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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81화
PAYLUA ORIGINAL · 제81화

81화. 바람을 보관하는 사람들

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6,217자

오프라인 책장
이수현은 기상 분관의 문 앞에서 자신이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서류 한 장이 문제였다. 어느 날 오후 사무실에 들어온 민원 봉투를 열었더니, 눈을 깜박인 다음 순간 전쟁터의 야전 진료소였다. 그런데 지금은 종이 한 장을 보겠다고 마차를 타고 분관까지 찾아왔다. 귀환 방법을 찾는다는 말과 달리 매일 새로운 접수 창구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된 셈이었다. “열람 신청서 세 부입니다.” 수현이 구겨지지 않게 가져온 봉투를 열자 메이가 옆에서 물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제도 신청서를 냈잖아요?” “어제 것은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는 신청이었고요. 오늘 것은 그 자료를 실제로 볼 수 있는지 묻는 신청이에요.” “같은 질문 아닌가요?” “여기선 다르대요.” 메이가 참담한 표정으로 분관의 간판을 올려다봤다. ‘동부 감독청 기상 분관’이라고 적힌 나무 간판은 바람을 너무 오래 맞아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바람을 관측한다는 곳이 정작 간판은 제대로 붙여 놓지 못한 것이다. 분관을 지키는 여자는 갈색 장갑을 벗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얇은 안경줄을 목에 건 네리스라는 기록관이었다. “관측소에서 오셨다고요?” “예. 마지막 관측 일지 열람을 신청했습니다. 보관번호는 동기-18-하입니다.” 네리스는 종이를 받더니 맨 끝의 문구를 손톱으로 눌렀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기록원에서 받은 목록 카드에 적혀 있었습니다.” “목록에는 마지막이라고 적혀 있지 않습니다. ‘최종 보존 묶음’이라고 되어 있어요. 마지막으로 관측했다는 뜻이 아니라, 분관으로 이관된 마지막 묶음이라는 뜻입니다.” 수현은 펜을 꺼냈다. 그런 구분은 바로 적어 두어야 했다. “좋은 지적이에요. 그렇다면 그 안에 실제 마지막 관측 일지가 없을 수도 있겠네요.” “있을 수도 있고요. 목록만 보고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네리스는 수현을 가만히 살폈다. 말을 고쳐 적는 데 주저하지 않는 방문객은 드문 모양이었다. “열람 목적은 무엇입니까?” “비자발적 현장 확인 배정과 관련된 기록 조사입니다. 옛 통신 관측소의 자동 회신과 실제 입력을 구별하려고 해요. 이 일지가 시간과 장치 상태를 독립적으로 기록했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독립적이었다는 가정부터 검증해야겠군요.” “네. 같은 장치가 낸 숫자를 두 장의 종이에 옮겼다면 증거가 두 개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 말에 네리스가 조금 웃었다. “여기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 보통은 봉인이 두 개면 믿어도 되지 않느냐고 하죠.” 수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신기하게도 이 세계에서는 도장과 마력 인장이 수많은 사람을 침묵시켰다. 그러나 도장이 증명하는 것은 누가 어느 때 확인했는가이지, 종이에 적힌 일이 반드시 일어났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 서고로 향하는 통로에는 온도계 대신 길쭉한 유리관들이 매달려 있었다. 유리관 안의 밝은 가루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네리스는 바깥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져도 서고가 천천히 적응하도록 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가루가 멈춰 있으면 좋은 건가요?” 메이가 물었다. “변화가 느리다는 뜻입니다. 완벽히 멈추면 점검해야 하고요.” “어째 사람하고 비슷하네요.” 수현이 중얼거리자 네리스가 돌아봤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오래 멈춰 있으면 쉬는 것인지 고장 난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고요.” “그건 꽤 중요한 구분이군요.” 세 사람은 작은 대기실에서 신발 밑의 진흙을 털었다. 네리스는 자료 상태 점검표를 펼쳤다. 이관 당시의 상태, 현재 표지의 균열, 열람 후 다시 봉인할 방법이 차례대로 적혀 있었다. 수현은 종이 가장자리가 닳았다는 한 줄을 읽고 물었다. “이관 전에 낡은 건가요, 여기 와서 낡은 건가요?” “아직 판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원본에 메모하지 않고 별도 조사 기록에만 적겠습니다.” 세드나가 뒤늦게 대기실 문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왕립길드의 계약관리실에서 파견된 직원이었지만 지금은 검정 가방을 든 조용한 동행자처럼 보였다. “열람 범위는?” “시설 운영 시간표와 기상 측정값, 통신 장비의 작동 표식까지요. 