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 정산실은 메이에게 두 번째 출석 통지를 보냈다.
첫 번째 통지에는 ‘치료 비용 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번에는 표현이 달랐다.
[개인 청구 승인 기록의 부존재 여부 확인 및 정산 범위 조정 의견 청취.]
메이는 통지서를 소리 내 읽다가 중간에서 멈췄다.
“이걸 꼭 이렇게 써야 할까요?”
수현은 그 옆에서 물을 마시다 웃음을 참았다.
“저도 두 번 읽었어요. 요약하면 ‘왜 당신에게 돈을 내라고 했는지 증거를 다시 확인하겠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쓰면 쉬울 텐데.”
“서류가 쉬우면 사람들이 질문을 더 많이 할까 봐 그런가 봐요.”
세드나가 두 사람을 돌아봤다.
“공식 서류에도 한계를 적어야 합니다. 다른 부서가 보더라도 같은 의미로 읽도록요.”
“그렇다면 괄호 안에 쉬운 말도 넣으면 좋겠네요.” 수현이 말했다.
세드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 제안은 접수하겠습니다.”
그 말에 메이가 웃었다. 이제는 누군가 ‘접수하겠다’고 말해도 무조건 무섭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정산실의 문 앞에 도착하자 메이의 손목 고리가 붉게 빛났다. 임시 징수 유예가 아직 유효하다는 표식 옆에 ‘개인 채무 잔존’이라는 문구가 새로 떠 있었다.
“여전히 빚이 있다는 거네요.” 메이가 말했다.
수현은 서둘러 부정하지 않았다.
“현재 장부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는 뜻이겠죠. 오늘 바로 바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제가 뭘 받았는지 직접 듣고 싶어요.”
“그럼 그렇게 물으세요. 제가 대신 말할 필요 없어요.”
메이는 고개를 들었다.
***
정산실 담당자 키아는 두꺼운 회계 원장을 펼쳤다. 방 한쪽에는 작은 마석 저울과 오래된 지급 증명서가 놓여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치료라는 행위보다 그 치료가 남긴 숫자를 훨씬 자주 보는 듯했다.
“C-47 심사 결과의 중간 통지입니다.” 키아가 말했다. “예비 적립비 일부에 대해 개인 부담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메이는 곧바로 물었다.
“그럼 그 돈을 안 내도 되는 건가요?”
“최종 심사 전까지 강제 징수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산이 끝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부분은 알고 있어요. 저는 왜 제 이름으로 된 돈이 있는지 묻고 싶어요.”
키아는 원장을 돌려 주었다.
“치료 실비, 약재 출고, 예비 적립, 소생 대비 금액이 각각 다른 칸으로 표시돼 있습니다. 문제는 이 항목들이 후대 장부에 합쳐졌다는 겁니다.”
메이는 치료 실비 칸을 짚었다.
“이 마석은 제가 쓴 게 아니에요. 이 날짜엔 다친 창병을 돌보고 있어서 약재창고에 갈 수도 없었어요.”
“그때 물품은 현장 관리자가 일괄 수령했습니다.”
“그럼 제가 수령한 게 아니잖아요.”
키아는 말을 멈췄다.
메이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질문은 선명했다.
“왕실 돈으로 출고된 물건을 누가 받았는지, 제 치료에 실제로 쓰였는지, 왜 제게 청구됐는지를 따로 알려 주세요. 제 손목에 고리가 채워졌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답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수현은 메이가 한 말을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받아 적었다. 예전의 메이는 이런 자리에서 눈물을 참으며 고개만 끄덕였을 것이다. 지금은 자신의 치료 업무를 스스로 설명하고 있었다.
세드나는 당사자의 발언을 공식 의견란에 넣어도 되는지 물었다. 키아가 동의했다.
***
심사는 숫자보다 사람의 이름에서 막혔다. 약재 출고표의 수령인은 ‘현장 대리’라고만 쓰여 있었고, 대리 권한을 지정한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약재가 부상자에게 쓰였을 가능성은 높았다. 치료소의 환자 기록에 같은 종류의 물약이 여러 차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럼 누가 책임져야 해요?” 메이가 물었다.
키아는 대답하기 전에 장부를 닫았다.
“그건 아직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자료만으로 메이 님의 개인 채무가 확정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만 적어 주시면 돼요. 다른 사람한테 바로 청구하라고 요구하는 건 아니에요.”
