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연락기록반의 제3항 7번 보존함은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큼 큰 상자였다. 이수현은 뚜껑에 달린 자물쇠 두 개를 보며 북방 회복소의 이관실을 떠올렸다. 그때도 열쇠를 두 사람이 나눠 갖고 있었다. 제도는 비슷했지만 내용물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목록과 봉인 상태만 확인합니다.”
보존 담당 르네가 말했다.
“원본 열람은 아직 승인받지 못했어요.”
“목록에서 인적 정보가 나오면요?”
“그 부분은 가리고 제공하겠습니다.”
수현은 입회자 명단을 확인했다. 자신, 세드나, 르네, 기록원 사서 이베른. 메이는 동행하지 않았다. 보호 계약의 당사자라는 이유로 자기 비용과 관계없는 기록까지 볼 권한은 없었다. 대신 메이는 동부 정산실에서 요청한 자료의 적정성을 세드나의 동료에게 문의하기로 했다.
함 안에는 바랜 천으로 싸인 문서철 네 권이 있었다. 눈에 띄는 건 겉장에 붙은 두 개의 표찰이었다.
[에린: 원격 수신 담당.]
[에린: 원천 신고 기록 담당.]
“이름이 두 번 나왔네요.”
이베른이 말했다.
“같은 사람인지 아직 모릅니다.”
수현이 대답했다.
“그걸 알기 위해서라도 날짜와 부서를 먼저 봐야죠.”
르네는 표찰을 제외한 인적 표기를 덮고 장부의 날짜를 읽어 주었다. 두 업무 사이에는 꽤 긴 간격이 있었다. 기록이 보존된 시점도 달랐다.
“같은 사람이 오래 근무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군요.”
세드나가 말했다.
“또는 나중에 한쪽 기록의 이름을 옮겨 적었을 수도 있죠.”
수현은 세 번째 가능성까지 적었다. 잉크가 종이에 닿는다고 사실이 확정되는 건 아니었다.
오래된 직원 목록에는 에린이라는 이름 뒤에 성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원격 수신 담당자는 에린 소렐. 신고 기록 담당자는 에린 라……까지만 읽혔다. 종이 모서리가 찢어져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 같죠?”
이베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졌네요. 하지만 이름 하나로 판단하지 맙시다.”
수현은 특히 날짜가 오래된 기록을 주의 깊게 보았다. 수신 담당자는 시설을 옮기는 시기에 장부를 인수한 사람으로도 표시돼 있었다. 소환이 일어났던 최근 날짜에는 그의 이름이 직접 서명된 기록이 없었다. 이 차이가 중요했다. 오래된 이름이 현재의 사건에 등장했다고 지금도 그 사람이 같은 일을 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
목록 열람이 끝나자 네 사람은 복도에서 차를 마셨다. 이베른은 가루 설탕을 잔 가장자리까지 가득 넣었다. 수현은 서류실 전체의 정전보다 사서의 건강이 더 걱정될 정도였다.
“사서님, 차보다는 설탕을 드시는 것 같습니다.”
“서고는 춥습니다.”
“그건 인정해요.”
르네는 새 신청서 한 장을 건넸다. 제한 기록의 담당 이력 확인을 요구하는 서식이었다.
“두 에린의 같은 사람 여부를 공식 판정하려면 개인 신상 자료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목적이 그 정도의 열람을 정당화하는지는 다시 심사해야 합니다.”
수현은 서류를 내려다봤다. 답을 빨리 얻으려면 이름과 주소, 가족 이력까지 조회하고 싶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원격 수신 담당자가 오래전에 퇴직한 사람이거나 이미 세상을 떠났다면, 가족의 정보를 뒤져도 귀환 절차와 아무 관련이 없을지 몰랐다.
“신원 전체가 아니라 업무 인계 경위만 확인하겠습니다.”
“그래도 동일인이라는 확정은 늦어집니다.”
“그럴 수 있죠. 제 목적에 필요한 것만 알아내면 되니까요.”
르네는 펜 끝을 멈췄다.
“그렇게 범위를 좁혀 달라는 사람은 드뭅니다.”
“제가 원하지 않는 자료까지 누군가 들여다보는 걸 싫어해서요.”
***
수현은 다음 날 오전 기록원에서 이관된 문서의 표지를 비교했다. 원래는 전혀 다른 서류였던 두 장이 같은 참조번호를 얻은 순간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장부의 날짜는 정확하지 않았다. 어떤 날짜는 문서를 작성한 날이고, 어떤 날짜는 보관함에 넣은 날이었다.
