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그만둘 수 없습니까?”
수현이 물었을 때 카이렌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천막 밖에는 작은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메이는 그 옆에서 약초를 말리고 있었고, 원정대 궁수인 젠은 부러진 화살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젠은 얼굴에 길게 난 흉터 때문에 무서워 보였지만, 수현이 처음 말을 붙였을 때는 예상보다 수줍게 인사했다.
“무슨 뜻입니까?”
카이렌이 한참 뒤에 물었다.
“말 그대로예요. 이 일을 더는 못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안 됩니다.”
“누가 안 된다고 했죠?”
“길드가요.”
“왜요?”
카이렌이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선택받은 용사니까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답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가 그 말을 얼마나 오래 들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용사가 되고 싶었어요?”
카이렌의 눈이 커졌다.
“그걸 왜…….”
“궁금해서요.”
그는 잠깐 모닥불을 바라봤다.
“열여섯 살 때 마을에 마물이 내려왔어요.”
메이가 약초를 내려놓았다.
카이렌은 말을 이었다.
“그때 우리 집 헛간이 불탔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을 데리고 나오지 못할 뻔했어요. 저는 무서워서 도망쳤고요.”
“그랬군요.”
“그때 기사 한 분이 마을을 구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분처럼 되고 싶었어요.”
수현은 처음으로 카이렌이 웃는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열여섯 살 소년에게 누군가의 목숨을 구한 기사는 그야말로 영웅이었을 것이다. 그 동경 자체를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그 기사분은 지금 뭐 하세요?”
“은퇴하셨어요.”
“은퇴요?”
“네. 다리를 다치셔서요.”
“은퇴하실 수는 있었나 보네요.”
카이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메이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분은 일반 기사였으니까.”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용사는 다른가요?”
“용사는 신이 선택한 사람이에요. 계약서에도 의무 수행이 끝나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적혀 있어요.”
“의무 수행이 끝나는 시점은요?”
“마왕을 쓰러뜨렸을 때요.”
“마왕을 쓰러뜨린 뒤에는요?”
“그때는 아마…….”
카이렌이 멈췄다.
수현은 기다렸다. 쉬운 말로 대답을 유도하지 않았다. 직접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가 말했다.
“그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수현은 모닥불 속에서 타 들어가는 나무를 바라봤다.
이야기의 끝이 정해지지 않은 계약. 일을 마치면 무엇이 되는지도 모르는 삶. 누구나 목표를 가지고 일할 수 있지만, 목표가 자기 인생 전체를 집어삼켜도 괜찮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럼 제가 한 가지를 물어볼게요.”
“네.”
“카이렌 씨가 쉬면 세상이 바로 멸망합니까?”
카이렌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수현이 웃었다.
“정말로 물어보는 거예요. 지금까지 본 바로는 카이렌 씨 말고도 기사단도 있고, 민병대도 있고, 마법사도 있던데요.”
“그렇긴 하지만…….”
“그럼 지금부터 그 사람들하고 일 나누는 방법을 찾아봐요.”
젠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전 그 말이 마음에 드네요.”
수현이 그를 돌아봤다.
“젠 씨도요?”
“전 화살을 쏘는 사람인데요. 요즘은 마차도 제가 끕니다. 마부가 없어서요.”
“……마차도요?”
“네. 어제는 말 편자도 제가 갈았어요.”
수현은 눈을 감았다.
어쩐지. 여기도 만능 인력을 좋아하는구나.
오르카는 기록표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제가 전투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어요.”
원정대 막사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카이렌도 그를 바라봤다.
“언제?”
“지난달 서쪽 산길에서요. 방패가 깨졌을 때.”
오르카는 왼팔을 만졌다.
“손이 너무 떨려서 창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는데,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이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냥 버텼죠.”
메이가 눈을 내리깔았다.
“나도 그때 봤어. 네 팔이 움직이지 않았잖아.”
“그랬지.”
오르카는 웃으려다 말았다.
“그런데 카이렌이 그날도 앞에서 싸우고 있었거든. 나만 뒤로 빠질 수가 없었어.”
수현은 카이렌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른 사람을 지키려고 한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는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되어 버린 것이다.
“미안해.”
그가 말했다.
오르카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건 아니지.”
수현은 두 사람 사이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둘 다 잘못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럼요?”