수현은 메이를 바라봤다. 책임을 물으면서도 다른 부서의 노동자에게 무조건 떠넘기지 않으려는 태도가 마음에 남았다.
키아는 결정서 초안에 수정 내용을 입력했다. 지급된 물품과 청구된 금액을 별도 항목으로 나누고, 개인 청구 승인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은 ‘심사 대상’이라고 표시했다.
“그런데 마석 두 개가 지급된 걸로 되어 있죠?” 메이가 물었다.
“장부에는 두 건입니다.”
“실제 출고는 하나였을 수도 있나요?”
“공급 기록이 두 번 입력된 사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건이 중복 입력인지는 실물 출고 기록을 더 봐야 합니다.”
메이는 손가락으로 두 날짜를 짚었다.
“첫 번째 날에는 카이렌이 의식을 잃었고, 두 번째 날에는 제가 일곱 시간 동안 환자를 돌봤어요. 이게 같은 치료 과정이라고 합쳐졌다면 저라도 헷갈릴 것 같아요.”
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 기록을 통해 실제 물품 사용 시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겠군요. 하지만 환자의 개인 의료 기록은 동의 없이 볼 수 없습니다.”
“제가 제 기록을 낼게요.” 메이가 대답했다. “다른 환자의 이름은 가린 뒤 필요한 부분만 보이게 해 주세요.”
수현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원장의 한쪽 페이지가 찢어져 있어서 다른 보존 사본과 대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점심은 드셔야죠.” 메이가 말했다.
“조금만 더 하면 끝납니다.”
“제가 그 말을 정말 많이 했어요.”
키아가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요?”
“치유실에서요. ‘이 환자만 보고’, ‘마석 하나만 더 쓰고’, ‘이 명부만 쓰고’. 그렇게 말하다가 하루가 끝났어요.”
키아는 펜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심사가 지연되면 당신에게도 불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결론이 안 나도 제 고리는 그대로잖아요. 그렇다고 심사하는 사람이 밥을 안 먹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수현은 메이에게 작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메이는 모르는 척 웃었다.
키아는 자신이 늘 듣던 조언을 당사자에게서 듣는 게 낯선 듯했다. 이윽고 서류를 덮고 열쇠를 챙겼다.
“그럼 한 시간 뒤에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근처 식당으로 갔다. 메이는 국물을 천천히 떠먹었다. 손목의 붉은 고리는 여전히 빛났지만 오전보다 표정이 한결 편해 보였다.
“빚이 아직 남아 있는데 괜찮으세요?” 수현이 물었다.
“괜찮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제는 어떤 부분이 제 것인지 물을 수 있잖아요. 전에는 그 질문조차 못 했어요.”
“그건 정말 큰 차이죠.”
메이는 잠시 수현을 보았다.
“수현 씨는 집에 돌아가도 계속 이런 일 할 거예요?”
“아마요. 누군가의 일한 시간을 확인하는 일이요.”
“그럼 서울 사람들은 좋겠네요.”
수현은 잠깐 웃었다.
“서울 사람들 중에는 제 목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아픈 분들도 있을 거예요.”
메이는 큰 소리로 웃었다.
***
오후에는 동부 정산실의 감사 담당자가 들어왔다. 그는 예비 적립비를 완전히 취소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치료비 보험처럼 쌓아 둔 돈이기 때문에 나중에 실제 소생이나 재활에 쓰였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메이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그럼 그 돈이 실제로 누구에게 쓰였는지 기록이 있나요?”
감사 담당자는 즉시 답하지 못했다.
“그 돈은 여러 환자를 위해 모은 것이어서 개인별로 사용처가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제 개인 빚이 된 이유를 알고 싶어요.”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산이나 기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특정한 사람에게 자동으로 청구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 세계의 실제 계약 조항을 검토해야 했고, 모금 자체의 정당성까지 한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었다.
키아가 서류를 나누어 놓았다.
“예비 적립금 항목은 개인 부담 근거가 부족하므로 별도 보류하겠습니다. 실제 치료 실비는 환자와 보급 기록 확인 후 재심사하겠습니다.”
메이는 결정서 초안의 각 항목을 살폈다.
“그럼 적어도 이 돈을 제가 지금 내야 한다는 건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오늘도 징수 보류는 유지됩니다.”
“손목 고리는요?”
“고리는 채무 전체 상태를 표시하는 장치라 아직 해제할 권한이 없습니다. 다만 잘못된 안내 문구가 뜬다면 정정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메이는 한숨을 쉬었다.
