계약·보수·근무 기록 검토. 안전 및 보급 관련 회의 참여. 작전 참여는 당사자의 별도 동의가 있을 때에만 허용. “마지막 문장은 왜 넣었습니까?” 세드나가 물었다. “저는 싸움을 못 하거든요.” “그건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 더 필요하죠. 저를 위험한 데 보내 봐야 다들 짐만 하나 늘어요.” 카이렌이 곁에서 고개를 저었다. “짐은 아니었습니다. 폐광에서 밧줄을 묶어 주셨잖아요.” 수현은 그를 돌아봤다. “그건 필요한 일이었고요. 다음부터는 밧줄 전문가가 맡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직업도 있습니까?” “있겠죠. 아마.” 데런이 뒤에서 손을 들었다. “제가 묶을 수 있습니다.” “그럼 앞으로 데런 씨가 담당하세요.” “명예로운 임무군요.” 모두 웃었다. 수현은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조금 안심했다. *** 보수 조항도 고쳤다. 은화 두 닢이 얼마나 큰돈인지 몰라 메이에게 물었더니, 하루 세 끼를 사 먹고 방값까지 내면 거의 남지 않는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거액을 받는 것처럼 기뻤는데 현실을 알고 나니 빠르게 정신이 들었다. “제가 여기 생활비도 모르고 계약할 뻔했네요.” 세드나가 말했다. “숙식을 제공한다고 적혀 있는데?” “그럼 제공하는 숙소가 어떤 곳인지 적어 주세요.” “막사에 빈 침대가 있다.” “남녀 구분은요?” 세드나가 멈칫했다. “……확인해 보겠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작은 질문도 중요한 일이었다. 결국 일하는 사람은 하루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고, 이곳에선 그 뒤에 돌아갈 집도 없었다. 숙소를 제공한다는 말과 안전하게 쉴 수 있다는 말은 달랐다. 그녀는 위험 업무 동행 때의 장비 지급 조건도 추가했다. “갑옷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보호 장비 정도는…….” “맞아요. 딱 그 정도요.” 세드나는 수현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 네가 우리 길드에 필요한 사람인지 모르겠군.”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수현이 웃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아요.” *** 계약서의 최종 승인 문제는 뜻밖에 간단하게 해결됐다. 벨튼 공작이 직접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왕도에서 전령이 도착했고, 공작가 문장이 찍힌 작은 수정판에 임시 승인 표시가 떠올랐다. 세드나는 문서를 확인한 뒤 말했다. “열흘짜리 자문 계약이 승인됐다.” 수현은 수정된 조항을 다시 읽었다. “원본 한 부는 제가 보관해도 되죠?” “당연하다.” “좋네요.” “대체 네 나라에서는 어떤 계약을 쓰기에 그걸 좋아하지?” 수현이 미소를 지었다. “서로 한 부씩 갖는 계약이요.” “그게 그렇게 특별한가?” “특별하면 안 되는 일이긴 하죠.” 그녀는 서명했다. 붉은 빛이 잉크 위로 번졌다가 사라졌다. 종이가 가볍게 떨리더니 모서리에 작은 표식이 찍혔다. [임시 자문 계약 성립.] 신기했다. 인감도장도 전자서명도 없이 마법으로 계약이 성립하다니. 기술은 정말 대단한데 왜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는 일엔 이렇게 서툰 걸까. 수현은 계약서 사본을 가방에 넣었다. “저 이제 일하러 가도 되는 거죠?” “원래도 일하고 있지 않았나?” 세드나가 물었다. “그땐 무급이었죠.” “…….” “이제 유급입니다.” 세드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현은 가볍게 웃었다. 그래. 이세계에서 처음 번 돈이 어떻게 생겼든 그 사실만큼은 기념할 만했다. *** 제7원정대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회의를 연 건 그날 저녁이었다. 사실 회의라고 해 봐야 천막 가운데 긴 탁자를 놓고 사람들이 둘러앉은 것뿐이었다. 그래도 카이렌이 스스로 사회를 보겠다고 나섰다. “오늘부터는 출정 전에 서로의 몸 상태를 확인하겠습니다.” 메이가 눈을 크게 떴다. “카이렌, 네가 그런 말을 다 하고.” “수현 씨가 알려 줬잖아.” “저는 권했을 뿐이에요.” 수현이 웃었다. 카이렌은 종이를 펼쳤다. “다친 사람이 있으면 말을 하고,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치료를 받고, 후퇴 기준이 있으면 지킵니다.” 젠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식사는 꼭 하죠.” “맞아.” 데런이 말했다. “말도 밥은 먹는데 사람이 못 먹으면 억울하지.” 