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관에서 두 번째로 받은 통지서는 처음보다 훨씬 짧았다.
[관측자 수기 부록의 소유 부서 확인 중. 보존번호가 불명확하므로 인접 장부를 임의 개봉하지 말 것.]
이수현은 통지서의 마지막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우리가 도둑질할까 봐 적어 놓은 걸까요?” 메이가 물었다.
“아뇨. 아마 도둑질보다 더 흔한 일이 있어서 그럴 거예요. 누군가 좋은 뜻으로 잘못된 상자를 열었다가 기록을 섞는 일.”
“어떻게 그게 더 흔해요?”
“당장 저부터 열어 보고 싶거든요.”
수현은 웃으면서 봉투를 접었다. 왕국 관료들의 상투적인 말투에는 여전히 적응하지 못했지만, 어떤 절차가 실패를 막으려는 것인지 구분하는 눈은 생겼다.
문제는 열람을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귀환이 목적이라면 기다림도 일의 일부일 테지만, 손에 잡히는 성과 없이 하루를 보내면 서울에 남겨 둔 삶이 자꾸 생각났다. 냉장고 속 반찬은 진작 상했을 것이다. 방세는? 고객들의 연락은? 그녀의 사무실에 있던 일정표는 지금 어떤 날짜에 멈춰 있을까.
메이는 창가에서 수현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다른 일부터 할까요?”
“무슨 일요?”
“네리스 씨한테 시간을 보정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잖아요. 수기 부록이 없어도 두 장부가 얼마나 어긋났는지는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수현은 메이를 바라봤다. 부상자 치료 기록을 스스로 정리하던 그녀의 손길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질문을 받으면 사과부터 하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확인할 수 있는지 먼저 제안하고 있었다.
“좋아요. 대신 오늘은 점심부터 먹고 갑시다.”
“아직 아침인데요.”
“그렇죠. 그러니까 점심시간을 미리 예약하자는 말이에요.”
메이가 웃었다.
***
분관의 교정실에는 벽마다 물시계가 붙어 있었다. 서로 크기도 달랐고 눈금도 조금씩 달랐다. 한쪽은 돌 그릇에 물이 천천히 떨어졌고, 다른 한쪽은 반대로 수면이 낮아졌다. 수현에게는 시계 수리점보다 연금술사의 실험실처럼 보였다.
네리스는 나무판을 가져와 두 줄을 그었다.
“기상실은 매일 정오에 표준 물시계로 시간을 맞춥니다. 관측소는 진동판이 백 번 울릴 때마다 하나의 기록 단위가 쌓이고요. 두 시계를 연결하는 보정값은 매일 한 번 담당자가 적습니다.”
“그 담당자가 없는 날은요?”
“가장 최근 보정값을 임시로 쓰는 게 규정이었죠. 다만 오래 쓰면 오차가 커집니다.”
세드나가 손을 들었다.
“이관 목록에는 그날 교정이 중단됐다고 했습니다. 이전 값으로 환산한 시간이 원장에 남았을 수도 있겠네요.”
“맞아요. 그런데 이전 값인지 그날 값인지는 표시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수현은 기상실의 정오와 통신실의 백 번 진동이 꼭 같은 순간을 가리킨다는 보장이 없음을 확인했다. 장부상 ‘밤 열한 시’라는 기록이 서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실제로는 몇 분, 심하면 몇 시간까지도 차이가 날 수 있었다.
“그럼 외부 수신이라고 분류된 흔적과 자동 경고문 발생 시간이 일치한다는 주장도 다시 봐야겠네요.”
“그렇습니다.”
메이는 판을 오래 살폈다.
“시간이 다르면 둘이 같은 사건인지 알 수 없는 거죠?”
“시간 하나로는요. 다른 증거가 있으면 확인할 수 있어요.”
“왜 예전에 그걸 확인하지 않았을까요?”
네리스가 문득 조용해졌다.
“일이 너무 바빠서였겠죠. 폭풍 경보가 내려오면 사람들은 정확한 시간을 남기는 것보다 경고를 빨리 보내는 데 몰두하니까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 현장에서 기록이 빠진 사람을 무조건 게으르다고 부를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 빠진 기록을 나중에 누군가가 무조건 확실한 증거처럼 쓰는 데 있었다.
“당시 교대 일지와 비상 경보 일지는 따로 남았나요?”
“일부가 있습니다. 하지만 폭풍 경보가 정말 있었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네리스는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바람을 적는 사람은 틀릴 수 있어요.”
수현은 그 문장을 적었다가 곧 줄을 그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았다. 바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끼리 측정하고 해석할 뿐이다. 그래도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
세 사람은 오전에 오래된 날씨 자료를 검토했다. 며칠 동안은 평범한 가을 날씨가 이어졌다. 그러다 관측소 폐쇄 직전의 날짜에 급격한 기압 하강 표시가 나타났다. 기록상 별다른 폭풍이 없었던 밤이었다.
