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장에 들어가기 전날, 수현은 그동안 모아 둔 서류를 서랍에 펼쳤다. 가장 오래된 것은 메이가 보낸 진정서 원문의 사본이었다. 가장 최근 것은 동부 관측소의 안전 경고문 복제 기록이었다. 가운데에는 수현의 서면 귀환 요청과 장비 실험 중단 동의서가 있었다.
“다 같은 사건이라서 이만큼 쌓인 건가요?” 메이가 물었다.
“비슷해 보이는 여러 사건이라서 더 많이 쌓인 거죠.”
수현은 각 서류 상단에 작은 색인 번호를 붙였다.
“여기서 심사관에게 직접 보여 줄 문서와 제가 이해를 위해 보는 문서를 나눠야 해요.”
“왜요? 전부 보여 주면 좋잖아요.”
“오늘 심사는 누가 사전에 동의했는지를 보는 자리예요. 기술 시험 결과까지 한꺼번에 들이밀면 오히려 논점이 흐려질 수 있죠.”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 진정서와 수현 씨의 동의 공란이 중요하겠네요.”
“맞아요. 그리고 배정 완료 표시가 어떤 근거로 남았는지도요.”
수현은 제일 아래에 종이 한 장을 더 놓았다. 자신이 이번 심사에서 원하는 처리를 적어 둔 문서였다. ‘사전 동의 미확인 사실 정정, 원문에 없는 문구 삭제, 귀환 지원 요청 유지, 실행 경위 조사.’ 누구를 처벌하라고 적지 않았다. 아직 누구의 잘못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린 소렐 이름은 안 적으세요?” 메이가 물었다.
“나중에 그 사람이 관련됐다는 근거가 있으면 적어야죠. 지금은 옛 문서의 담당자 이름일 뿐이니까.”
메이는 수현을 지켜보다 말했다.
“저라면 누군가 미웠을 것 같아요.”
“저도 화가 나요.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하는 거고요.”
***
심사 당일 수현은 서류 표지를 읽는 데 시간을 많이 들였다. 비슷한 제목의 문서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메이의 최초 진정서와 후대 작성된 외부 요약표는 표지 색깔까지 비슷했다. 세드나가 두 문서에 원본과 요약을 구분하는 작은 패를 붙여 주었다.
“재판 비슷한 자리에서 종이를 바꿔 들면 큰일 나겠네요.”
“정식 재판은 아닙니다. 기록 정정과 배정 절차 검토를 위한 행정 심사예요.” 세드나가 답했다.
“알아요. 다만 떨리는 건 비슷해요.”
수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서울에서 진정 사건을 준비할 때도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또박또박 말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알고 있었다. 이제는 자기 차례였다. 남의 이야기를 정확히 전달하는 일에는 익숙했지만, 자신의 억울함을 설명하는 데는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대기실에는 작은 창이 있었다. 창밖의 나무는 잎이 반쯤 떨어져 있었다. 수현은 문득 오늘이 서울에서는 몇 월 며칠일지 생각했다. 휴대폰에 떠 있는 날짜가 정확한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곳의 날짜를 적는 것과 그곳에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아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메이가 수현 옆에 앉았다.
“긴장돼요?”
“네.”
“저도요.”
“그런데도 오겠다고 한 건 메이 씨잖아요.”
“제 이름으로 적힌 문장이니까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처음에는 대리인이 필요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본인의 말을 본인이 하겠다는 순간에는 그 자리를 내어 줄 필요가 있었다.
***
정정심사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왕궁의 높은 천장도, 붉은 카펫도 없었다. 긴 탁자 하나와 작은 기록관 두 명이 전부였다.
이수현은 처음부터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곳이 꼭 거창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결정의 이유가 또렷하게 남아야 했다.
심사관은 이름을 밝힌 뒤 수현에게 물었다.
“본인 이수현, 당시 현장 확인인 배정을 사전에 승인했습니까?”
“아니요.”
“이 세계로 오는 방법을 알고 신청한 적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후에 계속 체류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은?”
수현은 잠시 생각했다.
“살기 위해 이곳의 일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그게 과거 소환에 동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심사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기록관에게 다시 읽어 주게 했다.
