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61화
PAYLUA ORIGINAL · 제61화

61화. 봉투의 안쪽에 남은 글씨

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6,167자

오프라인 책장
왕도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수현은 그날 아침 젖은 종이 냄새를 맡았다. 3번 보관소 열람실의 벽장 안에는 물에 한 번 불었다가 말린 봉투들이 놓여 있었다. 어느 것은 모서리가 파도처럼 굽었고, 어느 것은 끈적한 풀 자국 때문에 두 장이 한 장처럼 붙어 있었다. 수현은 그중 유리판 밑에 놓인 것을 내려다봤다. 메이가 예전에 길드 게시판에서 발견했다는,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도 진실을 보낼 수 있다’는 봉투의 구형이었다. “이게 처음 사용된 민원 봉투라고요?” 르네가 고개를 저었다. “같은 계열의 가장 오래된 잔존 표본입니다. 사용된 첫 봉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행이네요. 이렇게 오래된 물건을 원조라고 하면 박물관 기증부터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수현은 농담을 던지고는 다시 유리를 보았다. 어깨에 들어간 힘은 그대로였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정식으로 말한 지 며칠이 지나고 있었다. 돌아갈 권리를 기록에 남긴 일은 진전이었다. 하지만 기록이 밥을 차려 주거나 서울행 기차표를 끊어 주는 건 아니었다. 르네는 봉투를 열 수 없다고 설명했다. 보존 담당 두 명의 입회, 훼손 전후의 사진 기록, 원래 밀봉을 유지한 채 볼 수 있는 부분의 목록 작성이 먼저였다. “안에 제가 보내질 때 사용된 기록이 있을 수도 있는데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다만 ‘있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민원 원본을 훼손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 말이 뜻밖에 마음에 들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에 와서 그녀가 가장 자주 했던 말과 비슷했다. 급하다는 이유로 남의 권리를 구겨도 되는 건 아니었다. 세드나는 제한 열람 신청서 위에 작은 종이를 한 장 올렸다. “오늘 확인할 범위를 적자. 봉투의 제작 연혁, 봉인 방식, 외부 수신 시 사용되는 접수 식별자. 메이의 민원 원본에 접근하려면 메이가 따로 동의해야 해.” “동의했습니다.” 문 앞에서 메이가 대답했다. 그녀는 서류가 아니라 따뜻한 빵 두 개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수현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동의서를 갖고 왔어요?” “네. 빵도 가져왔고요. 빵은 동의서가 아니니까 먹어도 돼요.” 세드나가 작게 웃었다. 수현은 빵을 받아 들었다. 이전에는 메이가 자기 문제로 다른 사람을 번거롭게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요즘은 자기 일에 필요한 문서를 직접 작성했다. 가끔은 자기 돈으로 산 빵을 자신이 먹고 싶은 만큼 먼저 먹기도 했다. “범위가 바뀌면 다시 물어볼 거예요.” 수현이 말했다. “네. 그래서 여기에 ‘치료비 진정서와 소환 경위 확인에 필요한 수신 기록만’이라고 적었어요. 제 병력 전부 보라는 뜻은 아니에요.” “완벽한데요.” “수현 씨한테 배운 겁니다.” 그 한마디는 칭찬이면서 경고처럼 들렸다. 누군가 자신에게 배웠다고 말하면 이제 그 말을 지켜야 한다. *** 르네가 유리판 밑에서 봉투의 모서리를 가리켰다. “이 표시는 일반 우편이 아니라 현장 확인을 요구하는 민원에 붙었습니다. 수신인을 지정하지 않아도 접수할 수 있었지요.” “그럼 누구한테 도착할지는 누가 정했습니까?” “당시에는 공용 중계대가 접수 구역과 응답 가능 상태를 대조했습니다.” 수현의 펜 끝이 멈췄다. “응답 가능 상태요?” “원래는 사람이 신청을 수락했는지 확인하는 항목입니다. 수락하지 않으면 배정하지 않도록 설계됐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설계됐다고요. 실제로 그렇게 실행됐는지는?” “그걸 확인해야 합니다.” 르네는 구형 접수 규칙을 세 장 펼쳤다. ‘대기’, ‘응답 요청’, ‘수락 확인’, ‘현장 배정’. 화살표가 한 방향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한가운데 있던 화살표 위에 다른 잉크로 ‘긴급 이관’이라는 글씨가 덧씌워져 있었다. 수현은 한참 그 자리를 보았다. 강제 소환을 정당화하는 조항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식 위에 작은 글자를 한 줄 더 적었다고 사람의 동의가 생기지는 않는다. “긴급 이관이 뭘 뜻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기록 담당자가 바뀐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응답 대상자를 대신 찾는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강제로 데려온다는 뜻이라고 읽어서는 안 되겠네요.” “현재 자료만으로는 그렇습니다.” 