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원정대의 야영지에 돌아왔을 때, 카이렌은 진료소가 아니라 훈련장에 있었다.
수현은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용사가 또 무리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니 카이렌은 검을 휘두르는 대신 대원들이 사용하는 휴식표를 들고 있었다. 젠이 화살통을 수리했고, 데런은 마차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있었다.
“수현 씨!”
카이렌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얼굴에는 한때 늘 달고 다니던 고열의 붉은 기운이 없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저보다 잘 지내신 것 같네요.”
“저는 어제 쉬었습니다.”
“정말요?”
“네. 젠이 대신 야간 점검을 맡았고, 오늘은 제가 젠의 일을 조금 돕기로 했습니다.”
수현은 잠시 카이렌의 얼굴을 보았다. 세상을 구한다는 이유로 하루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던 청년이 있었다. 그가 쉬었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는 장면을 보니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대단한 일 하셨네요.”
카이렌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아직은 어색합니다.”
“어색해도 계속하세요. 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거든요.”
메이가 옆에서 웃었다.
수현은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
“카이렌 씨, 요청하신 의료 기록 일부를 볼 수 있게 됐대요. 제가 열어 보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어요.”
카이렌은 봉투를 받더니 한동안 내려다봤다.
“이걸 보면 모든 게 밝혀질까요?”
“그건 몰라요. 기록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권한이 생긴 거죠.”
카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는 자기 천막에서 봉투를 열었다. 수현과 메이에게 함께 있어 달라고 한 것은 본인의 결정이었다. 세드나는 기록의 비공개 범위를 다시 설명했고, 의료 정보를 원정대 전체에 알릴 필요가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제가 확인할 내용은 저의 장치 사용 기록과 그때의 치료 과정입니다.” 카이렌이 말했다.
메이는 조용히 물었다.
“아픈 기억이면 중간에 멈춰도 돼요.”
“괜찮습니다. 다만…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싶습니다.”
카이렌의 손등에는 흰 고리 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수현은 그 흉터를 처음 본 날부터 여러 번 관련 기록을 찾았다. 그러나 상처가 있다는 사실과 어떤 장치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연결할 확실한 근거는 없었다.
첫 장에는 ‘K형 안정 장치 보급 내역’이라는 제목이 있었다. 장치 수량, 보급일, 창고 책임자와 당시 부대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사용 대상 이름은 없었다.
“장치는 지급됐지만 제가 착용했다는 말은 아니네요.” 카이렌이 말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정대에 지급된 장치가 카이렌 씨 몸에 사용됐는지는 별도 기록이 있어야 해요.”
둘째 장에는 사용량과 반납 내역이 있었다. 같은 기간 장치 하나가 미반납 상태였고, 보수 요청이 두 번 접수돼 있었다. 그러나 그 장치가 분실됐는지 파손됐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카이렌이 갑자기 손등을 쓸었다.
“그날 제 손에 뭔가 차가운 게 닿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메이가 숨을 삼켰다.
“어떤 모양이었어요?”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기억인지, 흉터를 보면서 상상한 건지 모르겠어요.”
수현은 서류를 덮지 않았다. 대신 카이렌이 더 이야기할지 기다렸다.
“그렇게 말해 주셔서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모르겠다고 했는데요?”
“모르겠다는 부분도 중요한 기록이니까요.”
***
세 번째 장에는 치료 행위가 아니라 장치 점검 결과가 있었다. 보급창고의 직원이 K형 안정 고리 하나를 회수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그 아래에는 ‘대상자의 상태 확인 예정’이라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
“대상자가 누군지는요?” 메이가 물었다.
“이 자료에서는 지워져 있습니다.” 세드나가 설명했다. “다른 환자의 개인정보가 섞일 수 있어 본인과 직접 연결되는 증거가 없는 부분은 비식별 처리됐습니다.”
카이렌은 뜻밖에도 안도했다.
“누가 다쳤든 그 사람의 기록까지 제가 봐서는 안 되겠죠.”
수현은 그를 바라봤다. 초반의 카이렌은 자신의 고통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남의 일을 도와 달라는 요청은 거의 거절하지 못했다. 지금은 자신이 알 수 있는 사실과 알면 안 되는 사실을 구분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가 소생됐다는 기록은요?”