그 순간 수현은 자기 목소리가 누군가의 서류에 옮겨지는 소리를 들었다. 무서웠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자기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든든했다.
***
메이도 증인석에 앉았다. 본인 진정서 원문을 읽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저는 카이렌이 쉬게 해 달라고 썼습니다. 부상자 치료에 필요한 약재를 달라고 썼고요. 다른 사람을 강제로 데려오라고 쓰지 않았어요.”
“다른 세계에서 사람을 부를 수 있는 봉투라는 설명을 들은 적은 있습니까?”
“아니요. 멀리까지 진정이 닿을 수 있다는 문장만 봤어요.”
심사관은 메이에게 자신이 모르는 내용까지 대답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걸 확인해 달라고 왔어요. 제 이름으로 누군가의 의사를 대신한 문장이 적혔다면, 제가 바로잡고 싶어요.”
수현은 탁자 아래에서 손을 움켜쥐었다. 처음 메이가 불안한 눈으로 도움을 요청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메이는 본인의 말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스스로 이곳에 와 있었다.
***
다음 증인은 전산 정정실의 토베였다. 그는 구형 무응답 표시가 신형 양식에서 ‘절차 생략’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변환 규칙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기계가 승인한 것으로 바꾸었습니까?” 심사관이 물었다.
“그렇게 설명하면 부정확합니다. 구형 값이 빈칸일 때 신형 양식에서 별도 확인을 요구하지 않는 경로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승인 자체를 뜻하진 않습니다.”
“실제로 이수현 사건이 그 경로를 거쳤습니까?”
“배치표 일부가 일치합니다. 최종 실행 기록의 원본은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수현은 토베를 주시했다. 그가 일부러 부정확한 말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는 지점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책임자를 지목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이기는 일이 아니었다.
“질문해도 될까요?”
“허가합니다.” 심사관이 말했다.
“그 절차를 거치면 제 동의 확인란이 비어 있어도 배정 완료가 표시될 수 있습니까?”
“가능성은 있습니다. 원래 그런 상태로 완료돼서는 안 되지만 시스템은 이를 막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수현은 한 줄로 적었다.
[절차상의 결함 가능성, 관련 구형 값 대조 필요. 개인 실행 책임 미확정.]
***
심사관은 오래된 배정 대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사람의 서명이 아닌 기계식 각인이 있었다.
[현장 확인인 배정: 완료. 확인 응답: 미기재.]
“누가 이 표시를 남겼습니까?” 수현이 물었다.
“현 단계에서는 특정할 수 없습니다. 자동 장치 기록과 사람이 입력한 목록이 같은 표 안에 존재합니다.”
세드나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시 배정 완료가 당사자의 사전 동의를 입증하지 못한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습니까?”
심사관들은 잠시 상의했다.
“그 범위에서 인정합니다.”
수현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세계에 온 이후 계속 반복해서 말해 온 한 가지가 공식 기록에 남는 순간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우러 왔다는 사실과, 자기 의사 없이 여기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동시에 참일 수 있었다.
***
면담 휴식 시간, 세드나는 복도에서 수현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는 표정이네.”
“제 말을 믿어 주었다는 건 고맙죠. 그런데 아직 제가 왜 왔는지는 모른다는 거잖아요.”
“그래. 기록의 오류를 바로잡는 일과 실행 경위를 밝히는 일은 별도로 남았어.”
수현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오늘 한 가지는 확실해졌네요. 제가 여기서 도왔다는 이유로 과거에 동의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
“맞아.”
수현은 복도 끝의 창밖을 바라봤다. 마차가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터로 돌아가고 있었다. 불쑥 끌려온 사람도 자기 뜻을 설명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
최종 심사는 아니었다. 그날 내려진 것은 임시 판단이었다.
[이수현의 사전 동의 확인 기록 부재 인정. 메이 진정서 원문의 강제 소환 승인 문구 부존재 확인. 배정 완료 표시는 사전 동의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음. 실행 경위와 귀환 지원 수단은 별도 조사 계속.]
메이는 판정서 끝을 여러 번 읽었다.
“제가 잘못 쓴 게 아니라고 하네요.”
“원문에 없는 문장은 당신이 쓴 게 아니죠.”
