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기록원은 기상 분관보다 훨씬 근사했지만, 서류를 찾는 일은 더 오래 걸렸다.
수현은 접수대에서 접수번호를 받았다. ‘기증 자료 관련 가족 공개 범위 검토’라고 적힌 구분 아래에서 대기해야 한다고 했다. 가장 오래된 왕국의 신화가 보관된 곳에서, 그녀는 다시 한 번 평범한 개인정보 열람 절차에 걸렸다.
“혹시 우리가 마왕을 잡으러 가면 서류를 좀 빨리 볼 수 있을까요?” 메이가 작게 물었다.
“마왕 퇴치 기록을 제출하라고 할걸요.”
“그럼 포기할게요.”
“현명한 판단이에요.”
세드나는 번호표를 확인하며 웃었다. 이 세계에서 악마보다 거대한 존재는 서류를 보관하는 창고일지도 몰랐다.
기증 자료를 관리하는 사서 이베른이 서류를 들고 나타났다. 전에 만났을 때보다 얼굴이 조금 수척했다. 그녀는 수현의 신청 사유를 읽은 뒤 목록장을 펼쳤다.
“기상 분관에서 보낸 자료 요청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록은 당시 관측자의 가족이 기증한 문서입니다. 공개 가능한 운영 정보와 개인 편지 부분이 섞여 있어요.”
“운영 정보만 제한 열람할 수 있을까요?”
“가족이 어떤 조건으로 기증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기증자의 연락처는 제공할 수 없어요.”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처는 필요 없습니다. 제 요청과 열람 범위를 전달해 주시면 됩니다. 거절하셔도 이유를 자세히 밝히실 필요는 없고요.”
이베른은 신청서의 문장을 고쳐 적었다.
“기록원 직원끼리도 이렇게 쓰면 덜 싸우겠네요.”
“한국에서도 잘 안 되던 일이에요.”
“한국?”
“제가 살던 곳입니다.”
이베른은 더 묻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낯선 지명이 아니라 신청이 기록의 보존 목적에 부합하는지였다.
수현은 아침에 받은 작은 쪽지를 가방에서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문 밑으로 밀어 넣은 ‘고유 서명판 복원 신청 접수’ 안내였다. 지난번에는 익명 쪽지 때문에 조급해질 뻔했다. 이번에는 적법한 답이 오기 전까지 비공식 통지를 근거로 움직이지 않겠다고 정했다.
***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이베른은 공개 열람 가능한 기술 자료를 보여 주었다. 오래된 기상 관측자의 직책은 ‘하늘을 듣는 자’라고 번역될 만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실제 업무는 훨씬 소박했다. 정해진 시간에 바람과 기압을 적고, 관측 도구를 닦고, 고장 난 눈금을 보고하는 일이었다.
“이런 직책이라면 왕궁에서 꽤 대우받았겠네요.” 메이가 말했다.
“대우받았는지는 급여 장부를 봐야죠.” 수현이 답했다.
“또 돈이군요.”
“저는 이 세상에서 명예라는 말을 제일 조심해요. 명예 때문에 월급이 사라지는 걸 너무 자주 봤거든요.”
세드나가 열린 서책을 가리켰다.
“보수 지급은 감독청 소속이고 숙식은 시설에서 제공했다고 되어 있군요. 야간 수당은 비상 상황에만 따로 계산됐네요.”
“이 기록이 관측 일지와 연결될 수도 있어요. 두 번째 밤이 추가 야간 업무라는 뜻이라면요.”
수현은 가능한 가설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이튿날 밤 재관측을 했을 가능성. 같은 밤에 장비만 바꾸어 측정했을 가능성. 날짜를 수정하면서 같은 밤이 두 장부에 중복 기록됐을 가능성. 어느 것도 시간 이동을 뜻하지는 않았다.
메이는 수현의 메모를 보더니 작은 선 하나를 보탰다.
“네 번째도 있지 않아요? 잠을 못 자서 밤을 두 번 샌 거죠.”
“그건 더 슬픈 가설인데요.”
“병동에서는 자주 쓰는 표현이에요. 한밤을 넘겨 근무하면 또 밤이 오는 것 같아서요.”
수현은 네 번째 가설도 적었다. 당사자가 사용하는 말을 무시하면 기록의 뜻을 놓칠 수 있었다.
정오가 지날 무렵 기록원이 쪽지를 전했다. 기증자 측에서 운영 부분의 제한 열람을 허용하되 개인 일기는 가리고 열람하라고 했다. 수현은 쪽지를 확인하고 메이에게 내밀었다.
“됐어요.”
“그럼 오늘은 바로 볼 수 있나요?”
“상태 점검이 끝나면요.”
메이는 웃었다.
“왕국은 사람을 서두르게 만드는 데 정말 소질이 없어요.”
