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현은 문서를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 오늘은 그녀가 가장 알고 싶었던 한 가지에 답을 들을 수 있는 날이었다. 누가 자신을 이세계로 데려온 것인지, 정확히는 자신을 현장 확인인으로 배정할 때 정말 동의 여부를 확인했는지.
3번 접수대의 제한 열람실에는 르네와 세드나, 수현이 앉아 있었다. 기술자 루세는 전산 변환 규칙을 설명하기 위해 따로 초청됐다. 메이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분쟁 통지를 받아 정산 항목의 오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둘은 오늘 서로의 결과를 저녁에 나누기로 약속했다.
르네가 원문과 변환본의 차이를 설명했다.
“원문에는 '응답 확인 전'이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현재 양식에는 그 항목이 '확인 절차 생략'으로 나타납니다.”
수현은 목 뒤가 서늘해졌다.
“그럼 제 동의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는데, 절차를 생략해도 되는 사람처럼 표시된 거네요.”
“문서상 그런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실제 배정 과정에서 별도의 동의를 확인했는지까지 이것만으로 단정할 순 없습니다.”
“동의 확인 기록은 계속 공란이고요?”
“예.”
수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움보다 피로가 앞섰다. 오래된 시스템의 빈칸 하나가 사람을 낯선 세계로 보내는 데 영향을 주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 소환이 이 오류 때문에 발생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원문 그대로 정정 요청할 수 있습니까?”
수현이 물었다.
“가능합니다. 다만 다른 기록에서 추가 확인이 나오면 함께 반영해야 합니다.”
“그럼 현재 확인된 사실부터요. ‘동의 확보 기록 없음’, ‘자동 변환 오류 가능성 확인’. 그 이상은 쓰지 않겠습니다.”
르네는 정정 초안을 작성했다. 수현은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문장을 읽고 한 번 더 수정했다. '신청인은 동의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신청인의 사전 동의를 입증하는 기록이 제출되지 않았다'로. 그녀가 사전 동의를 한 적이 없다는 기억은 분명했다. 그러나 행정 기록이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지는 따로 적어야 했다.
***
열람을 마친 뒤 루세는 기술 검증반의 계획서를 보여 주었다. 장치의 목적이 사람 이동인지 기록 송수신인지부터 구분하기 위해, 외부 계열 주소를 넣지 않는 내부 대조 시험을 한 번 더 수행할 예정이었다. 사람과 물체는 시험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게 끝나면 주소를 시험할 수 있나요?”
수현이 물었다.
“아니. 그다음엔 연결 목적지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해. 외부 계열이라는 말이 지리적 좌표를 뜻하는지도 아직 불분명하니까.”
수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단계가 참 많네요.”
“사람을 옮기는 일이라면 더 많아야지.”
루세의 말에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안전 절차를 간소화하자는 말은 늘 달콤했다. 빨리 끝내겠다는 마음이 누군가의 위험을 보이지 않게 만들 때가 있었다.
그녀는 계획서 중단 기준을 확인했다. 접속부 균열, 불명 신호, 대조 주소 불일치, 동의 철회. 마지막 항목은 기술적인 위험이 없어도 신청인의 의사만으로 실험 참여를 멈출 수 있도록 한 조항이었다.
“이건 좋네요.”
“네가 요구했잖아.”
루세가 말했다.
“요구했다고 늘 들어주는 건 아니니까요.”
둘은 잠깐 웃었다.
***
수현은 잠정 심사 통지서와 함께 온 작은 안내장을 읽었다. 신청인은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추가 자료를 제출할 수 있고, 잘못된 사실관계를 정정할 수 있으며, 자료의 이용 목적을 질문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당연한 문장들이었지만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어느 것도 설명받지 못했었다.
“처음부터 이런 안내문을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수현이 말했다.
르네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때는 외부 계열에서 실제로 사람이 넘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제 일이 특별한 사례겠네요.”
“예. 그렇다고 기존 절차를 생략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우리가 그걸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수현은 르네의 얼굴을 보았다. 담당자는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모든 책임을 개인적으로 떠안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확인할 수 있는 일을 설명하고, 고칠 수 있는 절차를 알려 주었다.
“지금 필요한 건 누가 잘못했다고 바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재발하지 않게 만드는 거겠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책임 조사도 별도로 해야 합니다.”