“이상하네요.” 수현이 말했다.
“압력이 떨어졌는데 실제 바람 기록은 조용하군요.” 세드나가 대답했다.
“기계 오류일까요?”
“가능합니다. 통신 장치 동력이 기상 측정판에 간섭했을 수도 있어요.” 네리스는 단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날짜는 반대입니다.”
그녀가 다음 장을 넘겼다. 분관 관측은 정상이었지만 관측소 쪽에만 폭풍 경보가 적혀 있었다.
메이가 눈썹을 찌푸렸다.
“실제 폭풍이 관측소에만 왔을 수도 있잖아요?”
“맞아요. 두 곳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해서 기상이 꼭 같지는 않으니까요.”
“그럼 뭐가 이상한 거예요?”
“우리가 가진 기록은 ‘관측소에 폭풍 경보가 떴다’는 사실이지 ‘관측소에 폭풍이 왔다’는 사실이 아니에요.” 수현이 대답했다.
세드나는 수현의 메모를 확인했다.
[경보 신호 발생 확인. 실제 기상 악화는 별도 검증 필요.]
수현은 서울에서 산업재해를 조사할 때 읽었던 작업일지를 떠올렸다. 사고 보고서에 기계 과열 경보가 있었다고 해서 반드시 과열이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경보가 없었다고 안전했다는 뜻도 아니었다. 기계가 무엇을 감지했는지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나누어야 했다.
“다른 관측소의 날씨도 남아 있을까요?”
“북쪽 강변에 작은 수문 관측소가 있었습니다. 비상 경보를 받을 때마다 수문 담당이 표식을 찍었어요.”
메이가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었다.
“거기는 우리가 동부에서 지나온 강가잖아요.”
“네. 물시계를 고치는 마을과 가깝겠네요.”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당장 가지는 않아요. 자료의 정확한 날짜부터 맞춰야 헛걸음을 덜 하죠.”
그 순간 분관 복도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
젊은 직원이 양동이를 든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한쪽 손목이 붉게 부어올랐다. 그녀는 쏟아진 물보다 물이 닿은 서류함을 먼저 걱정했다.
“죄송합니다! 야간 교대 분류표를 제가…”
“일단 손부터 보세요.” 메이가 즉시 몸을 낮췄다.
“괜찮아요. 바쁜데 이런 일로 자꾸…”
“안 괜찮아 보이거든요.”
메이는 부어오른 부위를 살핀 뒤 움직이지 않도록 천으로 받쳤다. 마력을 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응급 처치였다. 잠시 후 네리스가 달려왔다.
“마렌, 또 혼자 물통을 옮겼니?”
직원 마렌은 수현보다 어려 보였다.
“낮 교대가 늦어서요. 일지 보존실 습도를 맞춰야 했어요.”
“둘이 들라고 했잖아.”
“그럼 저녁 경보 전송이 밀려요.”
네리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수현은 시계를 확인했다. 아침에 이야기했던 바로 그 문제가 지금 복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이 맡고, 그 결과 다쳤는데도 먼저 사과부터 하는 상황이었다.
“혼자 들도록 지시받은 건가요?” 수현이 물었다.
“아뇨. 제가 빨리 끝내려고 그랬어요.”
“왜 빨리 끝내야 했어요?”
“정해진 시간 안에 장비를 점검하지 않으면 다음 조가 늦게 퇴근하거든요.”
네리스가 입술을 다물었다. 수현은 더 캐묻지 않았다. 이곳 직원이 자신의 상사를 앞에 두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렌 씨, 치료받을 때까지 오늘 작업은 중단하시는 게 좋겠어요. 물론 여기 규정은 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네리스 씨, 대체 인력이 있나요?”
“있어요. 제가 분류표를 정리하겠습니다.”
“그럼 물통은요?”
“잠깐 뒤 시설 담당과 같이 옮길 수 있어요.”
메이는 마렌을 인근 진료실로 데려갔다. 세드나는 수현 옆에 남았다.
“또 일거리 찾았군요.”
“전 지금 일을 그만둔 사람이라니까요.”
“그럼 그만둔 사람이 하기에 아주 익숙한 질문을 하고 있네요.”
수현은 웃지 못했다. 한 번 다친 사람이 나왔으니 질문을 멈출 수는 없었다. 다만 자격도 없는 외부인이 분관의 근무표를 마음대로 바꾸는 일 또한 해서는 안 됐다.
“근무 당사자들이 원하면 문제를 정리해 드릴 수는 있겠죠. 그런데 오늘은 마렌 씨에게 먼저 쉬고 싶은지 물어야겠어요.”
