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가 가져온 자료는 놀라울 만큼 평범했다. 누렇게 변한 근무표 한 장, 뚜껑이 부러진 문서함, 그리고 회신을 받지 못한 민원의 보관 기간이 적힌 안내문이었다.
“이런 걸 찾으려고 절 부른 겁니까?”
그가 수현에게 물었다. 그는 며칠 전보다 야윈 듯 보였다. 수현은 자신이 너무 무거운 기대를 얹은 건 아닌지 생각했다.
“아뇨. 누군가를 지목하려고 부른 건 아니에요. 제3연락기록반에서 대기 민원을 다시 열 때 어떤 절차를 사용했는지 여쭤보려고요.”
“절차라.”
메르는 의자에 앉았다.
“당시엔 연락이 끊기면 다시 시도하라는 말밖에 안 했습니다. 서류에는 세 번까지라고 적혀 있었죠. 하지만 장치가 오래되면 숫자를 세는 것도 사람이 해야 했어요.”
“그 세 번이 기록에 남았나요?”
“대부분은요. 바쁜 날엔 나중에 몰아서 적기도 했습니다.”
수현은 그 문장을 동그라미 쳤다. 밀린 업무를 저녁에 몰아 입력하는 건 서울의 작은 사업장에서도 흔했다. 문제는 사후 작성 사실을 표시하지 않는 순간이었다. 늦게 적은 기록이 마치 그때 바로 확인한 사실처럼 읽히기 쉬웠다.
메르는 후속 처리표를 들여다보았다.
“이건 제가 일하던 시절보다 뒤의 양식이군요. ‘처리 재개’는 담당자를 다시 배정한다는 뜻이지, 민원 내용에 수락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면 대기 중인 민원을 재개하는 일과 외부 확인인을 배정하는 일은 별개였네요.”
“네. 원래는요.”
“원래는?”
메르는 대답을 망설였다.
“옛날에는 분실이 많아서 묶음 처리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대기 건을 한 번에 옮기면 일부 확인값은 뒤늦게 채워 넣었어요. 개선하려다 생긴 일이었습니다.”
세드나가 물었다.
“묶음 작업 지시서도 남아 있습니까?”
“그건 보존 기간이 짧았어요. 다만 작업을 요청한 부서 기록은 있을 겁니다.”
“어디에요?”
“전산 이관반이라고 불렀지요. 지금은 기록원 정정실에 합쳐졌습니다.”
수현은 손바닥을 폈다. 질문이 늘었다. 하지만 질문이 늘어나는 건 단서를 찾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
오후엔 기술자 루세가 작은 봉투 두 개를 가져왔다. 하나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고, 다른 하나에는 붉은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둘 중 하나에 확인 문구를 넣고 나중에 받는 쪽이 어느 쪽인지 구별하는 시험을 하자는 겁니까?” 수현이 물었다.
“그렇게 단순하면 좋겠지.”
루세는 봉투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신호가 되돌아왔다는 것만으로는 밖에 갔다 온 증거가 안 돼. 장치가 자기 안에서 되비춘 것일 수 있거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장치가 미리 알 수 없는 질문을 보냈다가, 독립적인 수신인이 스스로 답해야 해.”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에서 온라인 본인 확인을 할 때 쓰던 일회용 코드가 떠올랐다. 다만 여기는 인터넷도 전화도 없었다. 답이 어디에서 왔는지 검증할 독립적인 증거가 더 중요했다.
“제가 고향에 있는 사람만 아는 질문을 적으면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네가 질문을 아는 순간 장치 주변 사람이 답을 추측하거나 기록을 볼 수도 있어. 네 정보가 유출되는 위험도 있지.”
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빨리 연락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오히려 가장 소중한 정보를 내줄 뻔했다.
세드나는 무인 시험 계획서에서 ‘자발적 확인’ 항목을 가리켰다.
“우선 외부에 보내는 시험 자체가 실제로 가능한지 확인해야 해. 독립된 기록 장치 둘이 같은 결과를 보여도 두 장치가 같은 내부 신호를 읽었을 가능성이 있지.”
“이 중계 설비는 뭐든지 애매하게 잘하는군요.”
“그게 오래된 설비의 주특기야.” 루세가 말했다.
***
수현은 그날 오후 처음으로 서울로 보낼 편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메이는 창가에 앉아 듣고 있었다.
“살아 있어요. 일하고 있던 곳과 전혀 다른 데 와 있어요. 정확한 위치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혼자 있는 건 아니에요. 찾고 있어요. 돌아갈 방법을.”
