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 정정실은 궁전의 화려한 정문과 정반대였다. 지하 계단은 좁고, 조명은 어두웠으며, 창문은 아예 없었다. 대신 서류는 많았다. 수현은 한 칸만 비면 금세 누군가의 문서가 들어갈 것 같은 선반을 바라봤다.
“이런 곳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도 있나요?”
이베른이 답했다.
“저요.”
“왜요?”
“분류가 다 돼 있잖아요.”
수현은 잠시 생각했다. 그녀는 서류가 잘 정리된 곳을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 보고 있는 선반에는 찢어진 봉투를 임시로 세워 둔 칸과, 날짜 대신 ‘나중에 확인’이라 적힌 상자도 있었다.
“분류는 돼 있네요. 정리는 아직인 것 같고요.”
이베른은 기침을 했다.
정정실 책임자 토베는 그 말에 크게 웃었다. 쉰 살쯤 되어 보이는 그는 잉크가 묻은 손을 천으로 닦으며 인사했다.
“우리는 이곳을 기록의 묘지라고 부릅니다. 죽은 양식을 다시 살리지는 못하지만 왜 죽었는지는 알 수 있거든요.”
“좋은 비유 같다가도 조금 무섭네요.”
“그럼 오늘 살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 봅시다.”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토베는 그녀의 이의 신청서를 이미 읽고 있었다. 그렇다고 정정실이 수현을 위한 특별 조사기관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문서의 전환 규칙에 관해 확인 가능한 범위만 설명하겠다고 했다.
***
서류함에서 나온 장부는 두 종류였다. 구형 중계대의 수작업 처리표와 신형 통합 장부의 변환 결과표. 토베는 두 양식을 탁자에 펼쳐 놓고, 어느 칸이 어느 칸으로 옮겨졌는지 작은 돌을 올려 가며 표시했다.
“구형에는 ‘응답 확인 전’, ‘응답 거절’, ‘응답 수락’, ‘해당 없음’ 네 값이 있습니다.”
“신형은요?”
“수락 여부와 절차 예외 여부가 각각 한 칸씩입니다.”
“그럼 구형 네 값을 신형 두 칸으로 옮겨야 했군요.”
“맞습니다. 그런데 옛 코드는 ‘응답 확인 전’과 ‘해당 없음’을 똑같은 빈칸으로 보관했습니다.”
수현이 눈을 찡그렸다.
“그 빈칸이 신형에선 예외 처리로 옮겨졌고요?”
“일부 시기의 작업에서 그랬습니다.”
토베는 바로 덧붙였다.
“모든 민원에서 그런 건 아닙니다. 어느 배치 작업에 어떤 규칙이 적용됐는지 자료가 남은 사건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현은 그 제한을 기록했다. 기계의 오류라고 해서 사람이 책임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반대로 오류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배정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왜 두 칸으로 나눴을까요?”
“확인 절차를 생략할 수 있는 사건과 실제 수락한 사건을 구분하려고요. 그런데 이관 중에 과거의 무응답을 예외로 오해하는 문제가 생겼지요.”
세드나가 말했다.
“문제를 알게 된 뒤 정정 공지는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다만 각 부서에서 재검토해야 하는 명단을 모두 받았는지는 검증이 필요합니다.”
수현은 토베의 손가락이 멈춘 곳을 보았다. 구형 장부의 동그라미 하나가 신형 장부의 체크 표시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종이를 접으면 같은 위치에 겹칠 만한 작은 차이였다. 하지만 그 차이 때문에 누군가가 허락한 일과 허락하지 않은 일을 뒤섞어 이해할 수 있었다.
***
점심 무렵 토베는 민원 처리 예시를 보여 주었다. 허가받은 교육용 가상 기록이었다. 신청인의 이름은 ‘가’, 담당자는 ‘나’, 수신인은 ‘다’. 수현은 이름을 보고 웃었다.
“우리 동네 교재 같네요.”
“어느 동네 말입니까?”
“아주 먼 곳이요.”
토베는 돌판 위에 옛 표시를 새겼다.
[접수: 완료 / 배정 요청: 전송 / 응답: 대기]
그걸 신형 장부에 옮기자 이렇게 나타났다.
[접수: 완료 / 배정 요청: 승인 / 응답 확인: 생략]
“이렇게 된 기록이 있다면 수락 기록이 실제로 없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다른 경로로 응답했을 가능성까지 없애지는 못하지요.”
“그러니까 별도 응답 자료가 있는지 찾는 거고요.”
“바로 그겁니다.”
수현은 기계를 무조건 믿지도, 무조건 미워하지도 않기로 했다. 나쁜 기록은 의도를 가진 사람 때문에 생기기도 하지만, 급하게 설계된 절차가 사람의 말을 지워 버려서 생기기도 했다. 둘을 구분하는 일이 책임을 정확히 묻는 출발점이었다.