수현은 공책에 ‘절차와 실행은 다르다’라고 썼다. 그리고 그 밑에 ‘내가 실제로 어디에서 무슨 작업을 하다 사라졌는지’도 덧붙였다. 자신의 기억은 현장 증언이었다. 다만 그 기억만으로 장치의 작동 원리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메이가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봉투를 보내서 수현 씨가 여기 온 거죠?” 수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메이는 사실상 자신을 끌어온 사람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 부담을 가볍게 지워 주고 싶었지만 사실과 다르게 안심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메이 씨가 도움을 요청한 건 맞아요. 저를 동의 없이 데려오는 걸 부탁했다는 자료는 아직 없고요. 둘 사이에 어떤 절차가 있었는지가 문제예요.”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요?” “당시 어떤 마음으로, 어떤 글을 써서 보냈는지 정확히 알려 주세요. 나머지는 그 요청을 처리한 쪽이 설명해야죠.” 메이는 긴 숨을 쉬었다. “저는 카이렌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썼어요. 그리고 우리를 사람처럼 대우해 달라고요.” “그 문장이 제일 중요할 수 있어요.” *** 점심 뒤에는 이베른이 합류했다. 왕도 기록원에서 오래된 색인표를 가져온 그는 봉투를 지나치게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안경이 유리 표면에 부딪히는 바람에 르네에게 한소리 들었다. “보존실에서는 유리를 밀지 마세요.” “제가 밀린 겁니다. 유리가 저를 밀친 거고요.” “안경도 기록물은 아닙니다.” 수현은 웃음을 참았다. 처음엔 무섭기만 했던 기록원 사람들에게도 별것 아닌 다툼이 있었다. 다만 다투는 내용이 좀 특이했다. 이베른은 원격 수신 대장에 찍힌 마름모 인장이 봉투 제작소의 표식과 일치할 수 있다고 했다. 수현은 바로 ‘일치’라는 단어에 줄을 그었다. “왜요?” 이베른이 물었다. “같은 모양이라고 같은 제작소의 같은 시기 제품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으니까요. 도장 복제가 가능하죠?” “물론이죠.” “그러면 ‘모양 유사’부터요.” 세드나가 웃었다. “이제 기록원 사서에게까지 원칙을 가르치는 거야?” “아니요. 제가 제일 잘 아는 분야가 과장 광고 방지라서요.” 그때 이베른이 색인표의 뒷면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과장 없이 이건 말할 수 있습니다. 봉투의 외피 번호와 보관함 번호는 별개입니다. 그런데 후대 장부에서는 같은 칸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30년쯤 전 개정된 양식과 얼마 전의 양식을 나란히 놓았다. 구형에는 ‘발신 외피’, ‘접수 대장’, ‘회신 통로’가 각각 다른 칸이었다. 신형에는 ‘접수번호’ 한 칸이었다. 수현이 보기에 오래된 프로그램의 세 테이블을 무리해서 하나의 엑셀 시트로 합친 것 같았다. “그러면 같은 R-0라고 해서 같은 사건이 아니었던 것처럼, 같은 외피 번호라고 해서 같은 봉투도 아니겠네요.” “맞습니다.” 이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원본을 찾을 때 어느 창고를 먼저 열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지요.” 수현은 반가움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디요?” “서쪽 탑에서 옮긴 물건 중에는 ‘개봉하지 않은 현장 민원’만 보관한 상자가 있습니다. 상자 번호는 삼항, 일곱.” 그녀가 며칠 전에 받은 익명의 편지에 적혀 있던 바로 그 번호였다. *** 보존함을 찾아가는 길에는 지하 계단이 세 번 나왔다. 가장 아래층의 문은 너무 낮아서 데런이라면 머리를 부딪힐 것 같았다. 수현은 허리를 굽히며 걸었다. 오래된 기록이 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 무슨 거대한 비밀의 증거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이베른에게 물어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오래된 건물을 여러 번 증축하면서 계단 높이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늘 극적인 이유로 엉망인 줄 알았는데, 그냥 증축 때문인 경우도 있군요.” “기록의 절반은 그런 이유로 행방이 어긋납니다.” 이베른이 말했다. 문 앞에서 보존 담당자인 젊은 직원이 서류를 확인했다. 그는 메이의 이름을 찾더니 멈칫했다. “여기엔 본인이 직접 원본에 접근하겠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청은 외부 확인인의 조사 자료로 분류됐네요.” 메이가 수현을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뭐든 수현에게 먼저 물었을 것이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기다렸다. “둘 다 맞아요.” 메이가 말했다. “제 치료 문제로 진정서를 썼고, 그 편지가 수현 씨가 여기 오게 된 이유 중 하나일 수 있어서 같이 확인하고 싶어요. 