“누가 지쳐도 대신할 사람이 없는 구조가 문제죠. 그걸 개인의 용기만으로 버틸 수는 없어요.”
젠이 나무 상자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사람을 더 보내 달라고 해도 안 보내 줍니다.”
“그 요청도 기록이 있나요?”
젠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난번엔 구두로만 말했어요.”
“그럼 이번엔 필요한 인원하고 이유를 적어 보죠.”
“또 종이!”
데런이 소리쳤다.
수현도 웃었다.
“맞아요. 또 종이.”
“언젠가 마왕은 못 이겨도 서류 산에 깔려 죽겠군.”
오르카가 농담하자 원정대원들이 웃었다.
그 웃음이 끝난 뒤 카이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희가 못 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수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현재 계약이 어떤 권리를 보장하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법적으로 거절할 수 있다고 쉽게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묻는 사람에게 침묵만 할 수도 없었다.
“가능한 일부터 해 봐요.”
“어떤 일이요?”
“지금 상태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해서 알리는 거요. 그다음에 책임자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남기고요.”
카이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
해가 저물 무렵 수현은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 잔량 24퍼센트.
메모장에는 사무실 주소와 동료 연락처가 남아 있었다. 연락 버튼을 누르면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가락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결국 메시지 작성 화면만 열었다.
[사무장님, 갑자기 연락이 끊겨서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썼다가 지웠다.
무슨 말을 써야 할까.
[다른 세계에 왔습니다. 여긴 용사가 다쳐도 퇴근을 못 합니다.]
그건 더 이상했다.
수현은 화면을 닫았다.
지금 누군가에게 보낼 수는 없지만, 언젠가 돌아가게 된다면 설명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녀에게 이곳은 모험의 시작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실종이었으니까.
메이가 천막 입구에 섰다.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집 생각이 좀 나서요.”
“가족이 기다려요?”
“부모님도 계시고 친구도 있죠. 사무장님도 제가 없어져서 곤란할 거예요.”
메이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제가 도움을 청해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메이 씨가 이런 일을 예상하고 부른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수현 씨가 돌아가는 길을 못 찾으면 어떡하죠?”
“찾아야죠. 아직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메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 서고에 오래된 소환 기록이 있다고 들었어요. 계약관리실 옆건물에요.”
수현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요?”
“네. 하지만 허가 없이는 못 들어가요.”
“허가요?”
수현은 잠깐 웃었다.
“그거면 해 볼 만하겠네요.”
메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현 씨는 그 말이 제일 무섭지 않아요?”
“그럴 때도 있죠.”
수현은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그래도 허가받는 방법을 모르는 것보단 낫잖아요.”
***
다음 날 아침 열 시.
수현과 카이렌, 메이는 약속대로 브레그의 담당관실 앞에 섰다.
문은 잠겨 있었다.
안쪽에서 인기척은 났다.
“감독관님?”
수현이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불렀다.
“어제 오늘 아침 열 시까지 서류 주신다고 하셨는데요.”
안쪽에서 의자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브레그의 얼굴은 밤새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보였다.
“왔군.”
“네. 약속 시간이라서요.”
“안 그래도 준비했다.”
그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제7원정대 북쪽 수로 작전 지원금 지출 내역]
식량 구매 은화 18닢.
화살 구매 은화 12닢.
말먹이 은화 10닢.
치유 물품 은화 20닢.
합계 은화 60닢.
숫자는 딱 맞았다.
너무 딱 맞아서 오히려 수현은 천천히 읽었다.
“치유 물품 은화 스무 닢이요.”
“그렇다.”
“어디서 구매하셨습니까?”
“왕도 상회.”
“언제요?”
“어제.”
“입고됐나요?”
“물론이지.”
“그럼 메이 씨는 왜 못 받았죠?”
브레그가 이마를 찌푸렸다.
“정산 문제 때문이라고 들었다.”
“물건은 구매했고, 창고에 있다고요?”
“그렇다.”
수현은 메이를 바라봤다.
메이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제 창고엔 없었어요.”
브레그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창고지가 실수했겠지.”
“그럼 같이 확인하시죠.”
“내가 직접?”
“네. 잘못이 없으면 금방 끝날 일이잖아요.”
그는 긴 한숨을 쉬었다.
