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감독청 봉인 서고의 문은 수현이 상상했던 것만큼 거창하지 않았다. 두꺼운 돌문도 없고 무서운 경비병이 창을 겨누고 있지도 않았다. 대신 초라한 책상 하나가 통로를 막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빈 서식함이 여섯 개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서류가 필요한 이유가 있나요?” 메이가 물었다.
창구 직원이 무심하게 답했다.
“여기는 자료를 꺼내는 사람보다 잘못 꺼냈다가 책임지는 사람이 더 많았거든요.”
“그럼 서류가 사람을 지켜 주네요.”
“어떤 때는요.” 수현이 말했다. “어떤 때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쌓아 놓기도 하고요.”
그 말에 직원이 펜을 들던 손을 멈췄다. 수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신청서를 내밀었다.
이번 신청의 목적은 분명했다. 옛 관측소에서 가져왔다는 봉인 수신판의 보존 위치 확인. 가능하다면 원본 개봉 없이 외부 인장의 형태와 색상만 조사. 수신 내용이나 개인 정보는 열람 대상에서 제외.
“외부 인장만요?”
“네. 그걸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직원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내용을 읽을 수 있는데 왜 읽지 않겠다는 겁니까?”
“내용이 사실인지 판단하려면 먼저 이게 어떤 물건인지 알아야 하니까요. 보존 기록에 적힌 수신판과 다른 물건을 열어서 내용을 읽으면, 아무리 신기한 문장이 있어도 잘못된 증거잖아요.”
직원은 신청서에 표시 하나를 찍었다.
“내용 비열람 신청은 오랜만이군요.”
수현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 알 수 없었다.
***
허가는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 실물 내용 대신 표면 상태만 확인하는 비파괴 조사는 위험도가 낮다는 이유였다. 서고의 감정관 할드가 관측판을 천 위에 올려놓았다.
금속판은 장부에 붙일 수 있는 표지 정도의 크기였다. 회색빛 금속 가장자리에 검붉은 납이 굳어 있었고, 가운데에는 세 개의 원이 겹쳐진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메이가 숨을 들이켰다.
“유렌 관측관이 그린 그림하고 닮았어요.”
“네. 다만 점이 있는 위치가 달라요.” 수현은 기록 사진을 꺼냈다. “그림에서는 안쪽 원 왼편인데, 여기선 바깥 원 아래쪽이네요.”
할드가 웃었다.
“그 차이를 바로 알아보는 사람이 드뭅니다. 대부분은 원 세 개니까 같은 문양이라고만 해요.”
“이런 문양이 여러 개였나요?”
“봉인 고유 서명판은 같은 틀에서 찍어도 작은 홈이 달라집니다. 일종의 연속 번호죠. 고유한 물건이긴 하지만 어떤 내용이 진실인지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번호가 겹치지 않는다는 것과 그 물건이 진짜라는 건 다른 얘기군요.”
“진품일 가능성을 검증하는 수단입니다. 하지만 누가 훔쳤다가 돌려놓았는지, 어느 시점에 내용이 바뀌었는지는 별도 확인해야 해요.”
세드나가 인계표를 살폈다. 서고는 마지막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 전에 두 개의 부서가 수신판을 잠시 보관했다. 이관 기록의 인장은 모두 정상이었지만, 그중 하나의 시간칸이 공백이었다.
“또 빈칸이네요.” 메이가 중얼거렸다.
“빈칸 자체를 범죄라고 생각하면 이 왕국 사람 절반은 감옥에 가야 할 겁니다.” 수현은 웃었다. “비어 있는 칸이 어떤 판단에 영향을 줬는지부터 봐야죠.”
할드가 한쪽 손으로 금속판을 돌렸다. 빛의 방향이 바뀌자 표면에 작은 긁힌 자국이 드러났다.
“이것이 진짜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판은 한 번 떼어낸 뒤 다시 붙였던 흔적이 있어요.”
메이가 놀라 한 발 다가섰다.
“누가요?”
“그걸 알면 좋겠군요. 수리 기록인지, 무단 개봉인지는 아직 판별할 수 없습니다.”
수현은 판을 손가락으로 만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접촉할 권한도 없고, 만진다고 답이 나오는 물건도 아니었다.
***
감정관은 원형 문양을 탁본하는 대신 빛으로 표면을 읽는 장치를 사용했다. 작은 램프 세 개가 차례로 켜졌다. 수현에게는 정밀 측정 장비가 모두 마법처럼 보였지만, 루세가 설명하기로는 빛 반사량을 비교하는 단순한 도구라고 했다.
“같은 장비로 이전에 찍은 기록이 있습니까?” 루세가 물었다.
“예. 보존 시작 당시 측정값이 남아 있습니다.” 할드가 답했다.