오르카는 왼팔 깁스를 흔들었다. “전 아직 출정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좀 무섭거든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수현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두려움을 말하는 사람에게 누군가 비겁하다고 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그런데 카이렌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완전히 나을 때까지 후방에서 도와줘.” 오르카의 어깨가 내려갔다. 그 모습이 수현에게는 오늘 가장 좋은 장면이었다. *** 열흘간의 시험 적용 규칙도 세워졌다. 근무와 이동 기록은 매일 남긴다. 치료 물품은 지급 시 직접 수령 확인한다. 부상 상태에 따라 후퇴 또는 대체 임무를 선택한다. 불명확한 비용은 개인에게 자동 청구하지 않고 근거를 먼저 확인한다. 물론 그 규칙이 왕립길드 전체에 적용되는 건 아니었다. 상부가 언제든 반대할 수 있었다. 진짜로 돈이 지급될지도 아직 몰랐다. 하지만 사람들은 적어도 내일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수현은 서류를 정리하며 메이에게 말했다. “우선 열흘만 버텨 봅시다.” “버티는 건 자신 있어요.” 메이가 웃었다. “그거 말고요.”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무리하지 않고 열흘이요.” 메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연습이 필요하겠네요.” “저도요.” 수현이 말했다. “저도 맨날 야근했거든요.” 둘은 잠깐 웃었다. 수현은 숙소를 배정받은 날 밤, 작은 탁자 위에 은화 두 닢을 올려놓았다. 계약상 첫날의 임시 보수였다. 동그란 은빛 동전은 서울에서 쓰던 돈과 전혀 달랐지만 손바닥에 닿는 무게는 묘하게 익숙했다. 오랜만에 자신의 일이 돈으로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봐야 내일도 뭘 해야 할지는 불투명했다. 숙소 문은 조금 삐걱거렸고 침대는 푹신하지 않았으며 창밖에선 누가 밤새 검을 갈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던 첫날보다는 나았다. 수현은 은화 하나를 집어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서울에서 일할 때는 돈을 받는 일이 당연했다. 상담료를 정하고, 위임계약을 맺고, 청구서를 발행했다. 여기서는 그 모든 과정이 새삼 소중했다. 돈을 받으니 책임도 생겼다. 그녀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메이의 미정산 비용 추가 확인.] [원정대의 근무기록 일주일치 누적.] [길드 소환 서고 열람 신청.] 세 번째 항목에서 손이 멈췄다. 돌아갈 방법. 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고 해서 원래 세계의 삶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 모두 잠든 밤, 수현은 작은 숙소에 앉아 계약서 사본을 펼쳤다.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가 있는 방이었다. 창밖으로는 병사들이 모닥불 주위에서 낮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만에 혼자가 되자 서울 생각이 밀려왔다.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면 사무장이 뭐라고 할까. 그리고 돌아간 뒤에도 여기 사람들이 잘 지낼까. 수현은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 19퍼센트. 화면에는 통신망이 없다는 표시가 여전히 떠 있었다. 그녀는 메모장을 열었다. [제7원정대.] [확인 완료: 임시 휴식, 근무 기록 도입, 일부 치료 물품 지급, 자문 계약 체결.] [미해결: 특별 회복 충당금, 라비엔의 전출, 카이렌의 사라진 사흘, 소생 비용, 귀환 방법.] 그리고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벨튼 공작. 직접 확인 필요.] 수현은 휴대폰을 껐다. 그때 방문 아래로 무언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얇은 편지였다. 발신인도, 서명도 없었다. 그저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라비엔을 찾고 싶다면, 제7원정대의 최초 계약일부터 확인하시오.] 수현은 편지를 손에 쥔 채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누가 보낸 걸까. 그리고 왜 하필 최초 계약일일까.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현은 문을 잠갔다. 서랍에 편지를 넣고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직장은 월급만 주고 끝날 곳이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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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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