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민원 중계 장치 앞에 서자 이수현은 묘한 긴장을 느꼈다. 지난번엔 균열이 발견돼 시동 전에 멈춘 장치였다. 오늘은 기술자 루세가 모형 회로의 안정성을 확인한 뒤 아주 작은 문자 신호만 시험하기로 했다.
“사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루세가 명확히 말했다.
“물건도 아닙니다. 문자 기록이 한쪽 보존면에서 다른 보존면으로 복사되는지만 봅니다.”
“그것도 다른 세계로 가는 건가요?”
메이가 물었다.
“아니. 같은 시설 안에서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단계야.”
수현은 숨을 내쉬었다. 차원 간 통신이라는 말에 기대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지만, 장치가 켜질 때마다 고향의 주소가 눈앞에 나타날 것 같았다. 기대는 늘 사실보다 빠르게 달렸다.
안전 점검표를 받은 수현은 항목을 하나씩 읽었다. 밀폐실 대피 경로 확보, 접속 마석 외부 보관, 시험 시간 제한, 이례적인 발광 시 즉시 차단. 루세는 중단 권한을 가진 기술자 이름을 직접 적었다.
“참관하는 사람이 불안해서 중단을 요청하면요?”
“그땐 멈춰서 설명할 거야. 기술적으로 위험이 없다고 판단되면 이유를 말해 줄 거고.”
“참관 동의를 철회하고 나갈 수는 있겠죠?”
“당연하지.”
“그것도 적어 주세요.”
루세는 잠시 수현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실험 대상이 아닌데도 그런 걸 확인하는군.”
“오늘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내일은 사람이 될 수 있잖아요. 경계가 어디 있는지는 처음부터 써 두는 편이 좋죠.”
***
첫 번째 시험은 단순했다. 종이에 그려진 세 개의 동그라미가 장치 안쪽에 비치면 다른 판 위에 같은 표시가 나타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유리벽 뒤에서 바라봤다. 은색 빛이 잠깐 모였다가 사라졌다. 반대편 판에는 동그라미 두 개와 찌그러진 선 하나가 생겼다.
“일치 실패.”
루세가 말했다.
“그런데 전혀 다른 그림은 아니네요.”
메이가 말했다.
“맞아. 일부 정보가 유실됐어.”
수현은 이상하게도 그 결과가 낯설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전송 과정에 글자가 깨지는 일이 있었다. 다만 이곳에서 깨진 글자는 단순한 오류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주소가 한 글자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장소를 가리킬 수 있으니까.
“전송 정확도를 시험하기 전에는 실제 위치 정보는 넣지 않겠죠?”
“당연하지.”
루세는 시험표에 '모형 문자 손실'이라고 적었다.
두 번째 시험에서는 문자 대신 서로 다른 길이의 선을 썼다. 결과는 나아졌다. 세 번째 시험에서는 고정된 번호 세 개를 보냈다. 이번에는 전부 맞았다. 그렇다고 출구가 열리지는 않았다. 화면 뒤편엔 그저 정교하게 그려진 숫자 셋이 남았다.
“이걸로 제가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니죠.”
수현이 말했다.
“아니.”
루세는 곧장 대답했다.
“이건 같은 방 안에서 문자가 복사된다는 뜻뿐이야.”
수현은 쓰게 웃었다.
“그래도 첫 번째 시험보다 나아졌네요.”
“기술자는 보통 그런 날을 좋아해.”
루세가 말했다.
***
루세는 시험이 끝난 뒤 수현을 모형 회로 앞에 다시 세웠다. 은색 구슬 사이로 가느다란 선이 이어져 있었다. 그는 한쪽 구슬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쪽에 숫자 다섯을 넣으면 저쪽에도 다섯이 나오도록 만든 장치야.”
“그럼 원래 장치는 무엇이 달랐나요?”
“일부 기록에는 이쪽과 저쪽이 같은 방이 아니었다고 쓰여 있어. 하지만 '같은 방이 아니다'는 말이 다른 건물인지, 다른 기록 체계인지, 정말 다른 세계인지 구별이 안 돼.”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겪은 일이 실제였다고 해도, 과거 기술자가 쓴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별도 문제였다.
“기록을 쓴 사람이 지금 있다면 물어볼 텐데요.”
“지금은 없지. 남은 건 장치와 낡은 장부뿐이야.”
루세는 마석 하나를 책상 위에 놓았다. 손톱만 한 유리 조각처럼 보였다.
“이걸 너무 오래 켜 두면 접속부가 뜨거워져. 최근의 균열도 거기서 시작됐어.”
“그럼 시간 제한이 중요한 거군요.”