제가 원하지 않는 내용은 보여 주지 않았으면 하고요.” 담당 직원은 서류를 두 장으로 나눴다. 발신자 본인의 접수 내역 열람과, 소환 경위 조사용 기록 대조. 목적에 따라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달랐다. 그는 짧게 사과했다. “한 장으로 처리하면 편하긴 하지만, 권한이 섞입니다.” “번거롭겠네요.” 수현이 말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안 그러면 나중에 더 번거롭습니다.” 수현은 웃었다. 드디어 자기 마음에 드는 행정 담당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보존함 문은 바로 열리지 않았다. 직원은 작은 등불로 방 안의 습도를 확인하고, 수기 대장에 시각을 적고, 열쇠를 가진 다른 담당자를 불렀다. 수현은 그 시간을 이용해 메이에게 물었다. “오늘은 원본을 보면서 마음이 힘들 수 있어요. 도중에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도 돼요.” 메이는 종이를 꽉 쥐었다가 놓았다. “제 글씨를 다시 보는 게 무섭기는 해요. 그날 너무 급했거든요. 뭘 부탁했는지 제대로 적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본인 말이 중요해요. 글씨가 흐리면 같이 확인하고, 기억이 안 나는 부분은 기억이 안 난다고 쓰면 돼요.” “수현 씨도 첫날 일을 다 기억해요?” “아뇨. 제가 들고 있던 서류가 어떻게 빛났는지, 몇 초가 지났는지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그래도 동의해 달라는 질문을 받은 기억이 없다는 건 분명해요.” 메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둘 다 설명받아야 할 사람이네요.” “그렇죠. 저는 길을 잃었고, 메이 씨는 자기 말을 누가 바꿔 놓았는지 모르는 거니까.” 문이 열리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다시 났다. 수현은 긴장한 메이의 손을 잡아 주려다가 멈췄다. 대신 자기 손을 내밀었다. 메이가 잠시 바라보다 그 손을 잡았다. 아주 작은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날 두 사람은 서로의 의사를 확인한 뒤에야 손을 맞잡았다. *** 삼항 일곱 보존함은 열쇠가 없어서 못 여는 상자가 아니었다. 열쇠가 너무 많아서 아무나 열 수 없는 상자였다. 관리부서, 개인정보 보호 담당, 봉투 발신자 또는 적법한 대리인. 그 셋 중 하나가 빠지면 원본 개봉 허가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발신자가 멀리 떠났거나 사망했다면 보존 목적이 무엇인지 따로 심사해야 했다. “복잡하네요.” 메이가 중얼거렸다. 수현은 그녀를 돌아봤다. “우리 둘이 첫날 만났을 때 이런 절차가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카이렌은 더 기다렸겠죠.” “맞아요. 그래서 긴급한 환자를 돕는 일과 서류를 읽는 일의 우선순위를 나눠야 해요. 지금은 긴급 구조가 끝난 다음이니까 기록을 함부로 열 이유가 없죠.” 메이는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수현 씨가 절차보다 카이렌을 먼저 봐 줘서 다행이에요.” “저도요.” 그날 밤 수현은 서류를 정리하면서 그 말을 다시 떠올렸다. 돌아갈 길을 찾는다고 한 사람을 구한 일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 일이 자신의 의사를 무시할 명분이 되어서도 안 된다. 선의를 이용하는 제도는 결국 선의를 소진시킨다. 세드나가 마지막 확인란을 내밀었다. “삼항 일곱 보존함의 외피 대조 신청이 접수됐어. 내일 오전엔 개봉 없이 표면만 비교할 수 있어.” “내일도 종이와 데이트네요.” “네가 원하던 상대 아니었어?” “저는 원래 종이랑 결혼할 생각 없었는데요.” 메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수현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담당자가 내민 접수증의 하단을 보는 순간 웃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현장 확인 배정 원문, 보관함 삼항 일곱에서 임시 이관. 이관 당시 외피 상태: 봉인 유지. 단, 부속 회신표 미확인.] “부속 회신표?” 르네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 “원래라면 현장 확인을 수락한 사람의 응답 흔적이 적혀 있어야 할 종이입니다.” 수현은 접수증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한 번도 작성한 적 없는 대답을 누가 대신 적었는지 알아내려면, 우선 대답이 적힐 자리에 종이부터 있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날 그녀는 공책의 맨 앞에 새 질문을 적었다. [나에게 묻기 전에, 누가 먼저 ‘확인 완료’라고 말했는가.]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61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61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