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은 제가 쓴 게 아니에요.”
메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수현은 종이를 빼앗아 들지 않고 메이가 손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작은 유리판이 놓여 있었다. 봉인을 풀지 않은 외피 위로 비친 글자는 몇 줄 되지 않았다. 메이가 길드 게시판에 넣었다는 민원 신청의 요약이었다.
[제7원정대 신속 회복 및 현장 확인 인력 충원 요청. 외부 확인인 배정은 신청인의 승인을 갈음함.]
“아래 문장요.” 메이가 말했다. “앞의 내용은 제가 쓴 말과 비슷한데, 사람을 대신 배정하는 데 동의한다는 말은 안 썼어요.”
수현은 순간 열이 올랐다. 그러나 화를 내기 전에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이 종이가 메이 씨 손글씨 원본인가요?”
르네가 말했다.
“아닙니다. 보관함 외부 요약표입니다. 작성자는 서고의 접수 담당자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럼 아직 원문이 메이 씨 말을 어떻게 적었는지는 모르겠네요.”
메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그런 걸 쓸 리 없잖아요.”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누가 잘못 적었는지 확인하려면 표면 요약과 원문을 구분해야 해요.”
메이는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손목의 고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청구서의 일부 항목이 심사 보류됐어도 금속이 갑자기 친절해지지는 않았다.
“늘 똑같군요.” 메이가 작게 말했다. “제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적어 놓고, 물건을 받지 않았는데 받았다고 적어 놓고.”
수현은 그녀 옆으로 의자를 옮겼다.
“이번에는 그 차이를 끝까지 확인해 봐요.”
***
삼항 일곱 보존함의 관리자들이 준비한 대조 작업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낡은 외피 네 장을 줄 맞춰 놓고, 보존 마법이 번진 부분을 확대해 보는 일이 전부였다. 루세는 마법 장치를 가져오지 않았다. 조명석과 돋보기만 들고 있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나요?” 수현이 물었다.
“빛은 작동하지. 하지만 기계가 네 질문에 대신 대답하도록 만들지는 않을 거야.”
“오늘따라 좋은 말을 하시네요.”
“그런 말은 기록하지 마.”
수현은 대조표의 항목부터 살폈다. 외피에는 발신 표시, 접수 시각, 수신 대역, 그리고 회신표의 결합 흔적을 남기는 네모난 자국이 있었다. 마지막 자국은 있어야 하는 위치가 비어 있었다.
“부속 종이를 떼어 낸 건가요?”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어요.” 루세가 말했다. “처음부터 부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표면이 닳아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세드나는 보관 담당과 함께 측정치를 적었다. 마모 자국은 없었다. 종이를 묶던 실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외피 안쪽으로 아주 얇은 선이 비쳐 보였다.
“원본을 열기 전까지는 확인 못 하겠네요.” 수현이 말했다.
르네가 동의했다.
“그래서 발신자의 의사를 먼저 확인한 겁니다. 메이 님이 보존 목적의 최소 개봉을 허용하면, 다른 민원 내용은 가린 상태로 인수인계 담당 입회하에 진행할 수 있습니다.”
메이가 대답했다.
“제 진정서 부분은 열어 봐도 됩니다. 하지만 치료받은 환자 이름이나 상처 부위는 가려 주세요. 제 돈 문제를 증명하려고 다른 사람의 병력을 동네에 퍼뜨릴 수는 없어요.”
수현은 메이의 얼굴을 보았다. 긴 시간 동안 비용 때문에 움츠러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권리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 선택이 어쩐지 아주 큰 용기처럼 보였다.
***
허가가 나온 뒤에도 원문을 완전히 펼칠 수는 없었다. 습기에 붙은 모서리를 억지로 떼면 기록이 손상될 위험이 있었다. 보존사는 종이가 움직이는 곳까지만 천천히 들었다. 그 사이로 메이가 손으로 쓴 문장이 나타났다.
[우리 대원들은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카이렌은 잠을 자야 하고, 저는 약재를 다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 우리가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메이가 눈을 감았다. 수현은 그 옆에 앉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첫날에 메이는 낯선 여자를 마주하고도 잔뜩 죄송해했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 몰랐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처음 써 보낸 부탁은 누구를 강제로 데려오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다친 사람을 쉬게 하고 치료하게 해 달라는 절박한 호소였다.
“제 말 맞죠?” 메이가 물었다.
“네. 여기 있는 글은 그래요.”
“그럼 수현 씨가 오게 된 건 누가 정했을까요?”
“이제 그 질문을 더 정확하게 할 수 있어요.”