“맞아. 그런데 옛 장부엔 시험이 성공했다고만 쓰여 있지 얼마나 오래 가동했는지 없는 날이 있어.”
수현은 시험표를 넘겨 보았다. 오늘 계획에는 시작·종료 시간과 중단 사유를 쓰는 칸이 있었다. 처음에는 번거로워 보였는데 지금 보니 모두 이유가 있었다.
“그럼 누가 나중에 이걸 읽더라도 똑같은 실수를 하지는 않겠네요.”
“적어도 어떤 실수였는지 알아볼 수는 있겠지.”
루세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수현은 책상 끝에 놓인 낡은 장갑을 보았다. 누군가 장치를 정비하면서 손을 보호하려고 쓰던 물건일 것이다. 찢어진 손가락 부분이 수선되어 있었다.
“이런 장비는 작업자에게 따로 지급되나요?”
“원래는. 오래전에는 다들 자기 돈으로 샀다는 이야기가 있어.”
수현이 얼굴을 찡그렸다.
“여기도 그렇군요.”
“어느 곳이라고 다를 줄 알았나?”
“조금은 기대했는데요.”
수현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곧 실험실 장비 지급표를 확인해 보자고 제안했다. 루세는 오래된 장갑을 창고에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둔 이유를 설명했다. 이건 사고 보고서에 붙일 현물 증거였다. 수현은 그 말을 듣고 더는 장갑을 건드리지 않았다.
오늘은 귀환의 비밀뿐 아니라 실험실에서 일하는 사람의 안전도 기록에 남는 날이었다.
***
점심을 먹으며 르네는 옛 문서의 새로운 주석을 보여 주었다. '외부 계열 주소'라는 표기가 지리적 장소만 뜻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기록 체계에서 온 문서, 관할이 다른 기관으로 전달된 봉투, 아예 기록 형식이 다른 자료에도 같은 표기를 썼다고 했다.
“그럼 외부 계열이라고 적혀 있어도 이세계 주소라는 뜻이 아닐 수 있군요.”
“그렇습니다.”
르네가 답했다.
메이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엔 서울을 찾은 줄 알았는데.”
“서울이 아니라는 것도 아직 모르죠.”
수현이 말했다.
“어느 쪽이든 증거가 부족해요.”
그 말을 하면서 수현은 탁자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불확실하다는 말이 언제까지나 안전한 결론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돌아가야 할 집이 있었고, 이제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르네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낮게 말했다.
“원한다면 검토 일정을 문서로 요청할 수 있습니다.”
“제가 요구한다고 장치가 빨리 안전해지진 않겠죠.”
“그렇지만 누가 어떤 일을 언제까지 검토하는지 알 수 있지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이 필요했다. 끝없는 기다림이 아니라 확인할 수 있는 다음 단계가.
***
오후에는 실험실 문 앞에서 작은 소란이 났다. 시설 관리인이 익명의 편지를 들고 와 무조건 지금 장치를 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편지에는 '일곱 번째 시도에서 문이 열린다'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관리인은 오래된 중계실 전설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여섯 번 실패하면 일곱 번째는 성공하는 법이오!”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루세는 서류를 건넸다.
“시험 조건이 달라졌으니 횟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계획에도 네 번째 시험은 없어요.”
“하지만 이 종이에 적혀 있잖소.”
수현이 한 걸음 나왔다.
“누가 보냈는지 확인되나요?”
“그걸 꼭 알아야 하오?”
“실험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근거가 필요하죠.”
관리인은 화를 냈다. 그러나 루세는 장치 전원을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도 편지 한 장을 정식 명령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수현은 그 모습이 왠지 뿌듯했다. 처음 이세계에 왔을 때는 지시서 한 장이 용사의 잠을 깨우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지금은 익명의 쪽지 하나가 실험실의 안전 수칙을 바꾸지 못했다.
“그럼 정말 돌아갈 방법이 없어도 괜찮소?”
관리인이 물었다.
수현은 잠깐 말을 잃었다.
“괜찮지 않습니다.”
그녀가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급하다는 이유로 제가 죽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관리인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
수현은 루세와 함께 시험실 밖의 사고 대응 기록을 읽었다. 예전 마석 장치 사고는 아주 거창한 실패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작은 금이 있다는 보고를 바쁜 일정 때문에 다음 점검으로 미뤘고, 다음 날 누군가 급하게 가동하면서 문제가 커졌다는 내용이었다.
“누가 가동하라고 했나요?”
수현이 물었다.
“지금 자료에는 최종 지시자의 이름이 없어.”
“그럼 그 사람부터 찾아야 하나요?”