“그 점도 알고 있습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발 방지라는 말이 책임을 잊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됐다. 반대로 책임자를 찾겠다는 말이 당사자의 귀환을 끝없이 미루는 이유가 되어도 안 됐다.
그녀는 두 절차를 따로 접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나는 잘못된 소환 배정에 관한 조사, 다른 하나는 안전한 귀환 지원에 관한 기술 검증이었다. 같은 사건에서 시작됐어도 목적은 달랐다.
“수현 씨, 고향으로 가는 일이 정말 가능한지 모르는데요.”
르네가 낮게 말했다.
“저도 알아요. 그래서 가능한 척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수현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능성을 검토한다는 이유로 제 의사를 없는 것처럼 취급하지도 말아 주세요.”
르네는 명확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수현은 제7원정대에 짧은 편지를 썼다. '시험 운영의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빠짐없이 적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운영은 여러분이 결정해 주세요.'라고.
쓰고 보니 몇 문장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편지에는 자신이 이곳에서 배운 많은 일이 들어 있었다. 영웅도 쉬어야 한다는 것. 치료를 하는 사람도 거절할 수 있다는 것. 책임이 있다는 말이 타인의 선택을 지워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
수현은 편지 끝에 개인적인 한 줄을 더 적었다.
[돌아갈 방법을 계속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게 보여 준 용기를 저도 잊지 않겠습니다.]
편지의 발송인을 쓰고 봉투를 봉했다. 이것은 보낼 수 있는 편지였다. 수신인이 분명하고, 보내는 사람이 분명하고, 무슨 내용을 전달하는지도 분명했다.
고향으로 보내고 싶은 편지와는 아직 달랐다. 그래도 수현은 이 작은 차이를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
그날 오후 제7원정대에서 서른 날 시험 평가의 잠정 보고서가 왔다. 카이렌이 직접 작성한 문서였다. 수현은 길드 소속 자문으로서 읽는 게 아니라, 당사자인 카이렌이 사적인 참고 의견을 요청한 범위 안에서만 읽었다. 그가 보여 준 부분은 전체 자료가 아니라 공개 가능한 운영 개선 요약이었다.
[계획된 휴식과 실제 휴식의 차이를 기록하기 시작함.]
[보급품은 수령자 확인 후 정산함.]
[부상자 복귀 의사를 따로 확인함.]
[응급 출동과 일반 출동의 구분을 개선 중임.]
그 아래에는 미해결 문제도 적혀 있었다. 인력이 부족해 야간 휴식이 다시 줄어든 날, 공급이 늦어 응급 물품을 다른 부대에 빌렸던 날, 시험 기준을 둘러싸고 감독관과 갈등이 생겼던 날.
“성과가 좋다는 말만 안 썼네요.”
수현이 말했다.
카이렌은 전령편 회신에 이렇게 적었다.
[숨긴 문제는 다음 달에도 반복될 것 같아서요.]
수현은 웃었다. 카이렌은 여전히 무거운 갑옷을 입고 위험한 일을 하는 용사였지만, 자신을 희생해야만 좋은 용사라고 믿는 사람에서 조금 멀어졌다. 어쩌면 그녀의 역할은 거기까지면 충분한지도 몰랐다.
브레그의 의견도 첨부돼 있었다. 전체 제도 개정은 아니지만 제7원정대 시험 운영을 조건부로 연장하고, 물품 수령과 부상자 복귀 절차를 인근 부대에도 참고자료로 제공해 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확정된 왕국 법률도, 영원한 권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한 팀에서 시작된 말이 다른 팀의 책상 위에 올라갈 수 있게 됐다.
“좋아졌네요.”
메이가 돌아와 말했다.
“완벽하진 않지만요.”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 거죠.”
***
저녁 무렵 메이는 자기 통지서를 펼쳤다. 동부 정산실은 예비 적립금 부분을 개인 부담 산정에서 임시 제외하고, 다른 항목의 사용 여부를 추가 확인하기로 했다. 강제 징수 보류는 계속됐다. 하지만 심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고리가 곧 풀릴까요?”
수현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건 별도 결정이래요.”
“그럼 다음 단계는 누가 맡기로 했죠?”
“제가 받아 볼게요. 세드나 씨가 검토 절차를 안내해 주기로 했고요.”
메이는 서류를 접었다. 예전 같으면 자신이 책임지고 있다는 말보다 누가 해결해 주겠다는 말을 기다렸을 것이다. 지금은 자신이 결정해야 할 다음 행동을 알고 있었다.