원문 아래에는 다른 필체의 짧은 행정 부호가 추가돼 있었다.
[현장 확인 미배정. 응답 확인 전. 긴급 대기.]
수현은 오래된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60화에서 본 변환 오류와 이어질 수 있는 문장이었다. ‘응답 확인 전’이 ‘확인 절차 생략’으로 옮겨졌다면, 누구도 수락하지 않은 민원이 수락된 것처럼 다음 단계로 흘러갔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줄은 더 뜻밖이었다.
[외부 대역 재질의. 배정 후보 미기록.]
“이게 언제 적힌 건가요?”
르네가 시각 표기를 대조했다.
“발신 후 약 한 시간 뒤입니다.”
“그럼 적어도 그 시점에는 저를 배정했다고 적혀 있지 않았네요.”
“예. 그 뒤 다른 기록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수현은 메이에게 다시 물었다.
“봉투를 넣은 다음 누가 설명해 줬나요? 담당자가 나타났다거나, 확인 문구를 읽으라고 했거나요.”
“아무도 없었어요. 상자가 비어서 제가 잘못한 줄 알았어요. 그날은 카이렌이 아파서 다시 가 볼 엄두도 못 냈고요.”
“상자 위치는요?”
“본부 보급창고 옆 게시판이요. 그런데 다음 날엔 게시판이 치워졌어요.”
수현은 기록했다. 사라진 게시판이 누군가의 수상한 행동인지, 단순한 장비 교체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확인해야 할 대상이 생겼다. 접수함의 관리 장부였다.
***
해 질 무렵 제7원정대에서 보낸 답장이 도착했다. 카이렌의 글씨는 지난번보다 굵고 자신감이 있었다. 30일 시범 운영이 조건부로 늘어난 뒤, 일반 출동과 긴급 출동을 구분하는 표가 실제로 사용되고 있었다. 다만 인력이 모자란 날에는 예정했던 휴식이 다시 줄었다고 적혀 있었다.
[교대표를 작성했는데도 빈자리를 이유로 휴식자를 깨웠습니다. 제가 우선 대신 나가려고 했지만, 젠이 제게도 규칙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수현은 웃었다. 한때 카이렌을 쉬게 하려면 잠자리 앞에서 전령병과 싸워야 했다. 이제 동료가 카이렌에게 규칙을 지키라고 말한다.
[우리는 대신 일한 사람에게 보상 시간을 주고, 응급성 확인을 누가 했는지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어렵지만 지켜 보겠습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세드나가 말했다.
“네. 다만 이게 완성된 제도라고 착각하면 안 되겠죠.”
수현은 답장에 같은 말을 적었다. 잘한 일은 잘했다고, 다만 대원 수가 모자라면 휴식의 약속이 다시 무너질 수 있다고. 자신이 더 이상 원정대 자문 계약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히 했다. 요청받은 범위에서 개인적인 조언은 할 수 있어도 예전처럼 명령과 장부를 대신 확인하지는 않겠다고.
마지막에는 짧은 문장을 덧붙였다.
[당신들이 만든 약속이니까, 당신들이 직접 지키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
원문 대조가 끝난 뒤 메이는 기록 담당자의 초상화를 한참 바라봤다. 삼항 일곱 보존함 근처 벽에 걸린 낡은 그림이었다. 그림 속 사람은 엄숙한 얼굴로 봉투를 들고 있었다. 아래에는 ‘정확한 전달은 가장 작은 정의’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저런 말을 써 놓고 제 문장은 왜 다르게 적었을까요?”
수현은 그림을 보았다.
“그림 속 사람이 그 일을 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요약표를 쓴 사람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도 아직 몰라요.”
“그러면 화내면 안 되는 건가요?”
“화가 나는 건 괜찮아요. 화를 내는 이유를 정확히 알면 더 좋고요.”
메이는 멈춰 섰다. 잠시 눈가가 붉어졌다. 처음에는 잘못된 서명을 보고도 주눅이 들었고, 고리가 붉게 빛날 때마다 자기가 무언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억이 쌓여 있었다.
“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알아요.”
“카이렌이 잠들 때까지 옆에 있었고, 제 마석도 썼고, 없는 붕대는 찢어 만들었어요. 그런데 장부에는 물품을 받아 갔다고 써 있고 제게 돈을 내라고 하더라고요.”
“그랬죠.”
“저는 누구를 데려오라고 명령할 힘도 없었는데, 수현 씨한테도 미안해야 하나 싶었어요.”
수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 메이가 바라는 건 편한 위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자신이 했던 일을 정확히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미안함은 메이 씨가 어떤 부탁을 했는지 확인한 다음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요. 지금 찾은 원문에는 도움을 요청한 말밖에 없었어요. 그건 잘못이 아니에요.”
