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 준비를 시작하기 전날, 수현은 메이와 함께 마을 시장을 지나갔다. 좌판에는 가을 과일과 밀가루 자루가 쌓여 있었다. 소리 높여 값을 부르는 상인들 사이로 작은 아이가 뛰어다녔다.
“이런 데서도 봉투를 보내나요?” 수현이 물었다.
“네. 다만 마법 중계함은 비싸고, 보통은 전령이나 상단을 쓰죠.” 메이가 답했다.
수현은 게시판 앞에 멈췄다. 여러 사람이 붙인 편지가 있었다. 길에서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는 글, 멀리 떠난 아버지에게 보내는 안부, 빚을 갚아 달라는 소식. 받는 사람의 이름은 다양했고, 어떤 글은 발신자의 이름조차 없었다.
“저 사람들은 편지가 도착할 거라고 어떻게 믿죠?”
“전령이 잘 아는 길이라면 믿을 수 있죠. 모르면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고요.”
“그럼 아무에게나 편지를 줄 수는 없겠네요.”
“그렇죠.”
수현은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자신의 서울 주소가 적힌 편지를 미지의 통신 장치에 넣을 생각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편지를 보내는 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해도 되는 일이 아니었다. 받는 상대가 누구인지,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일지, 혹시 전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위험은 없는지 알아야 했다.
시장 끝에서 유엘이 수현을 찾아왔다. 그는 시험에 쓸 무작위 문양 상자를 만들었다고 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제가 표식을 직접 그렸으니까 눈으로 보면 어떤 모양인지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당신은 송신팀에 참여하면 안 되겠네요.”
“그렇게 하면 제가 만든 상자를 쓸 수 있나요?”
“가능하겠죠. 상자 안의 종이를 다른 사람이 무작위로 섞고, 표식을 읽는 사람이 미리 모르게 하면요.”
유엘은 잠시 생각했다.
“제가 만든 물건인데 제가 못 보는 게 이상하네요.”
“그래서 재미있는 거죠. 실험이라는 건 자기 기대가 결과에 섞이지 않게 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
루세는 시험을 시작하기 전 칠판에 가장 먼저 적었다.
[우리가 검증하는 것은 문자의 전송 경로다. 사람의 이동이 아니다.]
이수현은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실험을 서두르자고 할 때마다 지켜야 할 기준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부 반사와 실제 외부 입력을 구분할 거죠?”
루세가 탁자 위에 상자 셋을 올렸다. 첫 번째 상자에는 무작위 표식이 적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두 번째는 봉인된 접수함, 세 번째는 수신 기록판이었다.
“송신자가 모르는 표시를 맞히면 안 되겠지. 그래서 시험 시작 직전에 서로 다른 사람이 표식을 뽑고, 보낼 때까지 열지 않는 거야.”
“받는 쪽은요?”
“그쪽도 사전에 자기가 받을 수 있는 범위를 결정해. 모르면 모른다고 말해도 괜찮아.”
세드나는 실험 참여 동의서를 내밀었다. 서명란 옆에는 거절에 불이익이 없다는 문구가 있었다.
“동의서는 길드 법률에서 요구하는 걸 그대로 옮겼어요?” 수현이 물었다.
“일부는 장치 안전 규정이고, 일부는 우리가 새로 설명하기로 한 항목이야. 정식 왕국 표준인 척하면 안 되니까.”
“좋아요.”
***
시험 장소는 관측소가 아니라 왕도 서쪽의 작은 수신소였다. 전원이 없어도 독립적으로 종이를 보관할 수 있는 장소였다. 송신소에서는 루세와 유엘이 준비하고, 수신소에는 이베른과 아델라가 있었다. 두 팀은 시험 전에 서로의 상자 내용을 보지 않았다.
수현은 첫 번째 시험에 참여하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내용을 받았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검증이 필요할 때 이해당사자가 판단을 독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신자가 보낸 문장은 간단했다.
[오늘 창가에 파란 꽃이 있다.]
수신 기록판에는 비슷한 문장이 떠올랐다.
[오늘 창가에 파란 돌이 있다.]
“한 단어가 다르네요.” 이베른이 말했다.
“문자 복제 성공이라고 적으면 안 되겠죠.”
루세가 잉크를 찍었다.
“부분 수신. 원인 분석 필요.”
아델라가 수신소 창문을 보더니 물었다.
“여기 파란 꽃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이게 무슨 신호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서 시험입니다.”
***
첫 수신 결과를 확인한 뒤 루세는 운영 순서를 다시 큰 종이에 적었다. 준비, 사전 기록, 전송, 수신 판독, 보존, 사후 비교. 단계를 건너뛰면 기록에 이유를 남겨야 했다.