장치가 회색 판 위를 훑는 동안 수현은 다른 방의 오래된 수신 기록을 떠올렸다. 처음 이 세계의 전파 같은 현상을 보고 서울과 연결될 수 있을지 기대했던 순간이 있었다. 지금 그 기대를 억지로 지우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잘못된 근거에 기대면 귀환 방법을 찾을수록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됐다.
측정이 끝나자 할드가 종이를 내밀었다.
“기록상 물건과 같은 표면 특징입니다. 단, 가운데 봉인물의 접착층은 수리된 적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품 확인은 잠정적으로 가능하다는 뜻인가요?”
“보존 중 등록된 그 물건이라는 사실은 확인됐습니다. 관측소 폐쇄 당시 원본과 동일한지는 말할 수 없고요.”
루세가 작은 홈의 위치를 정리했다.
“이 홈들을 고유 서명판의 전체 번호에 연결할 수 있겠네요. 관측소에서 확인했던 세 자리 값은 고유 번호가 아니라 검산값이니까.”
수현은 루세를 돌아봤다.
“그럼 같은 세 자리 값이 여러 번 나왔던 이유를 이 판으로 구분할 수 있겠네요?”
“가능할 겁니다. 다만 서명판을 만든 원장도 필요합니다. 홈의 생성 규칙이 시기별로 바뀌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전체 번호를 만들어 내지 않는 거죠.”
“그렇지.”
루세는 수현을 흘끗 봤다.
“너, 나보다 더 기계를 안 믿는 것 같다.”
“아뇨. 전 기계를 믿어요. 기계가 대답하지 않은 질문에 사람이 답을 만들어 내는 걸 못 믿는 거예요.”
***
점심 무렵 할드의 조수가 급히 서고로 들어왔다. 그가 건넨 봉투는 봉인 수신판과 같은 번호를 가진 오래된 수리 청구서였다. 조수는 신이 나서 말했다.
“찾았습니다! 오래전에 누가 접착층을 수리했습니다. 그러니 무단 개봉은 아닌 것 같아요.”
할드가 자료를 읽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수리 청구서가 있으니까요.”
“이건 수리 비용 지급 내역이다. 실제로 어느 물건을 수리했는지 적힌 작업 완료표는 없잖나.”
조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수현은 비슷한 장면을 셀 수 없이 봤다. 세금 계산서가 있다고 물건이 반드시 도착한 건 아니었다. 계약서가 있다고 일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문서마다 증명하는 범위가 다르다는 사실을 잊으면 아주 정교한 거짓말이 만들어졌다.
“수리 청구서도 쓸모는 있네요.” 수현이 말했다.
“어떻게요?”
“수리비를 청구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어느 부서에 청구했는지는 알 수 있으니까요. 실제 수리 여부는 다음 질문이고요.”
할드의 조수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수현은 그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잘못된 추정을 고치는 일과 사람을 망신 주는 일은 굳이 함께 갈 필요가 없었다.
세드나는 청구서의 부서명을 가리켰다.
“‘동부 회선 보수반’이라고 적혀 있네요. 옛 에린 소렐의 기록 이관 부서와 겹칩니다.”
수현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사람 이름이 겹치는 건가요, 부서 이름이 겹치는 건가요?”
“부서 이름입니다.”
“그럼 그 사실만 기록하죠.”
메이가 속삭였다.
“수현 씨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비밀이 한 발짝 도망가는 것 같아요.”
“아무 비밀이나 붙잡으면 다른 사람의 목을 잡게 되니까요.”
***
오후에는 기술자들이 판의 인장 홈을 봉인 상태 기록으로 옮겨 적었다. 할드는 사람 손으로 모사한 그림이 원본처럼 돌아다니지 않도록 사본에 붉은 선을 넣었다. 수현은 그 절차를 꼼꼼히 지켜봤다.
“왜 붉은 선을 넣나요?”
“복제본을 다시 봉인 인장으로 쓰지 못하도록요. 진짜와 비슷하게 보이는 그림이 제일 위험합니다.”
세드나가 말했다.
“계약 인장도 비슷한 문제가 있어요. 공작가의 B-13 위임 인장이 있다고 해서 모든 계약에 공작이 직접 승인한 건 아니거든요.”
수현은 예전에 보았던 그 인장을 떠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공작의 이름에 매달렸지만, 실제로 밝혀진 것은 비용을 처리할 수 있는 일부 권한뿐이었다.
“인장도 사람도 맡은 일이 다 다른데, 밖에서 보면 전부 같은 힘으로 보이네요.”
“그래서 범위를 적어 두는 겁니다.” 세드나가 답했다.
루세는 측정값을 종이에 두 줄로 나눴다.
[보존 물건 동일성: 등록 시점과 일치.]
[원본 내용 및 최초 봉인 상태: 미확정.]
수현은 그 두 문장을 읽고 문득 웃었다. 대단한 마법 장치를 조사했는데 결과가 두 줄이었다. 하지만 두 줄이면 충분할 때가 있었다. 최소한 오늘은 확인하지 못한 것을 확인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수현은 보고서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복원 중에는 중계장치 동력 연결 금지. 시도할 경우 별도의 위험 평가와 당사자 동의 필요.]