***
오후가 되자 네리스는 분관에서 쓰던 옛 교대표 두 장을 가져왔다. 이번에는 출입 허가가 아니라 현재 직원들이 스스로 개선할 수 있는 업무 확인표였다. 수현은 마렌의 동의 없이 그녀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겠다고 먼저 말했다.
“왜요?” 네리스가 물었다.
“다친 직원이 조직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 자신도 모르게 증거로만 소비되는 게 싫어서요. 이분의 몸도 시간도 이분 것이잖아요.”
네리스는 오래 침묵했다가 종이를 돌려놓았다.
“부서 내에서 전체 직원과 먼저 의논하겠습니다. 여기 기록은 제가 책임지고 고칠 일입니다.”
메이가 돌아왔을 때 마렌의 손목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 그녀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고집했지만 네리스가 진료 기록을 확인하고 그날은 귀가하도록 했다.
“고마워요.” 마렌이 말했다.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메이 씨에게 하세요. 저는 옆에서 질문만 했어요.”
“질문도 도움이 되네요.”
“가끔은요. 가끔은 사람을 더 귀찮게 만들기도 하고요.”
마렌은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들이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 동안 수현은 통신 관측소의 시간 기록을 다시 떠올렸다. 야간 인력 부족이 당시 장부의 교정 누락을 설명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오류의 출발점은 거대한 마법이 아니라 사람 한 명이 쉬지 못한 밤일 수도 있었다.
“그 얘기는 어디까지 추측이에요?” 메이가 물었다.
“전부 추측이에요. 그래서 옛 교대표를 허가받아 봐야겠죠.”
“수현 씨는 가끔 가장 실망스러운 대답을 되게 똑바로 해요.”
“그게 제 장점이자 영업상 단점이었죠.”
그때 네리스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수기 부록 소유 부서를 확인했습니다.”
수현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어디에 있나요?”
“분관이 아닙니다. 마지막 근무자의 개인 기증 자료로 분류돼 왕도 기록원에 보관됐습니다. 그런데…”
네리스가 서류 한 장을 펼쳤다.
“기증 시점이 관측소 폐쇄보다 늦습니다. 그리고 표제에 ‘두 번째 밤’이라고 적혀 있어요.”
메이가 눈을 깜박였다.
“밤이 두 번 왔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적혀 있다고 해서 실제 시간이 반복됐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수현이 먼저 답했다.
하지만 그녀도 궁금했다. 관측소가 문을 닫은 날 이후에 왜 누군가가 마지막 관측 일지를 다시 썼을까.
수현은 서류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관측자 수기 부록. 개인 기증. 제2야간 교정 기록 포함.]
‘두 번째 밤’은 시간을 되돌린 마법일 수도, 이튿날 같은 시각에 이루어진 재측정일 수도 있었다. 심지어 야간 근무를 두 번 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오늘 확인한 것은 그런 가설들 가운데 어떤 것도 아직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럼에도 중요한 차이가 생겼다. 어제까지 그들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지만, 이제는 정확한 보관처와 문서명을 알고 있었다. 사람의 삶에서 종종 가장 어려운 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질문을 찾는 일이었다.
“왕도행 마차는 언제 있죠?” 메이가 물었다.
“내일 새벽.” 네리스가 답했다.
수현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레 첫차로 갈게요. 오늘 다친 분의 진료 결과도 확인하고, 이곳 기록을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하니까요.”
메이가 마치 답을 알고 있었다는 듯 웃었다.
“오늘은 우리도 쉬는 날이군요.”
“이틀짜리 출장 중에 휴일 하루 넣는다고 세상이 무너지진 않겠죠.”
창밖으로 남동풍이 불었다. 분관의 오래된 간판이 또 흔들렸다.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에는 정말 급한 일이 있었고, 사람들이 급하다고 부르는 일도 있었다.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메이는 마렌에게 직접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며 진료실 앞에 잠깐 들렀다. 수현은 거리의 우물 옆에 서서 기다렸다. 마렌은 한 손으로 문을 밀고 나와 메이에게 짧게 인사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대화했다. 수현은 멀리서 말을 듣지 않았다. 질문을 대신해 주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뭐라고 했어요?” 메이가 돌아왔을 때 수현이 물었다.
“내일은 정말 쉬겠대요. 네리스 씨도 휴무 기록을 남겨 주겠다고 했고요.”
“잘됐네요.”
“그런데 이상해요. 사람들은 쉬고 싶어서가 아니라 쉬어도 된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쉬는 것 같아요.”
수현은 대답 대신 걷기 시작했다. 오래된 왕국의 기록을 뒤지는 중에도 누군가의 오늘은 바뀌고 있었다. 그 사실이 불확실한 귀환 신호보다 때로는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제8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