“좋다. 대신 오늘로 끝내.”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끝날지 말지는 가 봐야 알 수 있으니까.
***
보급창고는 어제보다 더 어수선했다.
창고지기는 담당관이 직접 오자 허둥지둥 장부를 펼쳤다.
“치유 물품이라면 여기 들어왔습니다. 은화 스무 닢어치.”
“어디 있나?”
브레그가 물었다.
창고지기가 선반을 훑었다.
“어, 그게…….”
수현은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선반 위엔 빈 상자가 두 개 있었다.
“어제 들어온 물약 다섯 병.”
창고지기가 장부를 가리켰다.
“오늘 새벽에 지급했습니다.”
“누구에게?”
“메이 치유사에게…….”
“저 안 받았어요!”
메이가 소리쳤다.
창고지기가 땀을 닦았다.
수현은 지급 기록에 적힌 이름과 번호를 나란히 놓았다.
어제 확인한 것과 같은 필체였다.
“수령 확인을 담당하는 분이 따로 계세요?”
“제가…….”
“그럼 지급할 때 얼굴을 보셨나요?”
“갑옷 입은 사람이었다니까요.”
브레그가 책상을 탕 쳤다.
“내가 이런 하찮은 일까지 확인해야 하나!”
수현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찮은 일.
누군가는 치료를 받지 못해 통증에 시달리는데, 약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는 건 하찮은 일이란다.
“감독관님.”
수현은 최대한 조용히 말했다.
“말 그대로 이 물건이 어디로 갔는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누군가 잘못했으면 고치면 되고,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겠으면 지급 절차를 고쳐야겠죠.”
“너는 참 쉬운 소리를 하는군.”
“쉽다고는 안 했어요.”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해야 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한참 뒤, 브레그는 창고지기에게 명령했다.
“오늘부턴 물품 받을 때 반드시 수령자에게 직접 각인을 받아라.”
창고지기가 깜짝 놀랐다.
“전부요?”
“그래, 전부!”
메이가 숨을 삼켰다.
수현도 잠깐 놀랐다. 적어도 하나는 바뀌었다.
작은 변화였지만 진짜였다.
***
그날 오후, 원정대의 새 출근부가 만들어졌다.
수현은 카이렌과 메이, 젠, 그리고 마부 출신의 창병 데런까지 한자리에 모았다. 마지막 다섯 번째 대원은 회복 중인 방패 기사 오르카였다. 그는 왼팔에 깁스를 한 채 천막 구석에 앉아 있었다.
“좋아요. 앞으로 매일 무엇을 했는지 기록할 거예요.”
젠이 손을 들었다.
“저희가 글씨를 잘 못 쓰면요?”
“그림으로 표시해도 됩니다.”
“그림이요?”
“검 그림은 전투, 발 그림은 이동, 눈 감은 얼굴은 휴식. 나중에 제가 정리해 드릴게요.”
데런이 낄낄 웃었다.
“그럼 말 그림은 말 먹인 시간입니까?”
“좋죠.”
“그럼 똥 치운 시간도…….”
“그것도 업무예요.”
모두 웃었다.
카이렌만 진지하게 손을 들었다.
“저는 밤에 꿈에서 싸웠는데 그건 어떻게 적습니까?”
수현은 그를 바라봤다.
“그건 악몽이라고 적으세요.”
카이렌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 뒤에서 메이는 잠깐 시선을 내렸다. 카이렌의 잠꼬대가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
그때 천막 밖에서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이수현!”
세드나였다.
“계약관리실에서 요청한 서류를 찾았다.”
그녀가 봉투 하나를 건넸다.
봉투에는 메이의 치유 비용 산정 기준이 들어 있었다. 숫자가 빼곡했고, 마지막 장에는 낯선 항목이 있었다.
[제7원정대 특별 회복 충당금 — 전출 인원 정산 포함.]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전출 인원도 치료비를 내나요?”
세드나가 얼굴을 굳혔다.
“그 항목은 나도 처음 본다.”
“그럼 누가 만든 겁니까?”
서류 맨 아래에는 작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특별 회복 관리국 승인.]
수현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부서가 하나 더 나왔다.
이 세계의 행정 조직도는 아무래도 미로처럼 생긴 모양이었다.
제6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