“사고 조사에서는 필요할 수 있겠지. 그런데 우선 똑같은 상황이 되면 멈출 수 있어야 해.”
루세는 문 옆에 빨간 손잡이를 설치한 이유를 설명했다. 승인자가 누구든 현장 기술자가 위험을 느끼면 작동을 중단하도록 만든 장치였다.
“이걸 당기면 정말 바로 멈추나요?”
“그건 오늘 확인했어. 마석이 완전히 식는 건 시간이 걸리지만 입력은 즉시 차단돼.”
수현은 잠시 생각하다 질문했다.
“그럼 중단한 기술자에게 불이익은 없나요?”
루세가 웃지 않았다.
“그건 장치가 해결해 주지 않아.”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중단 스위치가 있어도 그것을 당긴 뒤 징계를 걱정해야 한다면 실제로 누구도 쓰지 못할지 몰랐다. 수현은 실험실 책임자에게 현장 중단 권한과 그 사유를 문서로 남길 것을 제안했다. 루세는 동료들과 의논해 보겠다고 답했다.
잠깐 뒤 젊은 기술자 하나가 찾아왔다. 그는 지난번 균열 발견 때 자신이 보고한 내용이 '점검 지연'으로만 기록됐다고 말했다.
“보고를 늦게 했다는 뜻으로 읽힐까 걱정됩니다.”
수현이 문서를 보았다.
“발견 시각과 보고 시각, 점검을 실제 시작한 시각을 따로 적으면 어떨까요?”
“그럼 제가 제때 알렸다는 걸 확인할 수 있겠네요.”
“네. 아직 확인하지 않은 시간은 확인 못 했다고 남기고요.”
기술자는 표정을 조금 폈다. 수현은 이곳이 마법을 연구하는 장소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사람들의 일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다시 느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일이 누군가의 안전을 건너뛰는 이유가 되지 않도록 하자고 마음먹었다.
***
장치가 꺼진 뒤에도 루세는 잠시 실험실에 남아 온도계와 마석 보관함을 점검했다. 수현이 문밖에서 기다리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시험은 끝났으니 먼저 가.”
“정리도 작업 시간에 포함돼 있나요?”
“그렇지.”
“그런데 다들 퇴근했는데 루세 씨 혼자네요.”
“한 명이 마지막 점검을 맡기로 했어. 내일은 다른 사람이 하고.”
수현은 안심했다. 마법 장치의 위험을 보면서도 청소와 점검은 잊기 쉬웠다. 루세는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온도를 기록했다.
“다음 시험에 참가할지는 저도 다시 결정하겠습니다.”
수현이 말했다.
“그렇게 해. 오늘 동의했다고 다음에도 자동 참가하는 건 아니야.”
수현은 그 대답이 좋아 오래 마음에 담았다. 기술자가 사람의 선택을 이렇게 간단히 존중하는 모습은 어떤 실험 성공보다 믿음직했다.
그는 마지막 점검표에 종료 시각을 적고 문을 잠갔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기록도, 다음 날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기록이었다.
***
해가 지기 전 루세는 시험 결과를 공개했다. 동일 시설 내의 단순 문자 복제는 제한된 조건에서 가능, 손실률은 아직 들쭉날쭉, 외부 계열 통신과 사람 이동 기능은 확인되지 않았음. 보고서에는 수현이 듣고 싶은 문장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서명했다. '결과를 확인함'. 기술적 성공을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따로 적었다.
세드나가 물었다.
“실망했나?”
“조금요. 사실 많이요.”
“그래도 오늘 필요한 걸 했잖아.”
“네. 다치지 않고 끝냈죠.”
그날 밤 수현은 침대 옆에 놓인 서울 주소 메모를 꺼냈다. 안전하게 보내고 싶었던 짧은 편지와 나란히 놓았다. 빈 칸이 많은 종이들이었다. 하지만 종이의 빈 곳은 나중에 채울 수 있었다. 한 번 다친 사람의 시간은 그렇게 쉽게 되돌릴 수 없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르네의 심부름꾼이 새 통지를 가져왔다.
[원격 수신 기록 전사 담당 메르의 과거 근무 이력 확인. 현장 면담 신청 가능.]
수현은 문서 끝의 관할을 읽었다. 메르는 왕도에서 멀지 않은 강변 기록 보존소에 있었다. 귀환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문서가 바뀌었다면 누가 바꾸었는지는 물어볼 수 있었다.
그녀는 신청서를 작성하기 전에 루세의 시험표를 다시 읽었다.
오늘의 결론은 문이 열렸다는 게 아니라, 문을 열기 전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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