“그런데 수현 씨는 아직 돌아갈 수 없어요.”
“네. 그건 별개예요.”
메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메이에게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둘 다 괜찮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오후 심사가 끝난 뒤 메이는 계단에 앉아 한참 숨을 골랐다. 몸이 지쳤다기보다 머리가 지친 듯했다. 수현은 물을 가져와 건넸다.
“수현 씨는 매일 이런 일을 했어요?”
“매일은 아니에요. 가끔 더 복잡한 일도 했죠.”
“어떻게 견뎠어요?”
“혼자 견디지 않았어요. 당사자와 자료를 같이 읽고, 모르는 건 전문가에게 물어보고, 더 이상 오늘 할 수 없으면 다음 날짜를 정하고요.”
메이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말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제가 처음 길드에 갔을 때는 억울한 걸 다 말하면 다 해결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억울하다는 말만으로는 계산된 금액이 바뀌지 않았죠.”
“네. 그렇다고 억울하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이렇게 해야 하는군요. 제 말을 적고, 상대가 낸 숫자도 보고, 뭐가 비었는지 확인하고.”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복도 끝에서 토베가 걸어왔다. 그는 두 사람을 보더니 잠시 멈췄다.
“오늘 제 설명이 충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현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도움이 됐습니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자료가 있다는 점도요.”
“이관 당시 새 양식을 서둘러 적용한 건 맞습니다. 실무자들이 전부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문제도 있어요.”
“그것이 제 배정을 누가 실행했는지까지 알려 주는 것은 아니죠.”
“그렇습니다.”
토베는 고개를 숙였다. 수현은 그에게 무언가 더 요구하고 싶었지만, 오늘의 심사가 끝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추가 확인이 필요하면 정식 요청을 제출하면 될 일이었다.
그가 떠난 뒤 메이가 물었다.
“수현 씨는 저분이 밉지 않아요?”
“제가 무엇을 믿든 그분이 실제로 한 일을 바꾸지는 못해요.”
“그러면 어떻게 할 거예요?”
“자료를 더 보죠. 그리고 잘못된 규칙이 있었다면 다음 사람에게 반복되지 않게 고치라고 요구할 거예요.”
메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도 완전히 평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말로 할 수 있는 일과 내일 서류로 해야 할 일을 구분할 수는 있었다.
***
기록관은 심사에서 사용한 문서 목록을 사건 당사자에게 확인받았다. 수현은 자신이 제출하지 않은 자료가 끼어 있지 않은지 살폈다. 메이도 서명하기 전에 원문과 사본이 따로 표시됐는지 확인했다.
“처음에는 도장이 많으면 무서웠어요.” 메이가 중얼거렸다.
“지금은요?”
“도장 앞에 무슨 글이 있는지 먼저 봐요.”
세드나는 그 말을 듣고 짧게 웃었다.
“그렇게 하는 게 원래 맞습니다.”
“그럼 왜 길드에서는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죠?”
세드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것도 앞으로 고쳐야 할 일이겠죠.”
수현은 메이의 서명이 마르는 동안 잠시 기다렸다. 사건의 기록이 닫히는 순간에도 당사자가 내용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다. 심사가 끝났다는 말보다 그 시간이 더 중요할 때도 있었다.
***
왕도 보관소에서 르네가 연락을 보내 왔다. 동부 관측소의 ‘야간 운영 묶음’ 가운데 기계 자동 수신판은 분리 보존됐지만, 작업자 회신지는 다른 이름으로 접수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 이름이 바뀐 건가요?” 수현이 물었다.
“이번에는 ‘안전 조치 확인서’로 바뀐 것 같습니다.”
“사람의 답장이 아니라 장치 점검에 관한 회신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래도 원장 이관 경로를 대조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수현은 다음 조사 신청에 서명했다.
정정심사장의 작은 탁자에서 시작된 변화는 극적이지 않았다. 사람을 집으로 보내 주는 문이 열린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죄를 자백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수현의 이름 앞에 붙어 있던 ‘승인한 신청인’이라는 잘못된 설명이 지워졌다.
종이를 들고 밖으로 나온 수현은 누가 듣지 않아도 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 문장은 이제 그녀 혼자 주장하는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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