세드나가 천천히 대답했다.
“현재 허가된 자료에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소생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도 내릴 수 없습니다.”
메이가 카이렌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그날 할 수 있었던 치료가 무엇이었는지도 다시 확인해야 해요. 저는 많이 지쳐 있었고, 모든 장면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카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그 대화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식 조사에 필요한 내용을 나중에 정리하기로 했지만, 당사자들 사이에 오가는 모든 말을 종이에 남길 필요는 없었다.
그때 천막 밖에서 전령이 뛰어왔다.
“용사님! 북쪽 초소에서 다친 사람이 왔습니다!”
카이렌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수현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스스로 멈췄다.
“누가 담당인지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그는 전령에게 물었다.
“의료 담당은?”
“대기 중입니다.”
“즉시 그쪽으로 보내십시오. 저는 무장 상태가 아니니 상황을 파악한 뒤 필요한 지원을 하겠습니다.”
수현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오래 연습해도 급한 상황에서 오래된 습관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카이렌은 달려나가기 전에 한 번 멈추는 법을 배웠다.
***
다친 사람은 마차를 몰던 소년이었다. 발목이 부어오르고 손바닥이 찢어진 상태였다. 메이는 진료 담당자와 환자를 살폈다. 카이렌은 바깥에서 다른 대원들이 자리를 정리하도록 했다. 모두가 환자를 둘러싸고 소란을 피우는 대신 각자 해야 할 일을 했다.
데런은 마차 바퀴가 왜 부러졌는지 확인했다. 젠은 소년의 가족에게 연락할 전령을 찾았다. 오르카는 부상자가 움직이지 않도록 길목에 서 있었다. 수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녀는 누가 무엇을 맡았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은 치료하라고 지시하지 않으시네요.” 오르카가 농담했다.
“저는 치료를 지시할 능력이 없으니까요.”
“그럼 여기서 할 일이 없습니까?”
“필요하면 기록을 돕겠죠. 지금은 메이 씨가 더 잘 알아요.”
오르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뒤 메이가 진료소에서 나왔다. 소년의 부상은 심각한 생명 위험은 아니었지만 며칠 동안 무리해서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다.
“그 아이가 오늘 밤에도 마차를 몰아야 한다던데요?” 메이가 물었다.
데런이 얼굴을 굳혔다.
“고용주가 짐을 기다린답니다.”
수현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고용주에게 상태를 알려야겠네요. 이쪽 지역의 근로 규정을 확인해서 다른 사람이 마차를 몰 수 있는지 먼저 알아봐요.”
카이렌은 이미 전령에게 연락을 맡겼다.
“저희가 가진 여분 마차가 있습니까?”
데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만 왕립길드 물품입니다. 개인 사업에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허가부터 받아야겠군요.”
수현은 웃었다. 예전 같으면 카이렌이 소년의 마차를 대신 끌고 밤길로 나갔을 것이다. 좋은 마음이 규칙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의 안전을 챙기는 방법으로 바뀌고 있었다.
***
저녁에는 원정대 전원이 아닌 일부 담당자들만 모여 운영 시험 기록을 정리했다. 제7원정대의 30일 시험 운영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아직 최종 평가가 나오지 않았다.
브레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휴식 시간을 늘렸더니 긴급 출정 때마다 대체 인력을 찾기가 어렵군.”
카이렌이 대답했다.
“대체 인력 목록을 상시 갱신하겠습니다. 다만 지금까지는 누구든 쉬는 중에 호출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게 문제였습니다.”
“용사라면 목숨이 달린 순간에 나서야 하지 않나?”
“물론입니다. 목숨이 달린 순간인지 먼저 구분하자는 말입니다.”
수현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오래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카이렌을 처음 만났던 밤에는 그가 쉬어야 한다는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얼마나 긴장했던가. 이제 그 말을 카이렌 자신이 하고 있었다.
브레그는 못마땅해하면서도 기록을 보았다.
“보급 사고는 줄었고, 출정 지연은 심각한 문제가 없었군.”
“아직 장기 성과를 말하긴 어렵습니다.” 카이렌이 대답했다. “하지만 적어도 다친 사람을 억지로 계속 일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브레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회의록의 작은 칸을 보았다. 참석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은 없었다. 그녀는 현재 유급 자문 계약을 마친 사람이었다. 초청 받아 의견을 들을 수는 있지만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기분 좋았다.