“오히려 가끔 너무 빠르게 처리해서 문제가 생겼잖아요. 제 소환처럼요.”
그 말에 세드나의 웃음이 잠시 멈췄다.
***
수기 부록은 생각보다 작았다. 가죽 표지의 손바닥만 한 책이었다. 장기간 햇볕을 본 것처럼 한쪽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사서는 얇은 반투명 종이로 사적인 구간을 가린 뒤 책장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관측자의 이름이 있었다.
[유렌 달트. 동부 관측소 기상관측관.]
수현은 이름을 소리 내 읽었다. 에린 소렐이 아니었다. 한동안 모든 옛 기록에서 그 이름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이분이 마지막 근무자였나요?”
이베른이 설명했다.
“관측소가 문을 닫을 때 야간 관측을 담당한 분입니다. 기록에는 근무를 마친 뒤 기상 분관으로 전출됐다고 나와 있습니다. 몇 년 후 개인 자료를 가족에게 남겼고요.”
“소환 장치를 운용한 사람은 아니었군요.”
“그건 부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직책은 기상관측관입니다.”
수현은 첫 문장을 읽었다.
[풍향은 남동. 구름 없음. 관측실의 물시계가 멎었으나 통신실에서는 계속 세 번의 종이 울렸다.]
그다음 문장은 다른 날에 적혀 있었다.
[어젯밤 기록을 오늘 밤과 혼동하지 않게 따로 적는다. 그때 나는 혼자 있었고, 두 번째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수현의 눈이 멈췄다.
“이게 ‘두 번째 밤’이군요.”
“날짜가 다릅니다.” 세드나가 말했다. “시간 반복은 아니에요.”
메이가 미소 지었다.
“어제 수현 씨가 적은 가설 하나가 지워졌네요.”
“오히려 더 질문이 생겼어요. 첫 번째 밤에는 혼자였고 두 번째 밤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니, 누가 언제 들어왔는지를 알아야 해요.”
책장 옆에는 세밀한 도형이 그려져 있었다. 원 세 개가 겹친 모양이었고 가운데에는 아주 작은 점이 찍혀 있었다.
“이게 사람을 나타낸 건가요?”
이베른은 고개를 저었다.
“관측 장비의 그림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해석을 적은 주석이 없네요.”
수현은 도형을 베끼지 않았다. 그림이 정확하지 않으면 나중에 해석이 왜곡될 수 있었다. 허락받은 범위에서 보존 사진을 요청했다.
***
두 번째 밤의 기록에는 뜻밖에 생활적인 내용이 많았다. 관측관 유렌은 식지 않은 차를 마시려 했다가 야간 순찰을 맡았고, 문을 닫을 즈음 늦게 교대가 들어왔다고 적었다. 서고 관리인이 개인 부분을 가린 곳에는 가족에게 보내는 인사말이 있었을 것이다. 수현은 굳이 그 종이 아래를 들춰보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있었다는 문장의 다음 줄은요?”
[하나는 교정표를 들고 왔고, 다른 하나는 봉인된 수신판을 가져왔다. 나는 어느 쪽도 메시지를 읽지 못했다. 다만 장치가 제 시간에 울리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메이가 무심코 물었다.
“메시지를 읽지 못했으면 외부에서 뭐가 왔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죠. 하지만 둘이 서로 다른 물건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어요.” 수현이 답했다.
세드나는 봉인 상태란을 살폈다.
“수신판과 교정표가 원래부터 별도 보존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전 기록에서는 두 문서가 하나의 연속 표로 묶여 있었어요.”
“누군가 실수로 합친 걸까요?”
“그 가능성도 있지만, 정당한 이관 절차일 수도 있습니다.”
수현은 유렌의 수기 마지막 부분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바람의 변화를 기록했으며 편지의 내용을 보증하지 않는다. 장치실과 관측실의 시계는 그날 밤 끝내 일치하지 않았다.]
그 아래에는 다소 흔들린 글씨로 같은 문장이 한 번 더 있었다.
[보증하지 않는다.]
글을 쓴 사람이 왜 두 번 강조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말일 수도 있었다. 자신이 보지 못한 것까지 증언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것일 수도 있었다.
수현은 끝까지 읽은 뒤 책에서 눈을 뗐다.
“이 기록이 진실이라고 믿어도 될까요?” 메이가 물었다.
“이분이 그렇게 썼다는 건 확인했어요. 내용의 진실은 다른 자료와 맞춰 봐야죠.”
“정말 한 번에 대답해 주는 법이 없네요.”
“그런 분을 찾으시려면 점쟁이한테 가셔야 해요.”
메이는 웃다가 다시 책을 바라봤다.
“그래도 그분은 혼자였다는 얘기를 남겼네요. 누군가 증인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수현은 바로 적지 않았다. 그건 메이의 해석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전부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마음에 대한 대화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
열람이 끝날 무렵 수현은 관측관의 일기 중 공개된 부분에서 눈에 띄는 표현을 발견했다.