토베가 자료 하나를 꺼냈다. 메이가 제출한 민원과 같은 시기에 실행된 배치 작업의 기록이었다. 식별번호 일부만 확인할 수 있었다. 직접 개인정보를 볼 수 없는 대신 해당 배치의 작업 규칙 번호를 비교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여기에는 무응답 값을 자동 승인으로 넘긴 규칙이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능성이 높다니, 어느 정도죠?”
“동일한 변환표가 첨부돼 있습니다. 다만 사건별 재처리 로그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공식 정정 요청에는 두 부분을 분리하겠습니다. 사용된 변환표의 내용과 제 사건의 실제 처리 결과.”
토베가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정말 이쪽 사람이 아닙니까?”
“이쪽 사람은 아닌데, 일을 하다 보면 회사에서 비슷한 일을 많이 겪어요.”
***
왕도 바깥에서 돌아온 메이는 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다. 제7원정대가 보낸 보급품 견본과 새 수령 장부였다. 원정대에서는 보급품 이름을 아무나 서명할 수 없도록 변경한 뒤, 야전 보급 담당자 한 명이 물품을 반납해야 할 때 절차가 너무 복잡해졌다고 했다.
“제가 만든 규칙 때문에 일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메이는 난처해했다.
수현은 장부를 훑었다. 지급확인은 강화됐지만 반납 장부엔 서명란이 세 개나 있었다.
“한 사람의 실수를 막겠다고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규칙이 되면 안 되죠.”
“그럼 다시 전처럼 바꿔야 해요?”
“아니요. 용도가 다르면 절차를 달리할 수 있겠죠. 긴급 반납이나 야간 이동 때 어떻게 확인할지 대원들과 의논해 보세요.”
“제가요?”
“네. 메이 씨가 치료물품을 가장 잘 알고 있잖아요.”
메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수현을 바라봤다.
“예전엔 수현 씨가 무슨 말을 하면 바로 정답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요?”
“그냥 같이 답을 찾아야 하는 사람 같아요.”
수현은 웃었다.
“그게 정확해요.”
***
늦은 오후 이베른에게서 새로운 기록이 왔다. 오래된 배치표에는 한 가지 이상한 순서가 있었다.
[배정 후보에게 수락 요청 발송: 기록 없음]
[현장 확인인 배정 상태: 완료]
[부속 회신표: 원본 위치 미상]
세 행의 순서가 그대로라면 누가 수락했는지 확인하기 전에 배정 상태가 완료로 바뀐 셈이었다. 토베는 직접 실행 로그가 없다는 한계를 다시 설명했다. 수현은 그가 말을 아끼는 이유를 이해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입증하는 것과 장부에서 그렇게 보인다는 것은 달랐다.
“그래도 조사를 시작할 이유는 충분하죠?”
세드나가 물었다.
“예. 개인의 이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록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수현은 정정 신청서에 자신의 진술을 적었다. 자기가 서류를 열었을 때 종이가 빛났고, 곧 낯선 야전 진료소에 서 있었다는 사실. 이동에 동의한 기억도, 확인 절차를 받은 기억도 없다는 사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흐려졌는지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불명확’이라고 적었다.
아주 선명한 기억만 적으면 오히려 진실이 왜곡될 수 있었다. 사람은 자기 경험을 완벽한 장부처럼 보관하지 못하니까.
***
토베는 수현의 질문에 답하기 전 오래된 오류 보고서 한 장을 꺼냈다. 가장자리가 접힌 곳에 사람들의 필체가 차례로 남아 있었다. 어떤 이는 새 양식이 너무 어렵다고 썼고, 어떤 이는 구형 표시가 언제까지 유효한지 확인해 달라고 적었다.
“보고서가 접수된 뒤 무엇이 바뀌었나요?” 수현이 물었다.
“교육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육을 받은 담당자가 전부 남아 있지는 않았지요. 이관하는 동안 부서가 합쳐졌고, 현장 중계 담당은 계약직이 많았습니다.”
수현은 ‘계약직’이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업무가 끝나면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절차 지식도 함께 가져갔겠군요.”
“그래서 인수인계서를 만들었습니다.”
토베는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그런데 첫 장에는 장비 보수 날짜가 적혀 있고, 다음 장에는 당시 작성자가 교체된 날짜가 적혀 있었다. 교육자료는 그 뒤에야 나왔다.
“교육이 시작됐을 때 이미 이전 담당자는 없었네요.”
“그렇습니다.”
“그럼 사람을 바꾸고 나서 교육했군요. 교육 전에 누가 검증했는지는요?”
토베는 대답하지 못했다. 특정 담당자의 실수를 찾으러 온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는 가능성은 무거웠다.
“이런 기록이 있으면 누가 책임자인지 알려 달라고 하고 싶어져요.” 수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된 건지부터 알아야겠죠.”