“실험이 생각보다 행정 업무가 많네요.” 메이가 말했다.
“기계가 알아서 일하면 좋을 텐데.” 유엘이 푸념했다.
수현은 두 사람을 보고 웃었다.
“기계가 기록을 마음대로 해석해서 문제가 생긴 걸 조사하고 있잖아요.”
루세가 손뼉을 쳤다.
“오늘의 구호로 삼아도 되겠군.”
그러나 실제 진행은 순탄치 않았다. 사전 시험용 도형을 비교하다가 송신팀이 네모의 방향을 잘못 읽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수신팀이 받은 그림과 비교해 보니 마치 메시지가 변형된 것처럼 보였다. 수현이 사전 원본의 방향 표시가 빠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치가 틀린 게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정확한 방향을 정하지 않았네요.”
루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첫 시험은 방향 비교 항목에서 제외해야겠어.”
“왜요? 성공이라고도 실패라고도 쓸 수 없으니까요.”
“맞아. 제대로 정하지 않은 기준으로 결과를 평가하면 안 되지.”
그들은 시험 프로토콜에 ‘표식 방향을 사전에 기록한다’는 항목을 추가했다.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화내는 사람은 없었다. 다음 시험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기록하면 됐다.
***
두 번째 시험에서 송신팀은 그림 한 장을 보냈다. 세 줄의 파도가 그려진 작은 배였다. 수신팀은 그것을 동그라미와 긴 선으로 받아 적었다.
“확실하게 다른데요.” 메이가 말했다.
“옛 장치의 문자가 다 같은 모양으로 변환될 수 있어요. 정확한 뜻은 규칙표를 봐야 하죠.”
그때 수현은 시험용 종이에 적힌 날짜를 보았다. 수신 기록판에는 날짜가 하루 앞서 있었다.
“이건 시간 차이가 나는 건가요?”
“시간이 다르다고 다른 세계라고 생각하면 안 돼.” 루세가 먼저 말했다. “장치 시계가 틀렸을 수도 있고, 보존 날짜가 밀린 걸 수도 있어.”
“알아요. 그러니까 시간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거죠.”
수현은 기록 담당자들이 두 시계를 맞춰 놓은 사진 대신 숫자 표를 남기도록 요청했다. 누가 언제 어느 시계를 기준으로 읽었는지 기록해야 했다. 표는 귀찮았지만 종이에 남는 시간은 한 번 잘못 쓰면 두 번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
***
시험 세 번째 차례에서 예상 밖의 문제가 생겼다. 수신소 담당자가 갑작스러운 열로 자리를 비우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이 계속 담당하면 실험은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미 정해진 휴식을 포기해야 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되지 않을까요?” 유엘이 말했다.
수현은 시계를 보았다. 이번 실험은 꼭 오늘 끝낼 필요가 없었다. 사전에 정한 중단 기준에도 참여자의 건강 문제가 포함돼 있었다.
“중단합시다.”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이 아깝잖아요.”
“그 기록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사람에게 무리시키지 않는다고 종이가 사라지는 건 아니죠.”
루세가 장치를 내렸다.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설비의 성능을 많이 알았어.”
세드나는 실험 중단 기록을 남겼다. 몸이 좋지 않은 담당자는 허락을 받고 숙소로 돌아갔다.
수현은 유엘이 아쉬운 얼굴로 장치를 바라보는 걸 보았다.
“뭔가 놓친 기분이 들죠?”
“네.”
“저도 그래요. 하지만 안전하게 중단할 수 있다는 게 검증되면 다음 시험을 해도 된다는 뜻이잖아요.”
***
수현은 수신팀의 작업 공간을 둘러봤다. 수신 기록판 옆에는 작은 탁자가 있고, 그 위에는 닳은 가죽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의 한쪽 다리가 흔들렸다.
“이 의자, 오래 쓰면 위험하겠는데요.”
아델라가 웃었다.
“어느 날 기술자가 뒤로 넘어지면 그때 새 걸 사 줄지도 몰라요.”
“넘어지기 전에 사 주면 안 되나요?”
“예산 때문에요.”
수현은 루세에게 물었다.
“작업자 안전 예산에 의자도 들어갑니까?”
“원칙적으로는 들어가지. 다만 누가 신청할지 문제겠군.”
“그럼 신청하는 사람을 정합시다. 오늘 시험 중단 사유와 함께 적으면 좋겠어요.”
아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의자가 당장 통신 오류를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시간 집중해야 하는 사람이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있다면 정확한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다.
“왜 이렇게 사소한 데 눈이 가세요?” 유엘이 물었다.