“고리를 풀고 싶은데요.”
키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 요청도 정식으로 기록하겠습니다.”
수현은 그 말을 들으며 메이의 고리를 바라봤다. 몸에 채워진 장치가 단순한 알림이라면 왜 해제를 본인 의사대로 할 수 없을까. 그것은 언젠가 별도로 다뤄야 할 문제였다.
***
회의가 끝난 뒤 세드나는 수현에게 절차 기록의 일부를 보여 주었다. 왕립길드가 제7원정대에 지원한 치료비와 메이 명의로 청구한 금액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차이가 곧 횡령이나 고의 조작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 차이가 생기는 이유가 뭐예요?” 수현이 물었다.
“마석을 구입한 가격과 정산 기준 가격이 다를 수 있고, 긴급 사용 수수료가 붙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항목별 근거는 남아 있어야겠죠.”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은 돈이 부족하다고만 들었어요. 어떤 비용이 부족한지는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고요.”
“앞으로는 설명을 요구하세요.” 수현이 말했다. “설명이 없다면 기록으로 남겨 놓고요.”
“이제 그렇게 할 거예요.”
그들은 정산실을 나와 마차를 찾았다. 데런이 마차 앞에서 고삐를 정리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수현 일행의 왕도 출장을 돕고 있었지만, 그의 정식 소속은 여전히 제7원정대였다.
“이번 이동 경비는 어디로 청구하면 될까요?” 데런이 물었다.
수현이 자신의 가방을 들었다.
“이번 건은 제 개인 조사의 이동비가 섞여 있으니까 제가 부담할 부분을 나눠야죠. 메이 씨 심사 참석을 위한 이동과는 분리하고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전부 길드에 적었을 텐데.”
“그랬다가는 나중에 또 누군가의 빚이 될 수도 있잖아요.”
데런은 더 말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
밤이 되자 메이는 고리 위에 나타난 문구를 다시 읽었다.
[강제 징수 유예. 개인 부담 범위 재심사 중.]
전날까지 있었던 ‘확정 채무’라는 표현이 사라지고 있었다. 고리 자체는 남아 있었지만, 기록의 문구가 조금씩 실제 심사 상태를 반영하게 된 것이다.
“아직 안 풀렸네요.” 메이가 말했다.
“네.”
“그래도 틀린 말이 하나 줄었어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는 손목에 부드러운 천을 감았다. 단지 붉은 빛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잠을 잘 때 금속이 피부를 누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수현은 그 모습에서 작은 저항 같은 것을 느꼈다. 고리를 당장 없앨 수는 없어도 몸이 다치지 않도록 스스로 돌보는 선택이었다.
“언젠가는 이 고리도 풀 수 있겠죠?” 메이가 물었다.
“제가 확답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근거를 확인하지 못한 비용을 당연하다고만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것부터 달라졌잖아요.”
메이는 잠시 웃었다.
“오늘 키아 씨가 점심을 먹으러 간 것도 달라진 것 같아요.”
“그럼 오늘 성과가 두 개네요.”
“세 개요. 데런이 여비 장부를 새로 썼잖아요.”
수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가장 큰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누가 수현을 서울에서 끌어왔는지, 어떤 장치로 돌아갈 수 있는지, 에린이라는 이름들이 서로 관련 있는지. 그러나 오늘 메이는 자기 빚을 자기 말로 설명했다. 수현은 그 사실을 임시 결정서보다 더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
잠들기 직전 세드나가 짧은 봉투를 전해 주었다. 내용은 카이렌의 진료 기록 한정 열람 심사 결과였다.
[신청인 본인 열람 일부 허가. K형 안정 장치 보급 이력은 개인 병력과 분리 제공. 소생 기록은 별도 심사.]
수현은 봉투를 바로 열지 않았다. 카이렌의 기록은 카이렌의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허가가 나왔다는 사실만 알려 주고, 원문을 볼지는 본인에게 맡기기로 했다.
“무슨 서류예요?” 메이가 물었다.
“카이렌 씨 것 같아요. 먼저 당사자한테 보내야겠네요.”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면 또 다른 질문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오늘 수현은 한 사람의 기록이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을 먼저 선택했다.
그녀는 봉투 겉면에 간단한 전달 메모를 붙였다. ‘본인 확인 전 개봉하지 않음. 열람을 거절해도 불이익 없음.’ 작은 문장 두 줄이었지만, 수현이 이 세계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예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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