토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책임자가 퇴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류가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지요.”
“그렇죠. 누가 벌을 받아야 하는지보다 먼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확인하는 게 우선일 때가 있어요. 책임을 묻는 절차도 따로 필요하지만요.”
세드나는 기록물 보존 범위를 확인했다. 모든 직원의 근무 이력을 열람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 변환 프로그램을 승인한 결재 직위와 실제 시험 여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먼저 충분했다. 토베도 동의했다.
“오늘 여기서 이름을 줄줄이 가져가시면 저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제 전문 분야가 문 닫게 하는 일은 아닙니다.” 수현이 웃었다. “가능하면 열어 두는 쪽이 좋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업무를 누가 넘겨받는지로 이어졌다. 토베는 정정실 직원 한 명이 일주일 동안 병가를 쓰기로 했다는 말을 했다. 평소라면 그 직원의 미처리 서류를 남은 사람에게 몰아주었겠지만, 이번에는 업무의 긴급성과 법정 보존기한에 따라 우선순위를 다시 세웠다. 수현이 제7원정대에서 처음 요구했던 방식과 닮아 있었다.
“누가 알려 줬습니까?” 수현이 물었다.
“서부 성역의 이베른 사서가 제7원정대 보고서를 보내 줬습니다. 익명 처리된 공개판이요.”
수현은 조금 놀랐다. 자신이 관여한 작은 시험 운영의 경험이 기록원 지하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그쪽 방식이 반드시 여기에도 맞는 건 아닐 텐데요.”
“맞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항목만 뽑았습니다.”
그 말에 수현은 마음이 놓였다. 규칙이 전달된다는 건 그대로 복제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각 현장에 맞게 질문을 다시 해 볼 용기를 준다는 뜻에 가까웠다.
토베는 작은 필사지를 보여 주었다. ‘누구에게 전달할지 분명하지 않은 업무는 완료로 표시하지 말 것’. 기록원 직원들이 스스로 새로 적은 문장이었다.
수현은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멋지네요.”
“아직 실천해 봐야 압니다.” 토베가 말했다.
수현은 웃었다. 서류만 만든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었다.
***
정정실 계단을 올라오는 동안 수현은 벽의 오래된 게시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과거 오류 신고를 독려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제목은 ‘틀린 기록을 발견한 사람에게 벌을 묻지 않습니다’였다.
“실제로 그랬나요?” 토베에게 물었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멋쩍게 웃었다. 그래서 지금은 신고 내용을 접수한 담당자와 신고인의 관계를 남기고, 업무 평가에서 신고를 불이익 사유로 삼지 않도록 한다고 했다. 아직 완벽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제도가 좋아질 때 가장 좋은 말은 아직이라는 말인가 봐요.” 수현이 말했다.
“왜 그렇습니까?”
“끝났다고 생각하면 고칠 수 없잖아요.”
토베는 잠시 생각하다가 게시판의 오래된 문구 아래 작은 종이를 덧붙였다.
[오류 신고 후 처리 결과를 신고인에게 설명합니다.]
수현은 웃었다. 신고하라는 문구만 있고 어떻게 처리됐는지 알려 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언젠가 신고를 포기한다. 그녀는 그날 자신의 신청서에도 회신 방식을 확인했다.
***
돌아가는 길, 수현은 골목에서 한 어린아이가 장화 끈을 묶느라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의 어머니는 재촉하지 않고 옆에서 기다렸다. 손이 느리면 대신 묶을 수도 있겠지만, 아이는 자기가 끝내고 싶어 했다.
수현은 문득 웃음이 났다.
“왜 그래?” 세드나가 물었다.
“남이 대신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당사자가 해야 할 때가 있잖아요.”
“갑자기 장화 이야기야?”
“저도 누가 저 대신 ‘네’라고 대답해 버린 것 같아서요.”
세드나는 표정을 굳혔다.
“그건 아직 조사 중이야.”
“알아요. 하지만 그 느낌은 그렇다는 거죠.”
두 사람은 잠시 조용히 걸었다. 어린아이는 결국 끈을 묶었고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숙소에 도착하자 르네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정실은 구형 원문과 신형 변환본을 별도 보존하고, 수현의 사건을 사전 동의 기록 검증 대상으로 지정했다. 결론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더는 빈칸을 ‘확인한 것으로 처리’할 수 없었다.
서류 끝에 작은 추가 요청이 있었다.
[옛 제3연락기록반의 소실된 회신표를 대신할 독립 대조 자료를 제출할 것. 우선 확인할 대상: 외부 중계 경계시험 접수함.]
수현은 종이를 접으며 중얼거렸다.
“대답하기 전에 찍힌 도장이 있으니, 이제 대답이 정말 왔는지 확인해야 하는군요.”
그녀는 창밖의 어둠을 보았다. 다음 서랍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도장이 만든 사실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남긴 대답이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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