개인 기록이 발견되면 그 부분은 가리고 볼 수 있는지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수현이 말했다. 세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범위라면 접수한 이의 신청과 연결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 권한만으로 이곳 문서를 열 수는 없어요.” “알아요. 그래서 네리스 씨에게 신청하는 중이고요.” 네리스가 그 대화를 듣고 작은 인장틀을 꺼냈다. “두 분이 본인들의 권한을 그렇게 자주 설명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수현은 잠깐 생각했다. “제가 처음 왔을 때는 사람들이 다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까지 하려고 했거든요. 그러다 다친 사람에게 비용이 돌아갔어요.” 메이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손목의 붉은 고리가 소매 아래서 희미하게 빛났다. 아직 풀리지 않은 치료비 계약의 흔적이었다. “제가 그 다친 사람을 치료했습니다.” 메이가 말했다. “그런데 장부에는 제가 빚을 졌다고 적혀 있었어요.” 네리스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열람 신청서의 옆칸에 작은 선을 그었다. “이 서고에서는 누군가의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보존 절차를 생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서류를 거절하지도 않고요.” 수현에게는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 자료는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서고의 문이 열리려면 소유 부서의 열람 허가와 기록관의 손상 방지 확인이 모두 필요했다. 오후 한 시가 지나서야 네리스가 안쪽에서 손수레를 밀고 나왔다. 수레 위에는 평범한 장부보다 훨씬 얇은 상자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세 개 다 마지막 일지인가요?” “하나는 기상일지, 하나는 동력 점검 기록, 하나는 이관 목록입니다. 서로 표제가 닮아 묶여 있었어요. 이전 조사자들은 대체로 가운데 것만 보려 했습니다.” “왜요?” “동력 기록에 마법적인 내용이 많으니까요.” 수현은 첫 번째 상자부터 살폈다. “평범한 날씨가 더 중요할 때가 있어요. 비가 왔는지 확인하려면 번개 마법 기록보다 우산 쓴 사람의 일기가 나을 수도 있거든요.” 세드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네리스는 손상 상태를 확인한 뒤 장부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오래된 문장은 놀랄 만큼 단순했다. 남동풍 약함. 안개 일찍 걷힘. 아침 첫 관측에 서리 없음. 수현은 낯선 계절 표현을 메이에게 물어 가며 날짜를 맞췄다. 이곳 날짜는 왕국력으로 적혀 있었고 그녀의 휴대전화는 오래전에 전원을 꺼 둔 상태였다. 서울의 날짜와 비교하는 건 불가능했다. “관측 간격이 고정돼 있었나요?” “기상일지는 하루 네 번. 폭풍 경보가 있으면 추가 관측입니다.” 네리스가 답했다. “통신 장비 기록은요?” “별도입니다. 그 기계는 시간과 상관없이 작동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두 표에 같은 시각이 적혀 있어도, 같은 시계로 재지는 않았겠네요.” 네리스는 손가락으로 작은 각주를 가리켰다. 기상 측정실의 물시계는 분관의 표준시를 따르고, 관측소 통신 장치는 고유한 진동 횟수로 시간을 기록한다는 설명이었다. 수현은 첫 번째 의문을 동그라미 쳤다. [동일 시각 표기라도 독립 기준 아님. 환산표 필요.] “그렇게 하나씩 적으면 오늘 안에 다 볼 수 있을까요?” 메이가 물었다. “아마 못 볼 거예요.” “그런데도 웃으세요?” “오늘 안에 결론을 내릴 의무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수현은 답했다. 한국에서 수많은 급여 명세서를 검토하면서 배웠던 일이 있었다. 서두르는 사람에게 유리한 숫자는 대체로 빨리 나온다. 느리게 확인하는 사람에게 남는 건 틀리지 않을 기회였다. *** 해가 기울 무렵 기상일지 끝자락에서 눈길을 끄는 표시가 나왔다. 그날의 남동풍은 전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밤 관측 아래 다른 필기체의 짧은 문장이 끼어 있었다. [대역 밖 소리 유사 반응. 기상 사건으로 기록하지 말 것.] 수현은 읽던 손을 멈췄다. “왜 날씨 장부에 이런 문장이 있죠?” 네리스가 몸을 가까이 숙였다. “원래 기상 장비가 통신 장비의 잡음을 함께 잡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잘못된 폭풍 경보가 나가지 않도록 분류 정정을 남겼을 겁니다.” “‘소리 유사 반응’이라는 건 실제 소리일까요?” “그렇게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세드나가 옆에서 말했다. 수현은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메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도 누군가 말을 걸었을 수도 있지 않아요?” “있을 수 있죠.” 