“수현 씨가 돌아가면 제가 불안할 거예요.”
메이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돌아가지 말라고 할 순 없죠.”
“고마워요.”
“수현 씨가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누군가를 돕는다고 그 사람의 선택을 대신하면 안 된다고.”
둘은 마당에 나란히 앉았다. 저녁 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수현은 서울의 작은 사무실을 떠올렸다. 퇴근 시간에 창으로 비치던 빛, 오래된 회전의자, 책상 위의 머그잔. 평범한 물건들이 이곳에서는 멀리 있는 별처럼 느껴졌다.
***
잠자리에 들기 전 수현은 자신이 처음 작성했던 질문 목록을 꺼냈다. 맨 위에는 '카이렌 두 시간 휴식', 그 아래에는 '메이 치료비 확인', '누가 봉투를 보냈는가', '어떻게 돌아가는가'가 적혀 있었다. 첫 번째 항목은 오래전에 끝난 일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뒤에 더 많은 질문을 남겼다.
그녀는 카이렌의 편지를 한 번 더 읽었다. 원정대가 스스로 결정하고, 실수한 기록은 정정하며, 쉬는 사람을 억지로 깨우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수현이 떠나도 그들이 계속 실천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영원한 감시자가 필요하다면 그건 좋은 제도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첫 항목에 작은 별을 그렸다. 해결 완료 표시가 아니라, 어디서 시작했는지 잊지 않기 위한 표시였다.
그 뒤 마지막 줄에 날짜를 적었다.
[다음에 확인할 것: 기술 시험 결과가 아닌 귀환 절차의 책임자, 개인정보 보존 기간, 동의 철회 방식.]
수현은 미소 지었다. 고향으로 가는 문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젠 허락 없이 열린 문에 떠밀려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
그녀는 잠이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이수현. 다섯 글자는 아니지만, 서울에서도 이곳에서도 같은 글자로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이름이 어느 문서에 적혀 있느냐가 아니라, 그 문서가 자신의 선택을 정확히 남겼느냐였다.
***
밤이 깊어질 무렵 르네에게서 또 하나의 문서가 도착했다.
[귀환 의사 및 비자발적 소환 이의 신청에 관한 잠정 심사 통지. 신청인의 귀환 의사를 확인했으며, 원격 배정 절차의 동의 기록 누락과 전산 변환 오류 가능성을 별도 조사할 것. 기술적 귀환 수단은 현재 확인되지 않음.]
수현은 마지막 문장을 오래 읽었다. 기대했던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첫 문장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이 세계의 공식 기록이 이제 그녀를 '현장 확인이 끝날 때까지 대기해야 하는 사람'으로만 취급하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을 하나의 독립된 요구로 받아들였다.
더 아래에는 새로운 문장이 있었다.
[원격 원문 회신의 진위 확인을 위해 당사자가 작성한 최소 내용의 확인 문안을 별도 봉인할 수 있음. 단, 현재 외부 계열로의 전송 성공은 검증되지 않음.]
메이가 옆에서 읽었다.
“그럼 한국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는 건가요?”
“아직은 아니에요. 봉인할 수 있다는 뜻뿐이에요.”
수현은 서랍을 열었다. 며칠 전 써 두었지만 보내지 않았던 짧은 편지가 있었다. '살아 있습니다'라는 문장. 그리고 사무실 창문이 비 오는 날 흔들린다는 작은 비밀.
그녀는 편지를 다시 읽었다. 보내고 싶었다. 손끝으로라도 고향에 닿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검증 없이 누군가에게 종이를 넘기는 것은 하지 않기로 했다.
세드나가 말했다.
“오늘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돼.”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 더 생각할게요.”
그날 밤, 수현은 자신이 처음 이세계에 나타난 진료소를 떠올렸다. 무리하게 일하던 용사, 손목 고리 때문에 겁먹은 치유사, 당연한 듯 출정을 요구하던 감독관. 그들과 지낸 시간이 길지 않았는데도 처음 만난 날이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마지막 문장을 공책에 적었다.
[다른 사람의 동의가 필요했던 일이라면, 내 귀환에도 내 동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책상 위 편지를 바라보다 촛불을 껐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불었고, 낯선 왕도의 종이 조용히 울렸다. 내일도 돌아갈 문이 열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은 누군가가 그 문에 달린 경첩부터 살펴보기 시작할지 몰랐다.
그 정도의 희망은 아직 놓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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