[교정표는 인장 없는 복본이었다. 수신판에는 다르게 새긴 인장이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이 모두 원본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봉인의 색이 달랐다.]
그녀는 세드나를 불렀다.
“두 자료를 가져온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아도 이 인장의 차이는 확인할 수 있겠네요.”
“보존 목록에 색이나 날인이 따로 기록됐다면 가능하죠.”
이베른이 장부를 넘겼다.
“교정표 복본은 기상 분관으로 갔고, 수신판은 감독청 봉인 서고로 이송된 것으로 되어 있어요. 하지만 수신판의 실물 위치는 열람 목록에 뜨지 않습니다.”
“사라졌다는 뜻인가요?”
“아뇨. 분류가 제한됐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수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오늘 밝혀진 모든 일은 다음 허가서로 이어졌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 수신판에 적힌 문구와 기상 일지를 구분할 근거가 생겼다.
“관측관의 마지막 이름이 유렌이라는 것, 첫째 밤과 둘째 밤이 실제 다른 날짜였다는 것, 그리고 인장이 다른 원본 두 건이 있었다는 것. 여기까지만 우선 정리하죠.”
“왜요?” 메이가 물었다.
“그 이상은 아직 쓰면 안 되니까요.”
이베른은 수현이 작성한 열람 요약을 읽더니 묵묵히 서명했다. 문서가 가방에 들어가는 순간 수현은 이상한 책임감을 느꼈다. 누군가의 오래된 개인 기록을 빌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고 있었다. 기증자와 관측관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더 조심하고 싶었다.
***
왕도 기록원을 나서는 길에 세드나가 말했다.
“에린 소렐 이름은 없었습니다.”
“네. 그게 이상할 것 없죠.”
“실망하지 않았어요?”
“실망은 했어요. 그런데 에린이 모든 서류에 등장하면 그게 더 수상하겠죠. 하나의 이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조사라는 게 너무 쉬워져요.”
메이가 두 사람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럼 다음에는 누구를 찾으러 가요?”
“사람보다 물건을 찾을래요. 서로 다른 인장이 붙었다는 두 자료의 보존 경로요.”
세드나는 잠시 생각했다.
“감독청 봉인 서고의 수신판 열람에는 더 높은 등급의 보존 허가가 필요할 겁니다.”
“당연하겠죠. 봉인된 물건이니까요.”
수현은 멋없는 대답을 하고도 미소 지었다. 이제는 허가가 필요하다는 말이 거절처럼 들리지 않았다. 정확한 절차를 찾았다면 앞으로 갈 길이 있다는 뜻이었다.
여관으로 돌아온 뒤 수현은 유렌의 문장 한 줄을 다시 읽었다.
[나는 바람의 변화를 기록했으며 편지의 내용을 보증하지 않는다.]
그 문장이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메이가 쓴 최초 민원도 그랬다. 어떤 사람의 말을 다른 사람이 편리하게 요약하고, 자신이 승인한 적 없는 뜻을 덧붙였을 때 비극이 시작됐다.
“당신은 최소한 자기가 본 것만 쓰려고 했군요.”
수현이 혼잣말했다.
그때 책갈피 사이에서 허가된 복제 사진 한 장이 미끄러졌다. 둥근 도형 세 개 사이에 찍힌 작은 점. 가까이서 보니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일정한 간격의 홈이 있었다.
수현은 도형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아직은 아무 의미도 붙이지 않기로 했다.
다음 날 수신판의 봉인 기록을 확인하면 이 그림이 왜 남았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날 밤 메이는 작은 편지지를 꺼냈다. 수현이 준 종이가 아니라, 자신의 고향에서 오래전부터 쓰던 얇은 종이였다.
“라비엔에게 써도 될까요? 북방에 남아 있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물론이죠. 다만 답장이 없더라도 원망하지 말고요.”
“알아요. 그 사람도 자기 하루가 있겠죠.”
메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참 동안 첫 문장을 적지 못했다. 수현은 대신 써 주지 않았다. 마음의 자리를 대신 채우지 않는 것이 때로는 가장 어려운 도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침내 메이는 ‘오늘은 약재가 부족하지 않았어요’라고 적었다. 수현은 그 문장을 보고 웃었다. 자기 사정을 과장하지 않고 시작한 편지는 이상하리만큼 믿음직스러웠다.
“그 문장 좋네요.”
“왜요?”
“그 사람에게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 주잖아요. 무엇을 해야 한다고 명령하지도 않고.”
메이는 편지를 접었다. 수현도 침대 옆에서 수첩을 덮었다. 오래전에 누군가 남긴 기록을 읽은 하루 끝에, 또 하나의 작은 기록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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