그녀는 다음 문장에 도달하자 목소리를 멈췄다. 서울에 남긴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이 문장을 읽을지 떠올랐다. 누가 받는지, 어느 시점에 받는지, 그동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왜 멈췄어요?” 메이가 물었다.
“혹시 이 편지가 어딘가에 도착한다면, 받는 사람에게 제가 정말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럼 이름을 적으면 되잖아요.”
“이름은 누군가 따라 쓸 수 있죠.”
메이는 한참 생각하다가 다른 말을 했다.
“우리 교대 근무표도 비슷했어요.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 당사자가 동의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물어보니 쉬는 날이라고만 들은 사람이 꽤 있었어요.”
“맞아요. 기록은 사람을 대신할 수 없어요. 사람이 한 말을 잘 보존할 수는 있지만.”
수현은 편지를 접었다. 아직 보낼 수 없는 편지였다. 오늘 얻은 건 안전한 송신 방법이 아니라, 무턱대고 보내서는 안 될 이유였다.
***
해가 기울 무렵 길드 본부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제7원정대에 적용한 임시 운영 지침을 인근 두 원정대에도 참고해 달라는 요청서를 들고 있었다. 수현을 보자 그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노무사님께서 작성하신 규칙을 채택하려 합니다.”
수현은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다.
“제가 왕국 규칙을 만든 적은 없는데요.”
“그럼 제7원정대의 보고서는?”
“그분들이 직접 만든 겁니다. 저는 초기에 질문을 던지고 기록하는 방법을 도왔을 뿐이에요. 지금은 자문 계약도 끝났고요.”
그의 얼굴에 난처함이 어렸다.
“그렇다면 허락은 누구에게 받아야 합니까?”
“그 원정대에서 해당 내용을 공개해도 되는지 먼저 확인해야죠. 개인의 치료 기록이나 근무 사유가 들어 있으면 가리고요.”
세드나가 말을 보탰다.
“참고자료는 길드 운영심사반을 통해 배포할 수 있어요. 운영 방식의 장단점도 같이 기록하세요.”
그가 물러나고 수현은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세드나가 물었다.
“한편으론 기뻐서요. 제가 돌아가더라도 저 사람들이 계속 서로 쉬라고 말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돌아가면 되겠네.”
“방법이 없어서 문제죠.”
세드나는 대답 대신 작은 찻잔을 밀어 주었다.
***
메르가 떠나기 전 수현은 그에게 한 가지 더 물었다. 공용 중계대에 접수된 민원 중 응답 없는 사건이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였다.
“꽤 많았습니다.”
“왜요?”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요. 담당 인력이 모자라거나, 주소가 틀리거나, 민원 내용이 애초에 다른 기관 일이거나.”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응답하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수현은 그 마지막 문장을 조용히 받아 적었다. 다른 기관 업무나 잘못된 주소는 처리할 문제였다. 하지만 응답하지 않기로 한 사람의 의사는 단순한 장애가 아니었다.
“그럼 거절 기록도 남겼나요?”
“원래는 그랬죠. 거절한 사람에게 이유를 강요하지 말라는 지침도 있었습니다.”
“멋진 지침인데요.”
“문제는 지키기 어려웠다는 겁니다.”
메르는 낡은 봉투를 뒤집어 보였다. 구형 장부의 빈칸에는 세 가지가 섞일 수 있었다. 아예 전달하지 못한 상태, 받은 사람이 응답하지 않은 상태, 받은 사람이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이유를 남기지 않은 상태. 담당자들이 편하게 보이도록 빈칸을 하나로 처리하면 어느 상태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수현은 갑자기 서울에서 자주 받던 메일을 떠올렸다. 답장이 없으면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문구. 읽었는지조차 확인하지 않고 재촉하는 연락들. 그 문장을 상대에게 보내는 쪽은 자기 일이 빨리 끝나서 편하겠지만, 받는 쪽의 삶은 사라져 버렸다.
“응답하지 않는 자유를 없애면 시스템은 훨씬 빨라지겠네요.”
“그래서 위험한 겁니다.” 메르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시절에도 불평을 제기한 직원이 있었다고 했다. 바쁜 계절에 무응답을 대기 명단에 남겨 두면 통계가 나빠 보인다는 이유로 관리자가 완료 처리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지시가 이번 사건과 연결된다는 자료는 없었다. 메르는 자신이 직접 본 사례인지 전해 들은 사례인지 구별해 진술서를 작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제가 당시에 들은 말 중에는 확인하기 어려운 것도 많아요.”
“괜찮아요. 직접 본 것과 들은 것을 나눠 주시면 됩니다.”
“그걸로 충분합니까?”