메이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두 사람은 기록 정정 신청서를 함께 썼다. ‘요약표에 부당한 문구가 있다’라고만 쓰지 않았다. 원문에서 확인되는 문장과 확인되지 않는 문장을 나눠 적었다. 어느 담당자가 작성했는지 모른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세드나는 그들이 작성한 문안을 읽고 접수 기관에 한 가지를 더 요청하도록 했다.
“이 요약표를 다른 부서에서 사용했는지 이관 기록도 요청하자. 누군가 이미 이걸 메이의 동의 증거처럼 사용했을 수 있으니까.”
“사용했다면 어떻게 해요?”
“사용처에 정정 사실을 알려야겠지. 그렇다고 사용한 사람 모두가 잘못을 알았다는 뜻은 아니야.”
메이는 깊이 숨을 쉬었다.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오래 걸리겠네요.”
“그럴 수 있어.” 세드나가 대답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어디에 보내는지 남기는 거야.”
수현은 종이의 맨 아래에 ‘결과 회신은 신청인 메이에게 직접 통지’라고 적었다. 메이가 웃었다.
“수현 씨한테 먼저 보내면 안 돼요?”
“메이 씨가 따로 허락하면 참고로 받을 수는 있죠. 하지만 우선은 메이 씨 일이니까요.”
“이상하네요. 처음엔 제가 다 책임지는 게 싫었는데 지금은 제 이름으로 답장을 받고 싶어요.”
“책임을 다 떠안는 거랑 자기 일에 대해 결정하는 건 다르니까요.”
그들은 보관소를 나왔을 때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세드나는 허둥지둥 빵 가게 문을 두드렸다. 가게 주인은 영업을 끝냈다며 고개를 저었다. 수현은 배고픈 얼굴로 말했다.
“기록은 정확하게 남겼는데 점심은 누락됐네요.”
“그건 누구 책임인데?” 세드나가 물었다.
“공동 책임으로 합시다. 대신 다음엔 일정표에 식사부터 넣어요.”
메이가 웃었다. 어쩌면 그날의 가장 확실한 변화는, 셋 모두 더 이상 굶으면서 일을 잘했다고 자랑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
늦은 밤 수현은 보존사에게서 외피 조사를 마쳤다는 통지를 받았다. 메이의 원문에는 외부 확인인을 강제로 불러 달라는 문장이 없었다. 대신 ‘응답 확인 전’이라는 대기 상태가 분명히 남아 있었다. 외부 요약표의 ‘신청인 승인으로 갈음’은 원문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후대 요약 담당이 덧붙인 해석 문구였다.
“정정 신청을 해야겠네요.” 수현이 말했다.
세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약표가 원문인 것처럼 쓰이지 않도록. 다른 민원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됐는지 표본 검사가 필요할 거야.”
“그건 담당 기관이 조사해야 할 일이고요.”
“그렇지.”
수현은 창가에 기대었다. 왕도의 밤은 조용했고, 먼 거리에서 마차 바퀴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만 들렸다. 자신은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메이는 자신을 끌어오는 데 동의한 적이 없었다. 둘의 마음이 처음으로 같은 문서 안에 분명하게 적힐 수 있게 됐다.
그때 르네가 봉투 하나를 더 건넸다. 메이의 민원과 같은 날 작성된 ‘후속 처리표’였다. 앞 장과 뒤 장의 종이 색이 달랐고, 한가운데 누가 끼워 넣은 듯한 가느다란 회색 종이가 있었다.
“이건 아직 원본 확인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르네가 말했다.
수현은 겉면의 항목만 읽었다.
[대기 민원의 처리 재개. 확인인 후보 조사 경로: 제3연락기록반.]
메르가 일했던 바로 그 부서였다.
“메르 씨가 당시 담당자였다는 뜻인가요?” 수현이 물었다.
“아니요. 그 부서의 경로를 거쳤다는 뜻입니다.”
수현은 펜으로 그 차이를 또렷하게 표시했다. 오래전 부서 이름 하나로 사람을 범인 취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후속 처리표 아래 빈칸에 눈길을 주었다.
[대기 재개 지시자: 추후 대조.]
메이의 절박한 부탁은 분명했다. 누군가 그 부탁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인 것 또한 이제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무엇이 누락되고 무엇이 덧붙었는지는 아직 종이 속에 있었다.
수현은 불을 끄기 전 수첩에 적었다.
[발신인의 말은 확인했다. 이제 그 말을 바꿔 전달한 손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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