수현은 잠깐 생각했다.
“큰 사고는 갑자기 나타나는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그 전에 고칠 수 있었던 작은 일이 남아 있을 때가 많아서요.”
그는 젖은 돌바닥을 조심히 밟았다. 관측소에 오기 전이었다면 장비의 반짝이는 마력 원반부터 보았을 것이다. 지금은 출구와 의자, 휴식표, 물을 마실 곳을 먼저 확인했다. 그게 탐험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가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험이 끝난 뒤 유엘은 의자 교체 요청서를 작성했다. 수현은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관측소의 실제 근무자가 요청하고 관리자가 확인해야 남는 서류였다. 대신 신청서에 필요한 사실을 어떻게 쓰면 좋은지 설명해 주었다.
“이제 저 없이도 하실 수 있겠죠?”
“네. 앞으로 흔들리는 의자를 보면 서류가 먼저 떠오를 것 같네요.”
수현은 크게 웃었다.
***
돌아오는 마차에서 메이가 수현에게 물었다.
“서울로 보낼 편지는 언제 시험해요?”
수현은 무릎 위에 놓인 작은 봉투를 보았다. 안에는 아직 보내지 않은 짧은 편지가 있었다.
“지금은 안 보내요.”
“기회가 있으면 먼저 해야 하지 않아요?”
“그 편지를 누가 받을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요. 제 주소도 어쩌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갈 수 있고요.”
“그럼 영원히 못 보내는 거예요?”
“그건 아니죠. 검증된 경로와 상대가 확인되면 다시 생각할 거예요.”
메이는 한숨을 쉬었다.
“저라면 답답해서 못 견딜 것 같아요.”
“저도 답답해서 못 견뎌요.”
수현은 웃다가 금세 표정을 거뒀다.
“그래도 어떤 사람에게 제 사생활을 보내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보내는 건 더 무서워요.”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보내지 않을 권리가 보내는 권리만큼 중요했다.
***
시험 기록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세드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 실험의 최종 발표문을 수현 네가 쓰는 건 어때? 결과 해석을 제일 조심하잖아.”
“저는 기술 결과를 책임질 능력이 없어요. 각 시험의 정확도를 판단하는 건 루세 씨 몫이죠.”
“그럼 절차 부분은?”
“그건 제가 보태겠습니다. 누가 동의했고, 무엇을 모른다고 적었는지요.”
루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기술 실험 결과, 동의와 중단 절차, 외부 응답 검증의 한계. 그 어느 항목도 다른 항목을 대신하지 못했다. 정확한 문자가 도착하더라도 안전이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안전한 시험이었더라도 다른 세계에서 문자가 왔다는 뜻은 아니었다.
***
수현은 첫 시험에서 수신된 ‘파란 돌’이라는 단어를 공책 가장자리에 적었다. 오류가 단순히 한 글자만 바뀐 것인지, 원판의 기호가 다른 뜻으로 읽힌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엔 시험 문장을 더 짧게 만들까요?”
루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자 하나, 도형 하나씩 분리해서 보내는 게 낫겠어. 여러 의미를 한꺼번에 넣으면 어디서 잘못됐는지 알기 어렵지.”
수현은 바로 다음 시험안 옆에 적었다. ‘최소 표식부터 재검증, 시험자의 추측으로 원문 보정 금지.’ 받는 사람이 문맥에 맞춰 문장을 고쳐 읽는 것을 막으려는 규칙이었다. 누군가가 읽고 싶은 문장을 만들어 내는 순간 시험은 편지가 아니라 해석이 되어 버릴 테니까.
***
마지막으로 수현은 봉투에 이름을 쓰려다 멈췄다. 서울로 보낼 편지는 처음보다 짧아졌다.
[나는 살아 있어. 내 의지와 다른 방식으로 이곳에 왔어. 돌아가고 싶어.]
그 아래에는 아직 쓰지 못한 문장이 있었다. 누구에게 보내는지, 무엇을 물을지, 그 사람이 답해 줄 의사가 있는지. 수현은 빈칸을 남겨 두었다.
중계 장치의 수신판은 반쯤만 맞는 문장을 받아 적었다. 이것을 실패라고만 할 수도 없었다. 틀린 부분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수현의 일지에는 이렇게 적혔다.
[시험 범위 내 짧은 문장 부분 전송 확인. 타 지역 독립 수신 기초 검증. 외부 세계와의 통신 확인 불가. 인체 이동 시험 불가.]
오래전 기록의 ‘답장 원문 미검증’이라는 말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이제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사람이 말한 내용을 믿는 일과 기록판에 적힌 문장을 읽는 일 사이에는 생각보다 긴 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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