***
밤에 카이렌이 다시 수현을 찾았다. 그는 허락받은 의료 자료를 접은 채 들고 왔다.
“이것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제 손등의 흉터를 사진처럼 남길 방법이 있을까요? 나중에 의사에게 보여 주고 싶습니다.”
수현은 메이에게 물었다. 메이는 작은 마력 각인판으로 상처의 형태를 종이에 옮길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의료 목적 외에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먼저 받아야 한다고 했다.
카이렌은 동의했다. 메이는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조그만 은빛 선이 종이에 남았다.
“이걸로 제가 소생됐는지도 알 수 있나요?” 카이렌이 물었다.
“그건 알 수 없어요.” 메이가 말했다. “다만 지금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비교할 수 있죠.”
카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옆에서 서류를 정리했다. 그때 처음으로 카이렌이 용사가 된 날부터 얼마나 많은 일이 본인의 동의 없이 결정됐는지 생각했다. 계약을 읽을 시간도 없이 서명했고, 치료비를 설명받지 못했고, 아픈 몸으로 출정했다. 이제는 자신의 흉터 하나를 기록하는 일조차 스스로 선택하고 있었다.
“수현 씨.”
“네?”
“저는 정말 죽었다 살아난 사람일까요?”
수현은 그를 한참 바라봤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 사실을 알아내더라도 카이렌 씨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일을 대신 결정하지는 못해요.”
카이렌은 천천히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은 예정대로 쉽니다.”
그 말은 어떤 확인서보다 믿음직했다.
***
수현은 잠들기 전 세드나에게서 받은 메모를 펼쳤다. 카이렌의 K형 장치 관련 기록은 아직 일부분만 허가됐고, 개인 치료 기록의 더 깊은 열람에는 추가 동의와 의료 담당자의 검토가 필요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보고서에 쓴 뒤, 자신의 귀환 조사 메모와 별도 봉투에 넣었다. 처음에 이 두 사건을 연결하면 답이 빨리 나올 것 같았다. 소생과 소환 모두 몸을 다른 상태로 바꾸는 신기한 기술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두 기술이 같다는 근거가 없었다.
메이가 다가와 물었다.
“수현 씨는 그 고리가 정말 뭐라고 생각해요?”
“아직 모르겠어요. 안정 장치일 수도 있고, 치료 과정에서 잠깐 쓴 장비일 수도 있죠.”
“저는 카이렌이 그 사흘 동안 얼마나 외로웠을지 생각해요.”
수현은 메이를 바라봤다.
“그건 기록이 없어도 생각할 수 있어요.”
메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는 젠이 교대 시간을 알리는 작은 종을 쳤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깨우지 않도록 가볍게 한 번만 울렸다. 원정대는 이전보다 조금 조용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수현은 자신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 작은 변화가 남기를 바랐다. 그래서 카이렌에게 휴식표를 반드시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까 오래 이어질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 루세에게서 새로운 소식이 도착했다. 여섯 번째 서랍의 시험 기준을 따라 외부 등록망 밖 독립 수신점을 조사할 수 있는 허가가 접수됐다는 내용이었다.
수현은 작은 메모를 적었다.
[검증 목적: 장치 밖의 독립 입력 여부. 사람 전송 아님.]
그리고 불을 껐다.
내일의 사건이 어떤 답을 가져오더라도, 오늘 카이렌이 자기 손으로 자신의 기록을 접던 장면은 남을 것이다.
천막 바깥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젠이 데런에게 내일 쉬는 날에는 말을 씻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중이었다. 데런은 말이 동의하면 그렇게 하자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수현은 그 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예전에는 이런 시시한 대화를 할 시간이 없었다. 누구나 자기가 맡은 일을 끝내기 위해 말없이 뛰어다녔다.
어쩌면 이곳의 가장 큰 변화는 거창한 계약서가 아니었다. 이제 대원들이 서로에게 오늘은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 말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수현은 그런 작은 장면을 보고서에 옮겨 적지 않았다. 기록이 없어도 괜찮은 밤이 있었으니까.
제8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