“조사를 시작하는 데는요.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데는 더 필요하겠죠.”
메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문을 나가기 전에 그는 수현을 돌아봤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래된 일까지 하십니까? 이곳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 것도 아니라고 들었는데.”
“제 귀환 문제도 있어서요. 제게 묻지 않은 대답을 누가 대신 기록했는지 알고 싶거든요.”
“돌아가고 싶으신 겁니까?”
“네.”
“그럼 여기에 있는 분들은?”
수현은 잠깐 웃었다.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로 만들고 싶지 않아요.”
메르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아들이 오래전에 왕도를 떠나 다른 지방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돌아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다.
“본인이 정한 길이 있으니까요.”
“맞아요.” 수현이 말했다. “그게 저한테도 필요해요.”
메르가 떠난 뒤 수현은 회신 체계의 구형 용어를 정리했다. ‘미전달’, ‘대기’, ‘거절’, ‘수락’, ‘오류’. 다섯 칸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실험 계획서를 작성할 때도 그 구분을 그대로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호가 오지 않았다고 거절한 것처럼 기록하거나, 장치가 울렸다고 수락한 것처럼 처리할 수는 없었다.
잠깐 쉬는 동안 메이가 물었다.
“그럼 고향으로 편지를 보내는데 아무 답이 없으면요?”
“받지 못했을 수도 있고, 답할 수 없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위험한 사적인 내용을 넣지 않으려고요.”
“누구를 기다리게 만드는 일도 어려운 거네요.”
“네. 그래서 기다리겠다는 선택도, 멈추겠다는 선택도 각자 할 수 있어야 해요.”
수현은 자신의 편지 초안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은 편지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 편지에는 어떤 대답을 강요하는 문장이 없었다.
***
수현이 회신 용어를 정리하는 동안 메이는 작은 카드에 문장을 적었다. 카드는 푸른 종이였고 가장자리에 꽃무늬가 있었다.
“뭐 쓰세요?”
“원정대에 보낼 설명문이요. 앞으로 민원을 넣는 대원들이 접수와 회신을 구분할 수 있게요.”
수현은 카드를 건네받아 읽었다.
[도움을 요청해도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우면 먼저 계약관리실에 문의할 수 있습니다. 접수했다는 말과 문제를 해결했다는 말은 다릅니다. 답변을 받으면 내용을 확인하고 정정할 수 있습니다.]
“좋은데요.”
“어려운 말은 없나요?”
“별로요. 다만 모든 사람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설명을 들을 방법도 있으면 좋겠어요.”
메이는 조금 생각하다가 종이 아래에 한 줄을 추가했다.
[글을 읽기 어려운 대원은 믿을 수 있는 동료와 함께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꼭 수현 씨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네요.”
“처음부터 그러는 게 목표였죠.”
수현은 카드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자신이 사라진 뒤에도 어떤 말은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다른 사람에게 살아 있는 약속이 되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메이는 카드를 봉투에 넣고 수신자를 직접 적었다. 이번 편지는 받을 사람이 분명했다.
***
그날 밤 메르의 추가 서면 증언이 도착했다. 묶음 처리 목록의 첫 장은 소실됐지만, 후속 작업 확인표 일부가 정정실로 넘어갔다는 내용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끝에 적힌 보존 원칙이었다.
[회신 여부 확인 전의 임시 표시를 수락 표시로 전환하지 말 것. 무응답 기록은 무응답으로 유지할 것.]
수현은 그 문장을 크게 읽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네요.”
“적어도 어떤 사람은 위험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르네가 말했다.
“그럼 왜 제가 여기 있죠?”
그 질문에는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수현은 화가 나면서도 메르의 문장을 범행의 증거로 삼지 않으려 애썼다. 잘못을 막으려고 경고문을 만든 사람까지 무턱대고 책임자로 몰아간다면 진실은 더 멀어진다.
그녀는 정정실에 자료 보존을 요청했다. 원본은 옮기지 않고, 출처와 사본 생성 시각을 명시하고, 관련자에게 소명 기회를 주도록 적었다. 그다음 요청서의 한 칸을 비워 두었다. 수신인 확인란이었다.
“왜 이름을 안 적으셨어요?” 메이가 물었다.
“아직 누가 답해야 하는지 모르니까요.”
수현은 펜 뚜껑을 닫았다.
누구에게 도착할지 모르는 편지가 있고, 누가 책임져야 할지 모르는 기록이 있었다. 둘 모두 함부로 이름을 적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비어 있는 칸을 영원히 비워 둘 수도 없었다.
다음 날 그들은 옛 전산 이관반의 마지막 작업 장부를 볼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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