수현이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가 찾고 싶은 답과 기록이 실제 말하는 내용은 다를 수 있어요.” 메이는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제가 수현 씨를 여기 오게 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걸 생각해요. 제 편지가 그런 일을 할 줄 몰랐는데, 결과는 정말 그렇게 됐으니까요.” “메이 씨가 쓴 건 약품하고 휴식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어요. 우리가 확인했잖아요. 누가 그걸 다르게 처리했는지는 여전히 조사 중이고요.” “그래도…” “죄책감이 증거가 되는 건 아니에요.” 메이는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스는 장부를 덮지 않고 다음 장을 펼쳤다. 아까의 글 아래에는 날짜와 담당자 서명이 없었다. 대신 누군가가 종이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숫자를 적었다. ‘동기-18-하 / 세 번째 묶음 참조.’ “이관 목록으로 돌아가야겠네요.” 수현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네리스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 번째 묶음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돌아갔습니다.” “안 열어 줬나요?” “열려고 하지 않았어요. 날씨를 보러 온 게 아니라고들 했거든요.” 수현은 수레 위 마지막 상자를 바라봤다. 사람들이 찾는 것은 대답이었고, 대답이 숨겨져 있는 곳은 종종 질문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목록이었다. *** 이관 목록은 가장 얇았지만 읽는 데 가장 오래 걸렸다. 세 개의 상자가 왜 한 묶음이 됐는지 설명하는 문서였기 때문이다. 수현은 잉크가 번진 부분을 억지로 해독하지 않고 네리스가 제공한 보존 사진과 대조했다. “여기 ‘날짜가 동일하지 않다’는 주석이 있네요.” “정확히는 ‘연동되지 않았다’입니다. 기상실은 물시계를 썼고 중계실은 진동 횟수를 썼는데, 그날 밤 교정 작업이 중단됐다고 적혀 있어요.” “중단 이유는요?” “교대 인력 부족.” 수현은 펜 끝을 멈췄다. 또 그 말이었다. 처음 야전 진료소에서 들었던 것도 비슷했다. 사람이 모자라서 휴식이 사라지고, 사람이 모자라서 장부의 서명이 미뤄지고, 사람이 모자라서 위험한 순간에 두 명이 해야 할 일을 한 명이 떠안는다. 그 결과를 수십 년이 지난 뒤 누군가가 증거로 오해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근무했는지 알 수 있어요?” “인사 기록은 따로 조회해야 합니다.” “그럼 오늘은 그 자료를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우선 시간 보정이 빠진 사실만 확인해 주세요.” 세드나가 기록 범위 표에 동그라미를 쳤다. 네리스는 자료 상태 확인란에 ‘미교정 시간 표기 포함’이라고 적었다. 그때 메이가 수현의 팔꿈치를 툭 건드렸다. “이건 뭔가요?” 이관 목록 하단에 작은 글자가 있었다. [마지막 기상 관측 기록은 관측자 수기 부록으로 분리함. 시설 책임자 회신과 혼동하지 말 것.] “수기 부록이요?” 네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 상자에는 없을 겁니다. 관측자 본인이 남긴 기록이라 별도 보존됐을 수도 있어요.” “오늘 열람 신청으로 볼 수 있나요?” “아뇨. 원본 소유자가 누구인지부터 찾아야 합니다.” 메이는 수현의 얼굴을 보고 먼저 웃었다. “신청서 또 하나네요.” “이쯤 되면 제 이력서에 추가해야겠어요. 장르: 판타지, 특기: 접수번호 보관.” 세드나가 잠시 웃음을 참다가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세 사람에게 허락된 하루의 열람 시간은 끝났다. 네리스는 장부의 접힌 모서리를 바로잡고 상자를 다시 봉인했다. 수현은 별도 보관한 필기본의 마지막 줄에 적었다. [독립 외부 통신 증거는 발견하지 못함. 기상일지는 통신 장치의 시간 기준을 독립 검증할 가능성 있음. 수기 부록 소재 확인 필요.] 분관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사납게 불었다. 기울어진 간판이 끼익 하고 울었다. 메이가 두꺼운 외투 깃을 여몄다. “오늘은 집에 가까워진 것 같아요?” 수현은 한동안 생각했다. “어제보다 더 멀어졌다는 증거는 없네요.” “그게 좋은 대답이에요?” “노무사 치고는 아주 낙관적인 대답이죠.” 두 사람은 길을 건넜다. 세드나가 뒷문을 잠그는 네리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수현은 가방 안에 넣은 새 열람 신청서의 빈칸을 바라봤다. ‘관측자 수기 부록 원본 소재.’ 적어야 할 질문은 또 생겼다. 그래도 이번에는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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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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