“작성일과 접수일이 왜 같은 칸에 있죠?”
“오래된 양식은 칸이 부족했습니다.”
이베른이 말했다.
“새 양식으로 옮길 때 둘을 구분할 자료가 남지 않은 경우도 많지요.”
“그럼 이 날짜만 보고 누가 먼저 작성했는지 추정하면 안 되겠네요.”
“그렇습니다.”
이베른은 수현에게 작은 표준표를 보여 주었다. 새 기록체계는 작성·수정·접수·보존 이관 날짜를 따로 표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수현은 그 규칙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새 시스템을 쓰는 사람이 옛 자료의 결함을 잊어버린다면 좋은 규칙도 소용없었다.
“오래된 자료를 옮길 때는 빈 칸도 그대로 남기나요?”
“원칙은 그렇지요.”
“현장에서는요?”
이베른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가끔 누군가 추정 날짜를 넣었다고 들었습니다.”
수현은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 편의를 위해 채운 한 칸이 몇 년 뒤 다른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이유가 될 수 있었다. 확정된 사실처럼 보이는 숫자에는 그런 위험이 있었다.
점심 무렵 수현은 문서철 하나에서 양식 변경 시기의 업무 지침을 찾았다. 거기에는 특이한 안내가 있었다.
[인명처럼 보이는 제목 머리글은 서명으로 간주하지 말 것.]
“왜 이런 경고가 필요했을까요?”
“예전에 그렇게 읽은 사람이 있었겠지요.”
이베른이 대답했다.
수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문제가 한 번 일어난 뒤에 경고문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실패를 기록한 문장일 수도 있었고, 누군가의 피해를 줄이려고 남긴 노력일 수도 있었다.
그때 세드나가 방문했다. 그녀는 옛 사고 보고서를 들고 있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두 기록 담당자를 혼동해 한쪽 사람이 다른 쪽 사람의 업무 책임을 떠안았던 사례였다. 잘못 지목된 당사자는 퇴직 후에도 민원을 받았고, 정정까지 여러 달이 걸렸다.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군요.”
수현이 말했다.
“그래서 네가 신원 조회 범위를 좁힌 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지금도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요.”
“빠른 답이 항상 올바른 답은 아니니까.”
수현은 종이를 접었다. 자신이 찾는 에린이 한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이름을 억지로 겹쳐 놓는 순간 새로운 피해가 시작될 것이다. 귀환을 서두르는 사람의 조급함이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됐다.
그날 저녁 수현은 보고서 제목을 바꿨다. '에린의 정체'가 아니라 '에린 표기의 사용 경위'. 제목을 바꿨을 뿐인데 조사할 질문도 훨씬 정확해졌다.
***
오후에는 옛 담당자들의 직무 분장을 복원한 표가 도착했다. 원격 수신반은 장치 자체를 운영하는 기술자들과 접수 사실을 기록하는 서기로 나뉘어 있었다. 구조 신고 기록 담당은 전투 또는 치료 현장에서 응급 보호 계약에 사실을 기록하는 업무였다. 두 직무는 원칙상 서로 다른 부서였다.
“그런데 왜 둘의 문서가 한 함에 들어 있었을까요?”
수현이 물었다.
“R-0라는 참조 번호 때문에 한꺼번에 이관됐을 가능성이 있죠.”
세드나가 말했다.
“번호가 같아도 서로 다른 계약인데요.”
“후대의 관리자가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수현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었다. 서울에서도 부서가 통합되면 다른 성격의 데이터를 하나의 항목으로 묶는 일이 종종 있었다. 시스템을 바꾸는 비용을 줄였다고 보고하지만, 나중에 사람 하나가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며칠씩 고생했다.
“혹시 이관 당시 담당자에게 기록 확인 절차가 있었나요?”
이베른은 낡은 지침서를 찾았다. 확인란은 있었다. 그러나 두 문서가 교차 색인으로 묶일 때 원래 목적을 유지했는지 검토한 서명은 찾을 수 없었다.
“없다고 확정할 수는 없겠죠?”
“다른 철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현재 보존 자료에서 미확인’이라고 쓰죠.”
세드나는 조금 웃었다.
“당신 때문에 보고서에 '확인되지 않음'이라는 문장이 늘어난다.”
“그 대신 나중에 정정할 근거가 생기잖아요.”
***
숙소에 돌아왔을 때 메이는 동부 정산실의 접수번호를 받아 들고 있었다. 그녀가 제출하려는 것은 수현이 작성한 의견서가 아니라 자신의 치료 사용 내역과 보급품 수령 확인이었다.