할드가 그 문장을 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실험도 안 해 보겠습니까?”
“실험은 할 거예요. 다만 실험을 위해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거죠.”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가 지나갈 수도 있는데요.”
“사람이 다치면 그 기회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수현은 대답했다. 서울에서 누군가 서둘러 달라는 말을 했을 때마다 그녀가 가장 먼저 물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
저녁이 가까워지자 할드가 봉인판을 다시 상자에 넣었다. 조수가 확인 표를 읽고, 세드나와 루세가 각자 자신이 본 부분에만 서명했다. 수현의 서명칸에는 ‘신청인 참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저도 내용을 보증하는 건 아니네요.” 수현이 말했다.
“당연하지요. 읽지 않았잖아요.” 할드가 답했다.
그 답을 듣고 수현은 조금 웃었다.
서고를 나오기 직전 메이가 물었다.
“그럼 지금 우리한테 남은 건 뭔가요?”
“세 자리 숫자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았고, 판의 고유 홈을 확인했고, 나머지 원장을 찾으면 어느 수신 기록에 붙었던 물건인지 더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거요.”
“여전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답은 아니네요.”
“네.”
메이는 잠깐 침묵했다.
“그런데 수현 씨가 이제는 그 대답을 듣고도 별로 무너지지 않네요.”
수현은 자신의 가방을 고쳐 멨다.
“무너지지 않는 척하는 건지도 몰라요.”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완전한 농담은 아니었다. 서울의 밤을 떠올리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거실의 불빛이 실제 기억인지, 오래전 휴대전화 사진의 잔상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메이는 수현의 옆에서 걸었다. 손목의 고리는 아직 빛났지만 그녀는 그것을 코트 속에 숨기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같이 저녁 먹어요. 혼자 무너지는 건 좀 억울하니까.”
“이쪽 세계 치유사들은 상담도 잘하네요.”
“상담비 청구 안 할게요.”
두 사람은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날 밤 수현이 작성한 다음 질문은 더 이상 ‘서울에서 답장이 왔는가’가 아니었다.
[봉인 수신판의 원장 번호가 가리키는 입력 원본은 어디에 보관돼 있는가.]
그 질문은 전보다 작아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관에 돌아온 수현은 보고서를 한 번 더 읽었다. 서고에서 받은 문서에는 작은 주석이 달려 있었다. 봉인 고유 홈의 배열이 일정 시기 이후 바뀌었으므로, 생성 규칙 원장을 열람하려면 적용 연도를 먼저 증명해야 한다는 문장이었다.
“연도는 기상일지에 있잖아요?” 메이가 물었다.
“물건을 만든 날이랑 사용한 날은 다를 수 있죠.”
“그럼 또 뒤로 돌아가는 거네요.”
“돌아가는 게 아니라 경로를 확인하는 거예요. 제가 서울에서 고객 상담할 때도 서류가 세 장이면 꼭 두 번째 장만 빠져 있었거든요.”
메이는 책상에 턱을 괴었다.
“누군가 일부러 그런 건가요?”
“가끔은요. 가끔은 복사하다 빠지고, 가끔은 담당자가 바뀌면서 잊고, 가끔은 중요하다는 걸 몰라서요. 이유를 확인하지 않고 고의라고 쓰면 안 되죠.”
수현은 두 페이지를 나란히 펼쳤다. 관측관 유렌의 수기에는 ‘다른 색의 인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수신판의 바깥쪽 봉인은 검붉었다. 그러면 그날 교정표에는 다른 색이 붙어 있었을까. 아니면 유렌이 본 것이 이미 한 번 수리된 수신판일까.
“색은 오래되면 변하잖아요.” 메이가 말했다.
“그래요. 그러니까 판만 봐서는 부족해요. 그때 만든 분의 작업일지가 있어야 하죠.”
메이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수현 씨는 이제 그 물건에 대해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아는 것 같은데요.”
“대신 저는 여기서 약초 한 잎도 제대로 구분 못하잖아요. 우리 둘 다 모르는 게 많죠.”
메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는 것끼리 바꿔 쓰면 되겠네요.”
“좋죠. 하지만 제 지식으로 부상자를 치료하려고 하지는 마세요.”
“수현 씨도 제 약초 지식으로 계약서 쓰지는 마시고요.”
그 말을 나누고서야 수현은 긴장을 풀었다. 누가 어느 분야에서 전문가인지는 존중할 일이지, 서로를 평가해 줄 계급이 아니었다.
그날 밤 보고서 표지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따로 적혔다. 이수현, 신청인. 메이, 원 민원 당사자이자 독립 의견 제출인. 수현은 자신이 메이의 말을 대신하지 않게 된 이 변화가 생각보다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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