“제가 직접 서류를 정리했어요.”
“훌륭하네요.”
“그런데 여전히 무서워요. 모르는 항목이 너무 많아서요.”
수현은 책상 옆에 앉았다. 메이는 자신의 청구서 맨 위에 ‘적립금’과 ‘실비’, ‘상환 예정금’이라는 세 단어를 적어 놓았다. 각 항목마다 증빙이 있는지 표시해 두었다. 적립금의 지급 목적과 실제 지급액이 일치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 않으면 돼요.”
수현은 말했다.
“특히 내가 쓰지도 않은 물품에 대해 ‘받았다’고 인정할 필요는 없고요.”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확인한 건 약재 두 병과 지혈 천 세 묶음뿐이에요. 나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썼어요.”
“그대로 제출하세요.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해도 최종 문구는 직접 읽고요.”
메이는 잠시 망설였다.
“혹시 제가 틀렸으면요?”
“틀리면 정정할 수 있죠. 확인한 사실과 추측을 나눠 두었잖아요.”
***
서고에서 돌아오는 길 수현은 에린이라는 이름이 적힌 종이의 사본을 다시 보았다. 붉은 표시 두 개가 같은 종류의 인장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세하게 위치가 달랐다. 그녀는 이것이 다른 사람이 찍은 증거인지 궁금해졌다가 스스로 멈췄다. 인장은 기울여 찍을 수도 있었다. 잉크가 많이 묻으면 문양이 번질 수도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어요?”
세드나가 물었다.
“같아 보이는 게 정말 같은 건지요.”
“그래서 결론은?”
“모르겠어요.”
수현은 종이를 접었다.
“전엔 모른다는 답을 들으면 답답했는데, 요즘은 제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 됐네요.”
세드나는 웃었다.
“좋은 조사관은 자기 추측이 무엇인지도 아는 사람이야.”
“제가 조사관 자격이 있나요?”
“공식 조사관은 아니지. 그래도 질문을 정확히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잖아.”
수현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새 세계에서 자신은 한국 공인노무사 자격을 가지고 왔지만, 그 자격이 왕국에서 법적인 권한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기록을 읽는 습관과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인내심이었다. 그 두 가지는 누구의 허가를 받아야만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그날 세드나는 기록원 게시판에 붙은 옛 공고를 보여 줬다. 문서 이름이 같아도 보존 번호가 다른 경우, 그 차이를 목록에 남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현은 자신의 기록철 표지에도 그것을 적용했다.
[R-0 보호 / R-0 소환: 교차 색인 존재, 서로 다른 업무 기록.]
표지 아래에 작은 글씨를 더했다.
[에린: 성명 일치만으로 동일인 추정 금지.]
수현은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무슨 비밀을 밝혀낸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후 누가 이 서류를 보더라도 같은 오해를 되풀이할 가능성은 조금 줄어들었다.
***
수현은 서류철 표지를 새로 붙이고 세드나에게 보여 주었다. 세드나는 붉은 펜으로 '추가 조사 필요'라고 적었다. 둘은 누가 먼저 정답을 말할지 겨루지 않았다. 다음에 이 문서를 읽을 사람이 잘못된 사실을 이어받지 않게 만드는 일이 더 중요했다. 수현은 그렇게 생각하자 일이 조금 덜 무거워졌다.
***
그날 저녁, 세드나가 구 사무실의 퇴직자 관리대장에서 한 가지 발견을 전했다. 에린 소렐이라는 이름은 여러 해 전에 원격 수신 장비를 관리하는 업무에서 물러났고, 같은 이름의 다른 담당자가 이후 문서 보존을 맡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다만 ‘이후 담당자’의 이름은 에린이 아니라 메르였다.
“그럼 현재 원격 수신 기록에 적힌 에린은 과거 기록을 인용한 것일 가능성이 있겠네요.”
수현이 말했다.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최근 문서에 누가 그 이름을 그대로 썼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
“대조할 사람을 한 명 더 찾았군요.”
수현은 자료철의 마지막 칸에 ‘메르: 현행 기록 전사 경위 확인 대상’이라고 적었다.
이름 두 개를 찾으면 문제가 풀릴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필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문서가 지나온 경로였다. 누구의 손을 거쳤고, 누가 내용을 확인했으며, 누가 그다음 사람에게 넘겼는지.
서류의 사정은 결국 사람의 사정이었다.
잠들기 전 수현은 자신에게 가장 낯선 문장을 썼다.
[나를 데려온 사람의 이름을 몰라도, 내 의사 없이 나를 옮기는 일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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